참여정부 이후, 다시 보수 정권의 연장이 결정되면서 한국 사회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과연 누가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문제'만이 점점 커져 가는 사회, 그 속에서 한국교회도 그 '문제'들 속으로 잠식되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이며, 세상에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선언해 왔다. 하지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고 복음이 이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와는 어떤 맥락에서 구원이 되는지, 능력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적실하게 해설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렇게 우리끼리 서로 하찮은 말다툼을 하면서 함께 한국 사회의 문제 속으로 침몰하고 있다. 마치 살아 있는 아이들을 고스란히 품은 채 침몰하던 세월호처럼.

이러한 한국교회의 실패는 어디서부터였을까? 다양한 문제 제기가 나올 수 있겠다만, 그 무엇보다도 먼저 실패한 원인은 '성경 읽기'가 아니었을까? '한국교회가 성경을 읽지 않는다'는 단순한 문제를 넘어서, '한국교회가 성경을 잘못 읽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설교 비평으로 날선 비평을 가했던 정용섭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교회는 성경을 도구화'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침몰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 세태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것, 즉 제대로 읽어 내는 것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기를 갈망하는가? 여기에 좋은 성경 교사가 있다. 침몰해 가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 알려 주는 좋은 성경 교사, 김근주가 있다.

<이사야가 본 환상>, <특강 예레미아>를 집필하며 '예언서'에 대한 고유한 이해를 알려 줬던 김근주가 이번에는 두 권의 책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구약의 숲>과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이라는 책이다. 첫 번째 책 <구약의 숲>을 통해 그는 '하나님나라'라는 흔한, 하지만 신선한 관점으로 구약을 통전적으로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두 번째 책인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은 구약에서 드러나는 죽음과 궁극적 소망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근원적 신앙고백인 '부활 신앙'을 재해석해서 들려준다. 그럼 찬찬히 두 권의 책을 살펴보자.

▲ <구약의 숲> / 김근주 지음 / 대장간 펴냄 / 384면 / 1만 6000원

구약의 숲, 성경 읽기의 큰 그림을 그려 내다

김근주의 <구약의 숲> 서두에는 그가 '구약성경'을 읽어 내는 방법론을 세 개의 챕터를 통해 해설하고 있다. 그의 방법론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복음주의적 관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복음주의'를 표방하지만 사실상은 '(내가)복음-주위'라는 내용을 지닌다. 이미 자신이 들어 왔던 설교, 혹은 개인이 처한 상황, 그리고 꿈꾸고 그려 왔던 우상의 모습이 듬뿍 담긴 하나님의 모습을 상정한 '(내가)복음'을 만들어 내고 난 이후, 그 주위를 뺑뺑 돌아가며 성경 전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근주는 이런 저열한 한국교회의 '성경 독법'에 대해 은은히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신구약을 통시적으로 이어가는 '창조'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읽는 '간절함'과 '열심'이라는 마음 자세로, 성경 가운데 있는 온갖 문학적 수사와 장르들을 헤쳐 나가며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성경 독법'은 단순히 세 개의 챕터에 머물지 않는다. 비평학계의 관점들을 고스란히 수용해 나가면서도,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로 본문을 주해하는 그의 태도는 책 전반에 서려 있다. 아니, 30챕터라는 기다란 여행을 마치고나면 나도 모르게 감탄이 튀어나온다. '그래, 성경은 이렇게 읽는 것이었어!'라고 말이다.

구약의 숲, 하나님나라를 그려 내다

성경을 온전히 읽고 해석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의 온갖 텍스트 속에 묻혀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 왔던 '(내가)복음'이 아닌 온전한 복음, 즉 하나님나라의 복음으로 그려진다. 그렇다, 사회 현실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복음'이, '예수'가 무능한 세태를 살아내는 중이다. 과연 '복음'은, 정말 '예수'는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 속에서 이토록 무능했는가? 김근주와 함께 본 <구약의 숲>과 더불어 구약성경을 정독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무지를 깨닫는다. 그의 '성경 독법'으로 그려진 '하나님나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불의한 세상 속에 하나님의 '정의'가 굳건히 서 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음이며, 하나님나라가 불러낸 백성들 사이에서 '공평'을 추동케 하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성령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 비로소 우리가 경시해 왔던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세기 18:19b)라는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 말씀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된다. 그렇다, 이렇게 말씀들이 제각각의 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복음과 예수는 우리게 혼란스러운 사회현실 속에 '응답'하게 된다. 그가 묵묵부답이었던 이유는 그가 무능했기 때문이 아닌, 우리가 잘못 읽어 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김근주로부터 깨닫는다.

구약의 숲, 김근주의 흔적이 묻어나는 감동적인 책

<구약의 숲>은 강의안들을 다듬어 낸 책이다. 강의안의 강점이라면 강의의 현장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특징이다. 또한 신학교에서의 강의니, 현장 속에서 후배들과 겨루었던 그의 치열한 혈투도 서려 있다는 방증일 테다. 참으로 그렇다. 본 책을 읽어 가면서 한국교회와, 한국 신학계와, 마치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우듯이 겨뤘던 그의 삶에 대한 짧은 정보들이 아련히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폭로하고, 하나님나라의 법도를 따라 묵묵히 살아가며, 주류 인생이 아닌 세상이 주는 유혹과 욕망을 거절하는 나그네 인생이요, 변두리 인생의 모습을 구약성경의 서술 곳곳에서 뽑아내는 그의 글을 읽고 있자면 괜히 가슴이 짠해진다. 사실 이러한 복음을 따라 살아 내는 치열한 '삶'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그가 외치는 올바른 '성경 독법'의 토대가 된다. 그의 삶의 처절한 고뇌와 혈투가 서려 있기에 하나님의 탄원 시, 이스라엘 민족의 절망, 그리고 절망 속에 피어나는 소망 또한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연 치열한 삶이 없이 이러한 통전적 해석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통전적 해석이 담긴 본 책은 단순히 구약성경의 구조에 대한 학문적 서설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구약의 숲>은 성경 구절에서 우리의 욕망에 꼭 맞는 신의 형상을 '추출'하여 감동을 끼치는 흔한 한국교회 '(내가)복음-주위' 설교와는 전혀 달리, 구약성경이 흐르고 있는 전체 맥을 짚어 내는 탄탄한 신학 속에서, 그의 삶의 피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텍스트들을 고스란히 살려 내고 있다. 그렇기에 조금은 거칠고, 맛이 어색할지라도 맛이 깊고 진한 웰빙 음식이다.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꼼꼼하고도 담백한 해설이 담겨진 FM 교본

이어서 살펴볼 김근주의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은 부활 신앙에 대해 오염된 기존의 이해를 바르게 잡아 줄 조금은 딱딱하지만 꼼꼼하면서도 담백한 해설이 빛나는 FM 처방전과 비슷한 책이다. 긴말하지 않고 본문의 논지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 / 김근주 지음 / SFC출판부 펴냄 / 224면 / 1만 원

부활 신앙에 관련된 책이 아니었던가?

첫 번째 챕터를 읽고 난 이후 많은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부활 신앙'에 관련된 책에서 내세를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에는 '당황하지 않고' 꼼꼼히 읽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끝!'이라고 외칠 수 있기에 말이다. 그의 논지에 따르자면 구약성경에서 그려 내는 죽음은 죄로 인한 멸망의 저주가 아닌, 인간이라면 응당 거쳐야 할 숙명이다. 또한 우리네들이 '부활 신앙'이라며 웃기게도 고수하고 있는 영육이원론(육체는 멸망할지라도, 영혼은 불멸한다)의 주장은 히브리인들의 구약성경의 세계에서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의 관심은 인간의 죽음 이후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땅을 디디고 있는 현실, 바로 지금에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과연 김근주가 말하는 '부활 신앙'이 무엇이기에 그는 생뚱맞아 보이는 '현실'에 대한 그림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일까.

'부활'이라는 텍스트는 '순교자'라는 컨텍스트와 함께

예전 S우유 광고에서 몇몇의 인물들이 서로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사랑해'라고 고백하던 장면이 있다. '사랑해'라는 동일한 텍스트지만, 각각의 인물과 표정이라는 컨텍스트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그려 내고 있었다. 그렇다, 어떤 텍스트를 이해할 때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라면 컨텍스트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김근주는 '부활'이라는 텍스트의 '컨텍스트'를 그려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현실'이라는 첫 번째 컨텍스트에 이어서 '순교'라는 두 번째 컨텍스트를 그려 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기록된 '부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부활'이 아닌, 국가적·민족적 혹은 가족과 개인의 회복과 신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회복과 신원의 정확한 의미의 디테일을 어떻게 잡아 낼 수 있을까? 김근주는 당대의 컨텍스트를 그려 내고자 에녹1서, 마카비2서, 솔로몬의 지혜서와 같은 외경, 그리고 다니엘서 12장을 인용하고, 때로는 꼼꼼히 주해하여 우리게 고스란히 돌려준다. 그리고는 순교라는 초유적인 상황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 고난당하는 현실 속에서 '신원'에 대한 소망과 성도들의 순결한 '신앙'이라는 컨텍스트의 중요한 디테일을 차근차근 짚어 준다.

부활, 참 쉽죠?

예전 EBS에서 방송했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밥 로스라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를 둥그렇게 깎은 아저씨가 멋들어지게 풍경을 그려 낸 후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내뱉는 장면 말이다. '어때요? 참 쉽죠?' 김근주는 지금과 같이 두 개의 밑그림을 그려 냈다. 하나는 현실에 대한 강력한 구약의 관심이라는 밑그림, 또 하나는 순교의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의 '소망'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이라는 밑그림 말이다. 이러한 전혀 어울리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밑그림이 그려진 후 부활은 나름의 제 자리를 찾는다. 마치 김근주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어때요? 참 쉽죠?'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그리고 신원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하는 두 번째 챕터의 질문인 '신정론'을 끌고 온다. 그리고는 '현실'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첫 번째 챕터의 내용을 끌고 온다. 그리고는 오묘하게 조합시킨다. 이쯤에서 김근주의 언설을 빌려와 보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 속에 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다. 그런 점에서 시편 73편은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부르는 하나님 찬양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이 그의 찬양의 이유가 아니며, 여전히 그는 세상에서는 패배자요, 실패한 자이지만,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다.(P.182쪽) (중략) 시편 기자는 부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날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분께서 일하실 때 일어날 전세의 역전, 하나님의 판결을 기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185쪽)

그렇다, '부활'은 결국 악인들이 흥왕하는 말도 안 되는 현 세태를 살아가는, 진흙탕 같은 현실을 진주와 같은 삶으로 빛나게 만드는 '주님을 향한 순결한 믿음', 그 자체이다. 그의 해설에 따르면 하박국, 예레미아의 경우에는 내세에 대한, 즉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순결한 믿음, 즉 부활 신앙을 지녔다. 그렇다, 김근주는 두 개의 밋밋한 밑그림을 통해 부활이라는 주인공을 부각시키고 있다.

다시 또 하나님나라

그가 결론으로 내리는 부활 신앙은 다음과 같다. 단순히 '내세'라는 허울 좋은 마약에 중독되어 내세를 버려 두고, 내세 속에서 온갖 비상식적인 언행을 일삼는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힘입어 고통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삶 말이다. 바로 그 삶이 하나님나라를 일구는 백성의 삶 아니던가? 불의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내 몸과 삶으로 드러내는 삶 아니던가? 역시나 그가 전개한 논리의 귀결은 하나님나라로 돌아온다.

혼란한 한국사회를 살아 내는 데 있어서 만나봄 직한 김근주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며,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 이 말인즉슨 구약은 신약의 내용들을 이미 은연히 그려 내고 있는 것이며, 신약은 은연히 그려 낸 그 내용들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적실히 표기해 준다는 것이다. 김근주의 두 저서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사실상 두 책은 동일하게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구약의 숲>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큰 그림을 구약 전체를 통해 은연하게 그려 내 준다면, <구약으로 읽는 부활 신앙>은 은연하게 그려진 그림을 집중적으로 확대해서, 또 때로는 더욱 세밀하고 선명하게끔 다시 그려 낸다.

건물은 크고,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크고 또 많으나, 실질적 능력이 없는 시대. 그러면서도 깊은 흑암과 공허한 혼돈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우리들. 우리게 필요한 것은 공허한 '복음'의 외침이 아니라, 우리의 오해들을 파쇄하고 정확한 컨텍스트를 통해 복원해 낸 '복음'일 테다. 한번 김근주와 만나 보자. 그가 그려 내는 컨텍스트들을 통해, 그가 해설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통해, 혼탁한 한국 사회와, 무능한 한국교회를 뛰어넘어, '복음'을 맛보자. 그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엠마오의 두 제자처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던가?'라고. 그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혼탁한 사회 속에서 물을 수 있을 테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이할꼬?'라고 말이다.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으로서의 학업과, 지방 작은 교회에서의 사역을 병행하며 올바른 '신학함'을 향해 달려가는 한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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