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삼 주간 동안 우리는 고국에서 들려오는 안타깝고 답답하고 화나게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 왔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실망스럽고 창피하고 답답한 이야기뿐일까요? 벗겨도 벗겨도 또 드러나는 부끄럽고 갑갑한 소식뿐입니다.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더미 같은데, 그 문제들에 책임 있는 사람들의 언행은 우리를 더욱 실망시킵니다. 표적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번져 가고 있음을 봅니다. 사건 발생 15일만에 대통령이 사과를 했습니다만, 국민의 분노를 달래기보다는 오히려 더 자극한 것처럼 보입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지금 문제의 핵심에 있는 사람은 혼자 도망친 선장도 아니고 부도덕한 업주도 아닙니다. 대통령이 국민 여론의 표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대통령이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생긴 국민의 분노를 달래 주고 풀어 줄 가장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처럼 작은 공동체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싸우다가 한 아이가 다치면 담임목사가 부모님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그 책임을 회피하면 문제의 핵심이 아이에게서 목사의 책임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설교를 통해 저의 정치적인 입장을 교우 여러분에게 강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중대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도 설교자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믿어져서 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간절한 바람을 나누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대통령이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국민들이 진심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사과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온 국민에게 호소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이번 사고를 수습하고, 죄 없이 흘린 수 많은 피가 헛되지 않도록 전 국민적인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에게, 이번 사건을 환골탈태의 계기로 삼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하여, 정치, 경제, 교육, 상업,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워지는 운동이 시작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국민의 상처난 마음과 분노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에너지로 변화되었을 것이고,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부모들이 얼마 후에 "그래도 내 아이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위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요나서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욘 3:4)고 외칩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했습니다.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전해지자, 그도 역시 임금의 의자에서 내려와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왕이 니느웨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욘 3:7-9)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조국이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닷속으로 침몰한 것은 '세월호'가 아니라 '대한민국호'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조국은 처음 TV 화면에서 본 세월호처럼 기우뚱 기울어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대통령과 지도자들은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기울어진 배를 바로잡기 위해 선원들에게 빠르고 정확한 지시를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배를 바로잡고는, 승객들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배에 들어온 물을 함께 퍼내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협력하고 희생해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호는 세월호처럼 허망하게 침몰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민 대각성 운동의 불쏘시개가 되어야 합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에도 벅찬 소시민도 그렇고, 공직에 있는 이들도 그렇고, 평범한 회사원도 그렇고, 사업을 하는 이들도 그렇습니다.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음성이 무엇인지에 귀 기우리고 그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니느웨의 대각성 운동은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그 말씀에 예민하고 민첩하게 응답했기 때문에 결국 왕까지 베옷을 입고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2.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가 정한 말씀 중에 베드로전서 1장 17절부터 23절을 읽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뉴욕에서 미국 장로교 동북대회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틈틈이 세월호에 대한 뉴스를 따라가면서 베드로전서 1장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아, 세월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도록 이 말씀을 보여 주시는구나!'라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방 도시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벧전 1:1)

여기서 언급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그리고 비두니아는 지금의 터키 반도에 있는 도시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지역은 토착 문화와 로마 문화가 뒤섞여 있는 낯선 땅이었습니다. 그 지역 주민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이었습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들을 '나그네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원래 그 도시 출신이었습니다만, 그 도시의 주민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또한 전혀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왜 그들이 갑자기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게 되었습니까? 왜 자신들의 고향에서 나그네처럼 살게 되었습니까?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1장에서 두 번이나 그들이 새로 지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벧전 1:3)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썩을 씨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살아 계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벧전 1:23)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면 내 안에 새로운 자아가 생겨납니다. 주님을 믿는 순간 그동안 자신으로 믿고 있던 자아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 자아는 본래의 내가 아니라 자라오면서 여러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면 그동안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붙들었던 자아가 얼마나 거짓되고 초라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자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럴 때, 새로운 자아가 형성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구속하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거룩한 자아가 회복됩니다. 나의 겉모습은 그대로 있더라도 나의 속에서는 새로운 자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고 성장하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이 전과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거듭남의 증거가 마음속에만 있었는데, 나중에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도 그 증거가 드러납니다. 그것을 가리켜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 증거는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말과 행실에서의 변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십니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벧전 1:14-15)

"여러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여러분의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습니다."(벧전 1:18)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방법을 "욕망을 따라 사는 삶"으로 규정하고, 또한 "헛된 생활 방식"이라고 규정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거짓 자아를 따라 사는 삶은 결국 욕망을 따라 사는 것으로 귀착되고, 그러한 삶의 종말은 파멸과 허무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은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며,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파멸과 허무가 아니라 영원한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사실을 이렇게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벧전 1:3-4)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새로 지어지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은 서슴없이 "예"라고 대답합니다. 어떤 분은 주저하면서 자신 없는 대답을 내놓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잘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에 저는 '다시 복음으로!'라는 연속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해결받기를 소망했습니다.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과 같고, 그 질문은 "지금 죽어도 하나님 품에 안길 믿음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음을 분명히 믿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묻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무엇인가를 믿는 것이 쉬운 사람도 있고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근거가 필요합니다.자신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세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첫째,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느낍니다. 내 안에 그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낀다면, 거듭난 것입니다.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평안과 기쁨이 있다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영적 충만함 가운데 늘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 영적 생활의 목표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늘 이와 같은 충만 상태에 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의심되기도 합니다. 느낌 혹은 감정은 그것 자체로서는 신뢰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둘째, 증거로 알 수 있습니다. 나의 내면과 외면에 생겨난 변화로 인해 우리는 거듭났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던 죄의 유혹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거듭난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해도 되지 않던 악습이 어느 날 사라진 것을 보았다면, 거듭 난 증거입니다. 전에 없던 사랑과 긍휼함이 생겨 이웃의 아픔에 마음을 쓰는 변화가 일어났다면, 거듭난 증거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벧전 1:8-9)

9절 마지막에서 사도는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구원을 이미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도 없으면서 그분을 사랑하고 믿으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다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구원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 구원을 누립니다. 그렇게 구원을 누리는 사람은 언제 죽어도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셋째, 약속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느낌도 필요하고 증거도 필요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살면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넘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느낌이 없고 증거가 없어도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느낌이나 증거에만 의존한다면, 때때로 자신이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 구원받은 사람인지,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사람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느끼며 사십니까? 주님께서 일으키시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변화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 지어진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잠시 여러분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각자 자신의 마음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각자 대답하기를 바라기에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하겠습니다—당신은 거듭났습니까? 당신은 구원받았음을 확신합니까? 베드로 사도의 표현대로 하자면, 당신은 구원을 받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죽는다면 하나님의 품에 안길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까?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났다는 믿음, 우리 믿음의 목표인 구원을 이미 받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구원받았다는 믿음, 지금 죽어도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이라는 믿음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 믿음 위에 선 사람은 때로 거쳐야만 하는 파도를 능히 이겨 낼 수 있고, 때로 넘어야만 하는 거친 산길을 헤쳐 갈 수 있으며, 때로 온 세상을 뒤덮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젠가 건너야 하는 요단강을 평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설렌 희망으로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1절에서 독자들을 "나그네들"이라고 불렀고, 17절에서는 그들의 삶을 "나그네 삶"이라고 부릅니다. 모두가 로마 황제를 주인으로 섬기는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나그네입니다.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허망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지어졌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답게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미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I am a born-again Christian(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많이 길러냈지만, 이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거부하고 하나님나라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따라 살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소망하고 간구하도록 가르치기는 했지만, '다르게' 살기를 소망하고 간구하도록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하나님나라를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믿는 사람의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이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교회도 져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에 기독교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아팠는지요! 세월호를 소유한 회사가 소위 '구원파'라고 하는 이단 종파에서 운영하는 사업 중 하나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이단 종파의 교주와 그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부도덕하게 사업을 운영했고, 무지몽매한 교인들을 착취하여 만든 자금으로 얼마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는지가 드러났습니다. 그 내용을 접하면서 저는 수치심과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야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 저들은 이단이다"라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두 저렇게 무지몽매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모두 저렇게 파렴치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맨 처음에 나왔을 때, 저는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그 '세월'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세상을 초월하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어이가 없습니다. 생각은 잘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업을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정의롭고 정직하게 사업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교주와 일당이 사업을 운영한 내막을 보고 그들의 사생활의 일부를 보니, 보통 사람들의 탐욕과 부정과 착취의 정도를 훨씬 초월했습니다. 세상을 초월하기는 했는데, 세상과 달리 사는 방식으로 초월한 것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악하게 사는 방식으로 초월한 것입니다.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아니, 강렬한 분노를 느낍니다.

교회를 배에 비유한다면, 가장 적당한 이름이 '세월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보고 듣는 것이 세상에서는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정의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를 힘쓰지만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서로 낮아지기를 힘써야 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뉴욕에서 장로교 목회자들을 만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교파의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세상과 달리 살아 세상을 초월한 교회 이야기는 드물고, 악함과 몰상식과 비열함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두 종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과 달리 살아 세상을 초월하지 않으면, 세상보다 더 악한 방식으로 세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으로 세상을 초월하게 되기를! 그런 교회가 이 세상에 더 많아지기를!

교회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거듭나고, 거듭남의 확신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그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살아' 세상을 초월하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믿음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 세상을 초월하려는 사람들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한국 교회의 실책이고, 그것이 세월호 사건의 또 다른 간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세월호 사건은 미국으로 따지면 9·11 사건만큼이나 우리 민족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9·11 사건이 미국인의 삶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은 것처럼, 세월호 사건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9·11 사건 이후에 미국인의 정신과 도덕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공공건물의 보안 검색이 강화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세금이 허비되고 있으며, 삶은 더욱 복잡하고 불편해졌습니다. 정신과 도덕성에 있어서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 모든 손실과 불편을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세월호 사건을 통해 국민 전체의 정신과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대하게 됩니다. 다른 것도 해야 하지만, 국민 정신이 새로와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미국의 예에서 보았듯이, 그것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온 국민이 그런 의식을 가지고 한마음으로 노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 대통령이 할 일이 있고, 공직자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요구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각성해야 합니다. 만일 '거듭난 나그네'들이 우리 사회에 더 많았다면 어떠했을까, 질문해 봅니다.

세월호 선원 중에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구조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 중에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구조와 지원을 지휘하고 수행하던 공무원들 중에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정치인들 가운데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언론인들 가운데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국가의 지도자 중에 '거듭난 나그네'들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이 사건은 역사의 기록에도 남지 않을 가벼운 사고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직도 기독교인의 분포가 (천주교까지 합하면) 30% 정도가 되니, 믿는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나그네'였을까요? 없지야 않았겠지요. 하지만 상황을 돌이킬 정도로 많지는 않았음에 분명합니다.

얼마 전, 김세윤 교수께서 "한국교회의 신앙은 구원파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일갈하신 적이 있습니다. 맞는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듭남에 대해서만 강조하면 구원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원파의 핵심 교리는 한 번 구원 받으면 무슨 죄를 짓든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하고 의롭게 사는 일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강하지만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소명감은 희박합니다. 그런데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 성도들도 그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확신과 자랑은 강한데, 나그네의 삶은 부족합니다. 거듭났다는 믿음만 가지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안위만을 찾아 행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거듭난 나그네'가 되어야만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바쳐 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새로 지어지셨습니까? 이 질문에 의심 없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왜 그걸 물어 보나요?"라고 대답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지만 아울러 물어야 할 또 다른 질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그네로 살고 계십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1장 1절에서 "포로"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러분은 거듭났기에 세상 사람들과 달리 살고 있습니까? 세상과 달리 살아 세상을 초월했습니까?

여러분이 거듭난 나그네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나그네로 사업을 한다면,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나그네로 정치를 한다면,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나그네로 직장 생활을 한다면, 사사로운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손해도 당하고 배척을 받기도 하며 무시당하기도 합니다. 환영받고 칭찬받을 때도 없지 않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이 닥쳐 오면 거듭난 나그네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행동할 때, 거듭난 나그네는 더 큰 것을 위해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나그네는 이 땅에서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고 때로는 가장 고귀한 목숨까지 바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를 믿기에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듭난 나그네에게는 이 땅에서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벧전 1:6-7)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사건을 계기로 '거듭난 나그네'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거듭난 나그네로서의 우리의 신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참되게 변화하려면 거듭난 나그네로 사는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들어오게 하고 그 안에서 자라게 하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도록 참되게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대각성의 불길이 번져 나가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온 국민을, 온 세상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그 일을 저에게서 그리고 우리에게서 시작하게 되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철저한 나그네로 사셨던 주님,
저희로 참되게 주님 영접하게 하시고
주님과 매일 동행하게 하셔서
거듭난 나그네로 살게 하소서.
평안할 때는 무시당하지만
위기의 때에 진가를 드러내는
거듭난 나그네로 살게 하소서.
주님의 교회를 축복하셔서
거듭난 나그네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며
이 세상을 축복하셔서
거듭난 나그네들이 충만해지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목회멘토링사역원 원장,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사귐의 기도> 등 저자

*이 글은 김영봉 목사의 와싱톤한인교회 5월 4일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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