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 / 김성수, 김희헌, 박일준 외 지음 / 너의오월 펴냄 / 400면 / 1만 5500원

한국교회,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려다오!

'세월호 참사'를 맞이하는 한국교회의 분위기가 마뜩찮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담론, 혹은 종말에 대한 담론으로, 거기서 '회개'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한국교회 언설의 질적 수준도 암담하지만, 침묵의 때와 말해야 할 때를 구분조차 못하는 것 같다. 왜 이럴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다양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기독교 고유의 '이야기'가 부실한 까닭은 아닐까? 우리가 고작 들어온 기독교의 이야기들은 전도, 부흥, 종말, 재림, 회개, 천국, 지옥과 같은 패턴 아래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들뿐이니, '세월호 참사'와 같은 끔찍한 비극적 사건 아래에서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어쩌면 미리 예견되었던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 우리는 이전에 들어오던 이야기들의 무한 반복이 아니라 원래부터 성서와 기독교 전통 속에 담겨 오던 좋은 이야기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들어야 할 필요도, 권리도 있다. 특히나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일반적 이야기가 현실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을 때는 더욱 요원케 된다.

"어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지금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라는 찬송 가사처럼 어머님과 같은 탁월한 이야기꾼의 언변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듣지 못했던,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요원한 기독교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바로 여기에 13색의 듣지 못한 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은 이야기꾼이 있다. 바로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이라는 책이다.

본 책에서는 전문적인 연구자 10인이 서로 돌아가면서 일반적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들을 수 없었던, 하지만 오늘날의 비극적인 참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올바로 짚어 줄 좋은 선배들 13인의 이야기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럼 우리 모두 지체 말고 속속히 나가서 그 이야기들을 한번 들어나 보자.

구국을 위해 복음을 붙잡다, 최병헌

첫 번째로 주어진 이야기는 구국의 가치로써의 복음을 붙잡은 선배의 이야기다. 그는 구한말, 입신양명을 꿈꾸던 흔한 한학도였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좌절되던 현실 속에서 우연히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고, 단순한 영혼 구원이 아닌 구국의 복음으로써 예수를 붙잡는다. 그런 그의 신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입신양명이 아닌 계몽과 교육의 길을 걷게 만든다. 또한 그는 다양한 타 종교들을 구국의 가치 아래 붙잡은 복음의 빛 아래에서 연구하게 된다. 이는 응당 당연한 일이다. 그가 타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를 붙잡은 이유가 '구국'을 위해서이기에, 더 이상 타 종교는 정복,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비교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 여기 자신의 천국행이 아닌, 나라의 구원을 위해 붙잡은 한 선배의 이야기가 있다. 한번 귀 기울여 들어 보라.

진리를 향해 걸었던 변두리 순례자, 함석헌

변두리에서 태어나 변두리에서 자라났던, 그래서 변두리 식 사고가 익숙했던 함석헌의 이야기가 두 번째로 수록되어 있다. 변두리라는 고유한 자리에서 중심부의 이데올로기, 이를테면 위계적 유교 문화, 폭력적 제국주의, 유물론, 편파적 기독교를 날카롭게 거부하고 평화와 사랑, 그리고 생명이라는 예수의 변두리 인생을 따라 걸었던 함석헌의 이야기는 유독 빛난다. 우리네 한국교회의 현실이 너무도 중심부에 속해 있어서일까? 그는 그의 온몸을 부딪쳐 마치 예수와 같이, 또 바울과 같이, 현실 속에 사람들을 구분 짓는 모든 장벽을 허물어 낸다. 그것이 어떤 이념, 종교, 정치 지향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런 고결한 변두리 인생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본 적이 있던가.

참생명을 맛본 사람의 이야기, 이용도

참혹한 현실 속에, 온갖 민족의 수난이 극에 달하여 눈물이 마르지 않던 시절, 민족의 수난을 함께 끌어안고 운 뜨거운 전도자의 이야기가 여기 있으니, 바로 세 번째로 수록된 이용도의 이야기다. 그 또한 민족적 해방을 꿈꾸던 민족주의자였으나 예수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체험한 후 삶을 전회하여 진정한 생명을 외치던 뜨거운 전도자의 삶을 살아 낸다. 백성들과 함께 울며, 그들에게 연민을 베풀며, 또 함께 통탄하며, 그들을 눈물로써 살리며 살아 낸 것이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그 어떤 지위와 명성을 초월한 '생명'의 능력을 발견한다. 그 '생명'으로 고결하게 죽어 간 이용도 선생의 이야기, 어쩌면 '영성'과 '성령'이란 단어는 남용되지만, 진정한 영성이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아닐는지.

변두리로 향해 내려갔던 사람, 김교신

우리가 네 번째로 듣는 김교신의 이야기 또한 광야에서, 낮은 곳에서, 변두리에서 신학을 펼쳐 낸 이야기이다. 우치무라 간조에게 큰 영감을 얻은 김교신은 평생을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로 매번 내려간다. 그는 교회든 학교든, 혹은 계층이든 모든 배타적 중심성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교회 바깥에서 '성서 조선'을 통해 신학을 전개해 나가고, 학교에서의 배제와 제재에 대하여 신물을 느낀 그는 우연히 일하게 된 질소비료 공장에서의 노동자의 삶을 통해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또한 가르침의 기쁨을 맛본다. 이처럼 그의 삶은 중심부를 비판하며 변두리로 옮겨 가는 인생길이었으며, 그 이면에는 하향적 아가페라는 예수에 대한 고유한 이해가 흠뻑 적셔져 있다. 괜스레 김교신의 이야기는 흔한 한국교회의 이야기들과 너무도 낯설어 우리가 소화하기에 버겁기만 한 것을 아닐는지 걱정이 앞서게 되는 이야기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예언자, 김재준

이어서 우리가 만날 인물은 한국근현대사의 예언자라고도 할 수 있는 김재준의 이야기다. 예언서를 치열하게 연구했던 구약학자 김재준. 그가 연구한 성서의 이야기는, 역사 속에서 약동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또한 개인뿐만 아니라 역사를 넘어 우주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총체적 구원 이야기였다. 이러한 구약적 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역사 속으로 뛰어든다. 역사를 잃어버린 교회를 비판하는 한편, 군사정권의 독재에 맞서서 굳건히 싸워 낸다. 그것이 예언자들의 야웨 신앙이기에! 이런 신앙 한편에는 또한 제3일에 대한, 부활 신앙과 종말론적 승리에 대한 환상이 묻어난다. 역사 속에서 약동하는 사탄의 권세와 맞서 싸운 한 구약학자, 아니 예언자의 이야기를 우리가 비로소 듣게 되니 마음이 뜨겁지 아니한가.

한국적 신학을 시도하다, 윤성범

우리는 계속적으로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 이면에 숨어 있는 사탄과 맞서 싸워 낸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어서 만나는 이야기는 서구 신학 속에 숨어 있는 서구 문화에 대한 숭배 사상과 맞서 싸우며 한국적 신학을 구현하려 했던 윤성범의 이야기다. 그는 한민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갖고 있었던 고유의 '감', 또한 복음을 세련되게 받아 내는 '솜씨', 그리고 그 '감'과 '솜씨' 속에서 성령의 생명이 약동하는 역사인 '멋'이라는 개념으로 복음의 진수를 한국적 개념을 통해 맛깔나게 표현해 냈다. 이는 결국 한국 문화 고유의 단군신화와 유교를 개신교 신학에서 살려 낼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아니, 단순히 윤성범은 유교를 개신교에서 살려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개신교가 갖고 있는 서양적 문화의 편향성을 적실히 비판하며 한국적 기독교의 이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전 문화를 박탈하고 짓밟는 것이 아닌, 오히려 창조적으로 살려 내는 한 장인의 숭고한 정신을 발견케 된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소리 높여 외친, 강원용

역시나 일제의 침략, 그리고 암울한 한국근현대사를 터한 한 선배의 이야기를 만난다. 바로 강원용의 이야기다. 그는 깨끗한 청년 그리스도인의 표본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순전한 마음으로 청년부활동을, 그리고 크리스천대학생으로써의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을 법한. 하지만 그가 유학시절 글을 통해 만난 라인홀드 니버의 사상은 그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는 감리교 장로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하지만 사탄적인 억압과 지배체제를 견고히 하는 기독교정권에 맞서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무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삶을 살아 낸다. 단순한 사회참여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타종교와의 대화의 장을 열고,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한 노력도 하며, 또 민주화운동을 위한 대화의 기틀을 마련하는데도 큰 공헌을 한다. 이러한 그의 삶은 사탄적 체제와 치열하게 대결했던, 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성육신 정신으로 맞서 싸운 한 고결한 이야기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 얼마나 죽음의 문화가 약동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구약성서 속에서 민중과 통일을 외치다, 문익환

구약학자이면서 예언자로 살아갔던, 김재준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익환의 이야기를 이어서 만난다. 그의 치열한 고민 중의 하나는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런 고민은 그를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자로, 또 이는 그를 시인으로 살게끔 만든다. 번역자로서, 시인으로서의 삶은 그를 민족의 역사 현실과 마주 세운다. 바로 한민족의 당면한 과제인 통일의 문제로. 그가 구약을 연구하면서, 또 번역하면서 만났던 하나님은 역사 속에 약동하시는 분이였으며, 민중의 현실 속에 임재하시는 분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민중의 고통의 무게를 더욱 누르고 있던, 민족적 과제인 통일에 자신의 삶을 쏟아붓는다. 이 고결한 이야기는 때로는 잊고 싶기도 하다. 너무도 고결하여 우리네 안전까지도 위협할까 봐 말이다.

민중 속에 실재하는 신을 외치다, 서남동

우리가 이어서 만나는 이야기는 서남동의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민중이라는 단어에, 세상의 고난당하는 현실에 매료되었던 사람 서남동,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예수와 같이 소외당한 동포들과 함께 정치적 압박에 저항하는 것이요, 역사적 개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사회참여가 아닌, 메시아를 선언하는 것이라고까지 끌고 간다. 그에게 있어서 서구 신학은 이러한 고통의 현실 가운데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교조적 신학으로 비춰졌다. 그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사유를 민중이 고통당하는 현실을 세상에 증언하는 도구로써 신학함을 추구한다. 이는 서구 신학의 방법론과는 대비되었기에 반신학, 탈신학이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민중은 구원의 객체가 아닌, 구원의 주체로 불린다. 세상의 죄에 의해서 고난당하는 객체를 넘어서, 세상의 죄를 끌어안고 역사적 변혁을 향해 나아가는 주체로써 비춰진 것이다. 우리는 이 서남동의 이야기 속에서 고난당하는 현실과 마주하여, 고난당하던 민중들을 신학의 주체로 삼은 과감한 이야기를 마주한다. 역사 속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고작 숫자로만 되새기는 무심한 우리와는 전혀 대비되게끔 말이다.

고난당하는 현실을 해학으로 극복하려 했던, 현영학

이어서 우리가 만나는 이야기는 두 창녀의 싸움 속에서 한국 역사 속에서 고난당하는 민중을 발견한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현영학, 그는 철거당할지도 모르는 판잣집에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두 창녀의 싸움을 목격한다. 한 창녀의 단골손님이 다른 창녀와 관계를 가진 것을 목격하고, 둘이 시비가 붙은 것이다. 온갖 욕설과 머리채를 쥐어뜯는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 현영학은 거기서 한국 역사의 죄를 짊어진, 고난의 종 민중을 발견한다. 이로부터 현영학은 민중을 사회 하층민으로써 사회적 부조리를 한껏 느끼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어서 한국의 전통 탈춤이 해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의 고유 신학을 전개한다. 사회적 아픔을 감싸 안는 제사장, 사회적 아픔을 비판하는 예언자를 넘어서, 사회적 현실을 비웃고 당당히 승리하는 예수의 이야기야말로 탈춤의 요소와 닮았다며 그의 고유한 민중신학을 전개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웃기는 친구이자, 광대로서의 구원자 예수를 만난다. 그는 현실의 비극을 체현한 자이며, 그럼에도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남을 웃기며, 궁극적으로는 전체적 구원을 일구는 주체로서의 민중이다.

성서를 통한 서구 신학으로부터의 독립, 안병무

루터의 외침 '오직 성서!'를 우리는 오늘 여기서 듣는다. 바로 안병무의 이야기다. 루터가 '오직 성서!'를 외치며 가톨릭 신학으로부터 독립했다면, 안병무는 '오직 성서!'를 외치며 고난의 현실인 한국적 상황 속에서 답이 될 수 없는 서구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한다. 주객의 도식을 뒤엎고 사건이라는 개념 안에서 신과 인간이 만난다고 역설하며, 모든 서구적 사유의 바탕을 둔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민중은 개념화될 수 없으며, 단지 존재하는 현실이다. 또한 예수는 민중 밖에 있는 초월적 구원자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연대하고 있는 '우리'라는 개념 속에 있는 구원자이다. 그렇기에 안병무는 신학을 단순한 사변적 신에 대한 해설을 넘어서, 고난당하는 현장에 대한 증언으로써 활용한다. 이른바 증언의 신학이다. 그렇다. 안병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신학의 변절을 목격하고, 또 변절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학을 제 자리로 돌이키기 위해 노력한 한 인물의 열정을 발견한다.

어울림의 신학을 추구한 이, 유동식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이야기는 문화적 편협성과 대결했던 이, 유동식의 이야기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역사와 문화는 각기 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구의 신학은 상대적인 우리네 역사와 문화에 대해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유동식은 한국 고유의 문화와 역사 기층에 있는 '무교'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다. 그는 한민족 고유의 종교성이 이 '무교'에 기초해 있다고 보고, 바로 여기서부터 풍류신학을 착안한다. 고대의 제천 행사로부터 모티프를 따온 유동식은 바로 거기에서 서구 신학이 좌시하고 있었던 '멋'의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한국적 신학을 창조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이와 같은 유동식의 작업에서 우리는 서로의 문화가 충돌하거나, 혹은 서로 정복하지 않고, 서로의 가치를 살리며 어울리는 비빔밥과 같은 장면을 발견한다. 특별히 그의 이야기는 또 다른 문화적 제국주의, 신학적 제국주의의 경향을 띄는 우리 한국교회에 또 하나의 소중한 이야기가 아닐까?

아직도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

<한국 신학의 선구자들>은 좋은 13개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편향되었다는 비판점이 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우리가 이전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한국기독교 역사 속에 잊힌 이야기라는 점에서, 편향적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는 책이다. 더군다나 본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정치 교수', '빨갱이', '자유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한국의 정치, 사회, 종교 분야의 사탄적 체제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타고난 싸움꾼들이다. 사실 온갖 정치사회적으로 말도 안 되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 이런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본 책은 13명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신학자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에 호흡이 짧아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더군다나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글을 엮은 작품이기에 믿고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 책에 수록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에서 던져진 질문들과, 책 속에 숨어 있는 신학자들의 일갈은 우리의 내면을 일깨운다. 마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던졌던 예수의 말씀처럼.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마음-뜨거움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의 부활 증언의 삶을 살아 냈듯이, 어쩌면 본 책으로 얻은 마음-뜨거움은 심리적 변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 13인의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도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짧은 단편이 주었던 감동은 결국 몇몇 학자들의 저서를 읽고 싶은 고결한 욕망을 부채질한다. 그렇다, 본 책은 참으로 위험한 도서이다. 우리네 인생을, 또 우리네 독서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향방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그런 책 말이다.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으로서의 학업과, 지방 작은 교회에서의 사역을 병행하며 올바른 '신학함'을 향해 달려가는 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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