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핀잔을 자주 듣는 편이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내 반응은 늘 신경질적이다. 아내에 따르면 나는 절대 따뜻한 남편, 좋은 아빠가 아니다. 그렇다고 성실한 목회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설교 뒤 아내에게 그것도 설교냐며 혼나기가 부지기수요, 아무리 철저하게 설교를 준비하고 열정적으로 전하려 해도 시큰둥한 반응인 성도들을 보면 목회자로서도 함량 미달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반전의 기회를 엿보려고 해도 천성이 형편없는 위인이라 별 묘책이 없어 보인다. 오늘도 시험을 앞두고 시립도서관에 가는 아내를 태워 주고 오면서 말없이 그냥 돌아왔다. '시험 잘 보는 것도 좋지만 건강 생각하면서 공부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갑게 돌아선 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철야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다. 사순절 기간 중이라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책 읽다가 졸리면 예배당에서 자는 일이 잦은데,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요즘 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자정이 가까워 올 무렵 잠을 청했다. 잠이 들락 말락 할 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내였다. 메일로 온 문서를 출력해야 하니 사택 서재로 오라는 것이다.

예배당과 사택이 별채라고 해도 거의 붙어 있기 때문에 엎드려 코 닿을 거리도 안 되지만 몸이 천근만근이라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떡하랴 아내의 명령인 것을…투덜대며 출력을 해 주고 와서 자려고 하니 맹숭맹숭 잠이 오지 않았다. 요즘 갑자기 귀가 멍멍하고 머리가 띵 하고 어지럽기까지 해 병원을 한 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아내를 도서관에 내려 준 뒤, 구미 순천향대 병원으로 차를 달렸다. 4월 첫날이면서 월요일이어선지 병원이 몹시 번잡했다. 오전 10시가 채 안 된 시각인데도 주차하기 위해 조금 기다려야 했으니까. 주차 안내원이 마침 자리가 하나 나왔으니 서두르라는 말에 귀퉁이 빈 공간에 겨우 차를 댈 수 있었다.

귀와 코에 기계를 삽입해 사진을 찍고, 청력 검사까지 했다. 중이염으로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며 약을 처방받아 나왔다. 갈 때는 국도를 탔는데 돌아오는 길은 고속도로를 택했다. 나른한 봄 날씨를 고속 질주하며 이른바 '질풍노도'와 같은 역설적 기분에 젖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운전을 하는 중에 갑자기 커피 생각이 났다. 은은한 향기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메리카노. 휴게소에 들려 인생을 관조하며 커피 향에 젖어 보려고 할 즈음, 카톡 들어오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아내였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 아내도 화창한 봄날 마음이 싱숭생숭하기는 나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몇 꼭지로 나뉘어 온 카톡 문자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아내가 나에게 보낸 어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들어온 순서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당신 서재에 버려진 A4 용지를 이면지로 쓰려고 도서관에 들고 왔는데… <지선아 사랑해>책에 대한 글이 씌어 있어서… 그냥 버리기 아까워 가져와 읽었더니 울 신랑 정말 글 잘 쓰네!"
"공부는 않고 버벅대는 문자지만 꼭 보내고 싶어서… 몇 자 보내는데…"
"이명재 선생님! 사-랑-해-요♥"
"얼마 만에 고백해 보는 '사랑해!' 인가"
"당신 글이 이렇게 감동적인지, 왜 그동안 몰랐지?"
"쓰레기통에 버려진 글이 진주였다니… 계속 좋은 글 많이 써요. 까짓 거 책 내 줄게…."
"병원에선 뭐래요?"

나 나름대로 착상이 떠오르면 글을 써 왔다. 내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주위 지인들로부터 좋은 글 잘 읽었다는 말은 종종 듣고 있다. 하지만 아내는 내 글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글 잘 쓰는 사람들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글 잘 쓰는 사람 좋아했다면 황석영을 만나 결혼했을 거라며 자존심 상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글 쓸 시간 있으면 성경 한 장이라도 더 보고 전도 한 명 더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말까지 하는 아내다.

그런 아내가 이런 칭찬의 카톡을 보내다니.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가식이 아닌 것 같았다. 반어법을 구사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내와 아들 딸 등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가족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바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만큼만 가족들에게 하라,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절반만큼이라도 가족들에게 하면 좋겠다, 오늘 설교는 딱 당신을 두고 하는 설교 같더라 등의 말을 가족을 대표한다(?)는 아내에게 수도 없이 들어왔다.

말과 행동이 어긋난다는 지적일 것이었다. 이런 시각을 갖고 내 글을 읽는다면 감동은 강 건너 이야기가 될 것은 뻔하다. 아내가 내 글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러니까 언서행(言書行)의 불일치에 기인한다. 그런데 오늘 내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니! 거기 그치지 않고 카톡으로 극찬의 문자까지 보내다니! 내가 울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막내 윤경이로부터 책 한 권(이지선의 <지선아 사랑해>)을 소개받고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 감동을 혼자 누리는 게 아까워 글로 정리해서 <뉴스앤조이> BOOK(서평) 난에 기고했다. 송고하기 전 교정을 보기 위해 출력해서 용무를 마치고 버린 것을 시험 공부하면서 재활용하겠다고 아내는 도서관까지 가지고 갔고, 공부 도중 우연히 그 글을 읽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갑자기 감성이 요동쳐서 위와 같은 말들을 쏟아 내지 않았나 싶다. "글 잘 쓰네"란 말은 처음 듣는 것 같고, '이명재 선생님'은 짧은 연애 기간 중 몇 번 들어 본 말이다. 내 글에 감동받았다는 것도 처음이고, 글 많이 쓰라는 말은 귀를 의심하게 하기에 족하다. 거기에 내 글을 모아 출판까지 해 주겠다니.

가까운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함께 사는 가족은 더 하다.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을 그래서 이해와 양보의 기초 단위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알아서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까 이해하는 관계가 가족이 아닐까? 아내는 위와 같은 내용의 카톡을 보낸 뒤에도 사랑의 마음을 담은 카톡을 더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조용히 비축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아내의 감성을 지긋이 누그려 뜨려 더 단단한 열매를 맺게 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