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 <칼 바르트> / 에버하르트 부쉬 지음 / 손성현 옮김 / 복있는사람 펴냄 / 936면 / 4만 2000원

여기는 신학교. 여기서 저기서 전설의 이름이 들려온다.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의 이름이다. 누군가는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에 가면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며 꼭 올라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는 너무도 위험한 봉우리기에 올라가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어봤다. '칼 바르트에 올라가 보셨어요?' 나의 던져진 질문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모두가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봉우리에 직접 등정하고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칼 바르트'라는 높은 산봉우리의 권위만 빌려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뿐이다. 신학도들이 등정하길 앙망하는, 하지만 등정하기에는 너무도 높은 봉우리 '칼 바르트'. 누군가가 '칼 바르트'로 등정하는 가이드북을 출판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에버하르트 부쉬의 <칼 바르트>는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를 차근차근 올라가며 감상할 수 있게 만드는 좋은 가이드북이다. 신학의 대가일수록 대가의 명언들은 대가의 삶 안에서 해석해야만 한다. 그만큼 그의 삶은 숭고했고, 그의 삶에 대한 전 이해가 없이는 그가 남긴 언설들이 바르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일 테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도들 사이에서 유명한 높은 봉우리, 하지만 그 어떤 누구도 가이드북이 없기에 그저 그런 높은 봉우리에 대한 소문만으로, 신학도들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높은 봉우리'. 하지만 이제 에버하르트 부쉬의 <칼 바르트>를 통해 그 높은 봉우리를 실질적으로 등정하며,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칼 바르트'가 남긴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삶과 온갖 인간관계들, 그리고 시대적으로 주어진 고민들. 이런 높은 봉우리를 풍성히 그려내고 있는 <칼 바르트>를 통해 한번 그 '높은 봉우리'를 실제로 등정해 보자. 높은 봉우리를 올라가며 봉우리가 담지하고 있는 온갖 새로운 세계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질 테다. 관광 가이드 에버하르트 부쉬의 친절한 설명을 잘 참고한다면 말이다!

1장. 카를리 : 유년기와 청소년기

사실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는 처음에는 보잘것없었다. 유년기의 '바르트'를 기록하고 있는 1장은 바르트의 인간적인 면을 세세히, 꾸밈없이 기록한다. 제도권 수업을 싫어했던 바르트, 여름방학을 맞이해 방학이 주는 해방적 기쁨을 시로 노래한 바르트, 싸움을 좋아했고, 교황을 따라해 보기도 했던 영락없는 장난꾸러기 바르트. 어쩌면 1장에서 에버하르트 부쉬가 그리고 있는 바르트는 말 그대로 '친숙한 바르트'이다. 하지만 그러한 친숙한 바르트에게 '평범한 호감'을 느끼고 올라가다 보면, 그 안에 은폐된 매력을 만난다. 어릴 때부터 역시나 글쓰기, 역사, 종교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장난꾸러기 바르트를!

2장. 신학생 : 대학생 시절과 수련 목회자 시절

신학도로서의 바르트는 말 그대로 부모님께 대한 반항아라고 요약할 수 있다. 2장에서는 실증주의적 신학을 공부하기를 소망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처참히 꺾고 자유주의 신학도로 성숙되어 가는 바르트를 만난다. 이는 마치 험한 봉우리를 올라가다가 낮은 지대에서 만나는 흔한 포장도로와 같다. 포장도로만 볼 때에는 이것이 왜 '높은 봉우리'라고 추앙받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어쨌든 2장이 그려 내고 있는 바르트는 칸트와 슐라이어마허 위에서 신학 토대를 세우는, 라가츠나 헤르만, 궁켈, 하르낙에게 큰 감명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도 바르트이다. 물론 그러한 포장도로 끄트머리에서는 장관이 얼핏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3장. 목사 동지 : 자펜빌 교회 시절

포장도로 끄트머리에서 발견되는 장관이라 함은 바로 '목회자 바르트'이다. 3장에서 그려 내는 바르트는 단순히 신학도 바르트가 아닌, 목회자로서의 바르트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도이지만 성실히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였고, 성도들의 필요에 자신의 삶을 던질 줄 알고, 고민하는 목회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성도들을 위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빨갱이 목사'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에 대한 관심은 그를 사상적 전회로 이끌어 낸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물려 나타난 93인 독일 지성인들의 성명서 발표를 보고 격분한 바르트는 그제서야 자신의 신학의 토대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그가 단순한 사변적 신학도가 아닌, 인간과 삶을 고민하던 목회자였기 때문일 테다. 그러한 삶과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희대의 역작 '로마서 강해'로 영글어진다. 드디어 '하나님 중심 신학'으로의 신학적 회심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 드디어 기나긴 포장도로 끝에서 높은 봉우리 '칼 바르트'가 담지하고 있는 놀라운 광경이 얼핏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4장.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 괴텡겐과 뮌스터의 신학 교수 시절

삶과 인간에 대한 치열한 고민으로 신학적 회심을 일궈냈던 바르트는 비로소 교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첫걸음의 떨림, 그리고 내포된 위대한 순간을 세세히 그려낸 것이 바로 4장이다.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1판, 2판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지만, 길의 향방만 제시했을 뿐, 길의 내용에 대해서는 담지하고 있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아침 7시 수업을 위해 새벽 3시~5시까지도 수업을 준비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는 '하나님 중심 신학'의 내용을 위해 칼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에는 경멸하던 정통교리도, 가톨릭의 스콜라주의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교수로서의 길은, 곧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가 보여 주는 광경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4장에서부터 드디어 높은 봉우리에서만 볼 수 있었던 비경들과 마주선다. 높은 봉우리 '칼 바르트'로의 등정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5장. 오늘의 신학적 실존 : 본대학교 시절

왜 사람들이 그토록 '바르트', '바르트'라고 할까? 그 위대한 광경이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5장이다. 바르트의 본대학교로의 이주는 곧 본대학교에서의 전성기 시작을 의미했다. 그와 함께 그는 다시 한 번 신학적 격변을 시도한다. 그가 집필했던 '기독교 교의학'에서, 진정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의 전회를 외치며 '교회교의학'의 집필을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그와 함께 불트만, 고가르텐과 같은 그의 옛 동료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쳐 간다. 왜 신학적 격변을 맞이했는가? 그 이면에 역사적으로 서려있는 악의 실체 탓이다. 즉 국가사회주의의 목소리가 커져 가며, 히틀러 정권의 장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바르트는 그러한 인간과 삶에 대한 고민으로 다시 한 번 신학적 격변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와 함께 그는 히틀러 체제와 맞서던 고백 교회와 대화해 나간다. 때로는 비판하며, 때로는 지지하며 말이다. 우리는 5장에서 드디어 '정치'와 '신학'이라는 전혀 다른 실체들이 바르트 안에서 장관을 이루는 장면을 목도한다. '오직 예수'라는 신앙적 고백이 '정치적 악의 현실'의 저항으로 연결되는 신비! 그렇다, 우리는 바르트를 등정 중이다.

6장. 스위스의 목소리 : 성 알반링, 바젤

높은 봉우리의 한 언덕 너머에서 바라보았던 정치와 신학이라는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 경치들의 조화, 그렇게 보인 장관은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치적 현실과 결부된 신앙적, 신학적 외침을 고수했던 바르트는 스위스 바젤대학교로 쫓겨나게 되고, 그 이후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을 6장은 그리고 있다. 그는 이전처럼 '율법-복음'이라는 기존 루터식 구도에 맞서 '복음-율법'이라는 새로운 구도를 주장하며, 새로운 신학 체계를 주장함과 동시에 악의 만연함을 가능케 했던, 실패한 독일 신학에 비판의 날을 겨눈다. 5장 끝부분에서 보았던 정치 현실과 신학 현실이 어울어진 광경은 6장에서 절경을 이룬다. 그의 신학은 곧 삶이었고, 그 삶은 정치사회적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 실체였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오직 예수였고, 그 예수의 계시는 그에게 윤리적 실천을 명했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교회교의학 I/2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에게 있어서 윤리적 실천이라 함은 살아 있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삶은 시시각각 변한다. 나치주의에 대한 패배 의식과 싸웠고, 나치주의가 패배하기 시작하자 독일인을 향한 경멸의 시각과도 싸웠다. 그랬다, 그는 어떤 특정한 단체, 조직, 사람과 싸웠던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실천할 따름이었다. 이 또한 우리가 만나는, 높은 봉우리에서만 목도할 수 있는 비경이 아니던가!

7장. 동과 서 사이에서 : 필거슈트라세 25번지, 바젤

우리가 목도했던 그 위대하고도 숭고한 장관은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를 오르면서 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펼쳐진다. 그 모습들은 역시나 위대하고도 숭고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매번 새롭다. 7장은 동과 서의 분열 사이에서 분투하는 바르트의 모습을 그려 낸다.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주어진 과제는 '재건'이었다. 그는 교회교의학을 통해 정신적으로 재건을 도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실질적으로 독일 본대학교 교수로써 독일의 재건을 돕는다. 학생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구호 물품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반성 의식이 결여된 독일 교회를 비판했고, 독일민족을 함부로 다루고 있던 연합국 군사정부를 비판했다. 그와 함께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독일에서 일어난 처참한 광경 이면에 있던 인간학적 신학의 토대와도 끝없이 대결한다. 7장에서의 바르트는 끝없이 투쟁한다. 공산주의와도, 자유민주주의와도, 교회와도, 사회와도 투쟁한다. 그는 끝없이 제3의 길을 모색한다. 그와 함께 실천적 지향점을 함께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그의 사유를 더욱 첨예화했다. 바로 그런 그의 삶 속에서 '화해론'이 싹텄던 것이다. 그렇다, 바르트라는 봉우리는 여전히 올곧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것이리라.

8장. 사랑의 하나님의 행복한 게릴라 대원 : 브루더홀츠알레 26번지, 바젤

바르트는 위대한가? 위대하다. 봉우리가 담지하고 있는 비경만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봉우리 자체가 위대하다. 8장에서 그려 내고 있는 바르트는 노교수가 된 바르트이다. 그는 왜 그토록 아름답고도 숭고한 삶을 살았는가? 8장에서 그의 대답은 허무하리만큼 간명하다. '자신도 몰랐다.' 그저 충실히 인간과 삶을 고민하며, 사유하며, 또 투쟁하며 살아왔더니 어느새 수많은 책들이 집필되어 있었고, 숭고한 장관들이 그려졌던 것이다. 이제 악과의 투쟁이 잠잠해졌기 때문일까? 그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인간성'이라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사람과 하나님과의 접근 가능성이 확보된 모습이 엿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과의 투쟁을 중단한 것은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핵무장에 반대했고, 동구권과 서구권의 화해를 위해 전력했다. 그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예수는 마르크스의자, 자본주의자, 제국주의자, 파시스트들, 모두를 위해 죽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노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삶을 영유했다. 삶과, 역사와 투쟁하며, 또 첨예하게 신학화했던 것이다. 그렇다, 이 높은 봉우리는 높이 올라갈수록 그 봉우리의 고결함이 꺾이지 않는다!

9장. 아직 우리에게 허락하신 마지막 발걸음 : 은퇴 이후의 나날

마지막 9장은 정상마저도 아름다운 높은 봉우리 바르트를 그려 낸다. 말년의 그는 미국으로 떠나 그의 메시지를 설파했다. 또 언제나 좋아하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감상하며 하나님을 목도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무신론을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죽음을 향하고 있음에도 핵무기와, 전쟁과, 반유대주의와, 동유럽과 서유럽의 화해를 위해 싸우고 또 싸워 갔다. 아니 그렇게 싸워야만 자신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진정한 실천적 신앙이다! 그도 늙었기에, 교회교의학 집필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교의학을 사상의 집대성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상의 완결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새로운 공동의 발언을 위한 토대요,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그는 마무리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아니 오히려 힘껏 하나님을 경배하며 세상의 악과 투쟁하며 기록한 저술이었기에, 그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도였다. 또 만연하던 악의 세력에 힘껏 투쟁하며 패배를 벗어나려 했던 젊은 목회자였다. 하지만 말년이 오면 올수록 하나님의 신실성을 고백하고,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담긴 승리의 확실성을 찬송했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치열한 삶, 그리고 치열한 사유를 이어 나갔다. 마치 그가 영원히 살 것처럼 말이다. 그는 진정 영생을 살아 냈다. 그렇다,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는, 어쩌면 끝이 없을 것처럼 그 광경을 자랑하더니, 어느새 끝이 났다. 마치 우리게 과제를 남기듯이 말이다.

마무리하는 글 : 아직도 남아 있는, 영원할 것 같았던 칼 바르트의 잔상

에버하르트 부쉬라는 훌륭한 가이드와 함께했던 '칼 바르트' 등정. 사실 봉우리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봉우리가 담지하고 있는 놀라운 비경은 깊고, 또 숭고했다. 그 봉우리에서는 '마침'의 흔적이 희미했다. 마치 저 본향에서도 투쟁할 것 같고, 또 미처 미완성했었던 교회교의학을 마무리할 것처럼 말이다.

'마침'의 흔적이 희미하기에, 더욱 잔상이 깊은 바르트. 그는 마치 오늘날 우리네 현실을 향해 여전히 다음과 같이 외치는 듯하다. 신학도라며 성경을 연구하고, 고민하며, 씨름하는 우리들에게. 아니 어쩌면 오늘날의 정치사회 현실과 교회 현실의 불의함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모든 일상-신학도들에게.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기꺼이 아주 많이 이른바 성숙하게 된 '세상'과 마주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보다 더 훨씬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과 마주하여 성숙하게 되어야 하는 '인간'이다. 한마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과, 성숙한 그리스도교다.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 하나님을 향한 살아 있는 희망 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 이 세상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자유롭게 고백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인간이다."(830~831쪽)

바르트는 여전히 한국교회 내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그만큼 많이 오용되고, 남용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교리가 성경적인지 아닌지 측정하려는 시도를 접어 두고, 에버하르트 부쉬라는 좋은 관광 가이드와 함께 '칼 바르트'라는 높은 봉우리를 함께 등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 흑암이 깊고, 혼돈이 가득한 시대 현실 속에서 '오직 예수'만을 외치며 당차게 살아갔던 '칼 바르트'. 그가 사변적 신학자가 아니라, 실천적 신앙인이었던 것처럼, 오늘 바르트를 향한 논쟁도 사변적 논쟁이 아니라, 실천적 논쟁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홍동우 / 부산장신대학교 신학과 학부생. 학생으로서의 학업과, 지방 작은 교회에서의 사역을 병행하며 올바른 '신학함'을 향해 달려가는 한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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