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호 씨는 저녁 늦은 시간인데도 가스를 배달하고 있었다. "가스가 떨어져 저녁 밥 못 먹고 있으니까 가스 가져오셔"라는 할머니 말씀에 냉큼 달려가는 게 일상사다. (사진 제공 송상호)

10년 전, 문호 씨(57세)는 귀향을 했다. 그의 고향 마을 안성 금광면 상중리에서 10년째 가스 배달을 하고 있다. 고향 마을에서 가스 배달하다 보니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에피소드가 그의 주머니에 하나 가득이라고 했다. 이제 끄집어내어 볼까. (아래의 내용은 김문호 사장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루 일과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아침 5시면 일어난다. 그 전날 늦게 자더라도 기상 시간은 비슷하다. 왜? 문호 씨가 키우는 닭이 잠을 깨우니까. 닭이 시간 되면 우는 바람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난 그는 닭 모이도 주고, 개밥도 주고, 채소밭을 돌아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때가 그는 어떤 때보다 즐겁다.

이런 즐거움을 만끽하던 그에게 호출 전화가 온다. 출동이다. 전화의 내용은 이렇다. "아침에 가스가 떨어져 밥 못 먹고 있응게 빨리 오더라고." 혼자 사는 노인네가 아침밥을 못 먹고 있다니 어떡하랴. 정작 그는 아침밥을 먹지 못한 채로 출동한다.

그렇게 그 독거 어르신 집에 도착해 보면 가스가 떨어진 게 아니라 가스레인지가 고장 나 있다. 가스레인지를 고쳐 준다. 가스불이 들어온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다. "고맙네. 이 사람아." 그 말을 뒤로 한 채 그 집을 나선다.

마을 어귀에서 할머니 한 분이 힘들게 자루를 들고 방앗간에 가려는 게 눈에 포착이 된다. 문호 씨의 가스를 단골로 쓰는 할머니다. 인사를 한다. 자루에는 빨간 고추가 하나 가득이다. 할머니는 방앗간까지 태워 달란 말 하지 않았는데, 문호 씨의 마음이 이미 할머니를 태우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할머니를 태우고 읍내 방앗간에 도착한다. 할머니가 웃는다. "고맙네. 이 사람아."

드디어 가스 배달해 달라는 전화 한 통이 온다. 그의 휴대폰에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 번호다. 이름이 저장되어 있는 번호는 단골 고객이다.

"가스가 떨어졌는디 우리 집에 와야것어. 우리 집 알쟈?"
"네, 알고 말고유. 어르신 집 가스통 위치도 정확하게 떠오르는구만유."
"근디 말여. 가스 가져올 때, 고기 2근 하고 소주 한 병 좀 사다 줘."

오늘은 그나마 다행이다. 읍내에 나와 있을 때, 그 어르신이 심부름 시켜서 말이다. 문호 씨는 정육점에 들러 고기 2근을 산다. 무슨 고기라고 말하지 않아도 돼지고기라는 걸 그는 안다. 슈퍼마켓에 들러 소주도 한 병 산다. 그리고 그 어르신 댁으로 출발한다. 그 집에 도착하면 어르신이 그의 손부터 본다. 고기와 소주병을 확인하고서 웃는다. "고맙네. 이 사람아." 가스를 교환해 주고 집을 나선다.

전화가 온다. 이름이 휴대폰 화면에 뜬다. "나 지금 말여. 버스 타고 읍내에 나가는디, 가스 좀 갈아 줘." 문호 씨는 그 말 한마디에 어디인지 알고 그 집으로 출동한다. 가스통을 교환한다. 그럼 잠깐. 돈은 어떻게 받느냐고? "가스통 밑에 돈 넣어 놓았으니께 가져가더라고. 그러고 잔돈 3000원은 가스통 밑에 넣어 두고 가. 고맙네. 이 사람아." 좀 전에 이렇게 통화를 끝냈었다.

주인도 없는 집에 가스를 교환해 주고 뒤로 돌아서려는데, 전화벨이 또 울린다. 이번에는 건너 마을 한 씨 할머니다. "가스 가져와여." "네. 알았시유."

그 집에 도착해 가스통을 교체하고 있노라면, 할머니가 말한다. "저 말여. 우리 집에 전구가 잘 안 들어오는디, 좀 봐 줄 텨?" 그에겐 이제 익숙한 상황이다. "어디 한번 봐 봐유." 형광등이 높이 달려 있으니 할머니 혼자서 갈기 어려웠던 거다. 전에 의자 놓고 형광등 갈려다가 넘어져서 고생한 할머니다. 그가 까치발을 하면 그의 키로도 가능한 높이다. "전에 수도꼭지도 고장 났더만, 잘 되시는규." "이젠 수도도 잘 되여. 고맙네. 이 사람아." 할머니가 웃는다. 

부탁하면 거절 못 하는 그의 심성이 오늘도 그를 바쁘게 만든다. 이런 와중에도 여유가 생기면 틈틈이 채소밭에 가서 작물을 돌보는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배추, 무, 고추, 옥수수 등. 그가 농사를 짓는 것은 팔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의 가정도 먹고, 친척과 이웃과 나눠 먹기 위함이다. 그는 1년 농사의 절기를 아는 농사 베테랑이다.

저녁이 되면 그는 저녁밥 준비를 한다. 두부 넣고 밭에서 기른 각종 채소도 넣고 된장찌개를 맛나게 끓인다. 텃밭에서 맵지 않은 고추를 따 와서 씻는다. 그가 직접 담은 된장에 양념을 해서 맛있는 쌈장을 만든다. 텃밭에서 딴 길쭉한 호박 한 개를 썰어 튀김을 만든다. 호박 튀김 옆에는 그가 직접 담은 간장을 둔다. 작년에 그가 직접 담았던 묵은 김치를 김치 냉장고에서 꺼낸다.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러운 시골 밥상이다.

밥상이 다 되면 바로 먹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문호 씨는 자신의 가스차를 타고 어디론가 또 출동한다. 이번엔 읍내에서 식당일을 하는 아내를 픽업하기 위해서다. 그의 마음이 설렌다. 아내가 하루 일을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를 픽업해서 집으로 온다.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먹으면서 하루 중 있었던 일을 아내가 고주알미주알 말해 온다. 문호 씨는 평소에는 과묵하다가 자신과 있을 때는 수다쟁이(?)가 되는 아내가 사랑스럽고 고맙다. 이때가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다. 문호 씨는 요즘 아내에게 들려주려고 읍내 기타 학원에 5개월째 다니고 있다.

이렇게 로맨틱한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한통의 전화가 온다. "지금 가스가 떨어져 저녁밥을 못 먹어. 어떡할 겨?" 어떡하긴 어떡해. 출동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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