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지난 회에 이어 이번 회에도 최근 김동호 목사의 5‧18관련 글로 인해 촉발된 성경이 말하는 동태보상법의 의미와 현대적 적용의 문제를 다룬다. 지난번에는 김동호 목사의 발언과 현대적 의의, 그리고 출 21:22~25에 나오는 동태보상법을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총신대 신대원의 김희석 교수가 그의 페이스 북에 논평을 하였다(김희석 교수 페이스북 해당 글 바로 가기). 요약건대, 필자가 주장한 동태'보상'법이라는 번역에 나타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의 주장의 결론은 동태보상법보다는 동태보복법이 더 문맥상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자세하게 논의하기는 어렵고, 그에 대한 필자의 간단한 설명으로 본 회의 내용을 시작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1회에서 총 3회 연재를 언급하였으나, 내용상 2회로도 필자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고 여겨 본회로 이 논의는 마무리하려고 한다.

2. 성경에 나타난 동태보상법

2.1 출애굽기의 동태보상법(계속)

필자가 지난 글에서 행한 "보복보다는 보상이 더 낫다"는 주장에 대해, 비록 "보상이냐 배상이냐의 개념 정의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문맥상 보상보다는 보복이 더 낫다"고 규정한 김희석 교수의 주장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이 "본문은 보상의 언어로 보복을 요구하고 있다"는 윌리엄 프로프(Propp)의 주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229쪽). 물론 누구나 다 인정하듯이, 이 본문이 두 가지 면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김희석 교수의 입장처럼 보복이냐 보상이냐는 말은 과도한 '집중'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필자가 주장했듯이, "해(害)를 받은 본인이나 그의 친족, 또는 친구 등이 가해자에 대해 똑같은 방법으로 해를 돌려주는 행위. [출처] 복수 | 두산백과"를 의미하는 보복(報復)과 "어떤 사실로 남에게 끼친 손해를 전보(塡補)하여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와 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일. [출처] 배상 | 두산백과"를 의미하는 배상(賠償)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엄밀하게 그 개념을 정리하려 한다면, 보복보다는 보상이 적절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동태보상법이라는 규정하려고 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프로프의 주장처럼, 직접적인 문맥과 더 큰 문맥 속에서 보복과 보상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동태보상법이 조산한 산모/태아의 상해와 관련된 규례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살인과 상해를 다루는 주위 문맥들의 보상 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살인죄라도 고살죄와 비고살죄로 나누는 경우, 때렸더라도 죽지 않으면 손해배상 하는 규례, 자유인과 종의 처벌 규정의 차이, 부모를 때린 자에게는 사형의 매우 엄중한 처벌을 규정하는 점 등 비록 동태보상법의 테두리 안에 있더라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Stuart, 493).

그 두 번째 이유는 산모/태아에 대한 규례에 붙어 있는 동태보상법 자체의 모호함이 발견된다. 이 구절은 '우연한 구타로 인한' 산모 혹은 태아에게 나타날 명확한 장애와는 무관한 사례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도 언급된다는 점에서 동태보상법의 원칙만을 언급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도 이 문맥 속에서 상해를 입었을 산모 혹은 태아에 대한 이 규례의 적용의 요구는 그들을 일반인과 동등한 처우를 하라는 강조의 의미로도 볼 수 있다(Brueggemann, 864).

결론적으로 필자는 기본적으로 이 일련의 사례법들과 산모/태아 관련 규례에 붙어 있는 동태보상법의 규례의 의미는 각각의 사례 속에서 보복/보상의 기계적 집행을 강조한다기보다는, 보복을 포함하는 배상의 측면에서 공정한 정의의 집행의 엄중함을 지적한다고 본다. 그러한 면에서 이 규례는 동태보상법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2.2 레위기에 나타난 동태보상법(24:17~22)

레위기의 동태보상법은 출애굽기와는 달리 아주 단순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비록 그 문맥은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웨남(Wenham, 312)에 따른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살인죄의 경우(17절)

B 짐승을 죽인 경우(18절)-보상

C 사람을 상해한 경우(19-20절)-동태보상법

B' 짐승을 죽인 경우(21a절)-보상

A' 살인죄의 경우(21b절)

이 단락에서는 사람을 살인한 경우와 짐승을 죽인 경우에 대한 처리 규정을 다루고 있다. 17절은 18절과의 병행을 고려한다면,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의 보상)으로 해야 한다"는 표현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비교 창 9:5~6; 신 21:1~9). 사람을 다치게 한 경우(19절)에 동태보상법에 대한 규정이 등장한다. 그 표현은 동태보상법의 전형적인 공식으로 나타난다. 19절(참조 20절)에 따르면, 상해를 끼친 자에게 임할 동일한 상해는 수동태로 표시되며.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처벌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측면에서 신적인 수동태로 이해한다. 이 규례의 특징은 이스라엘이나 외국인에게도 동일하게 법을 집행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엄정한 법 집행의 근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동태보상법의 경우에는 상해 발생 시 처리해야할 규정이었다고 한다면, 신명기의 동태배사상법의 경우에는 상해하려는 의도와 계획이 미리 발각된 경우를 다루고 있다.

2.3 신명기에 나타난 동태보상법(19:15~21)

이 단락은 9계명(거짓 증거)과 관련이 있다. 범죄는 그 증거와 두세 명의 일치하는 증인들이 있어야 확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위증자, 즉 '악의의 증인'이 있는 것으로 의심될 경우에는 증인들을 사법적 재판을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세워(17:8~13) 재판장이 자세히 조사하여 위증자를 밝혀내고 그가 죄 없는 자를 모함한 것이 입증되면 위증자의 '계획'대로 갚아 주어야 한다("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 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즉 신명기의 위증죄의 심각성은 범죄의 실행에 따른 처벌이 아닌, 의도와 계획이 처벌 대상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범죄자의 정죄는 "너희 중에 악을 제거하라"(비교. 13:5)와 "그리하면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에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않을 것이다"(비교. 13:11, 17:13)라는 두 가지 표현들이 함께한다. 고대 근동과 우리가 살펴본 규례들을 보면, 상해가 발생하였을 경우, 가해자를 징계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공평과 정의의 보응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더 나아가 가해자들의 '의도'에 따라 '위증'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무죄한 희생자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여 공평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예방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지금까지 구약의 동태보상법을 개괄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규례들은 각각의 경우에 세부적인가 개괄적인가, 사후 처리인가 사전 경계인가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즉 고대 근동도 마찬가지이지만, 구약의 동태보상법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과 국가 공동체에게 사례법의 엄격한 적용을 통하여 공평과 정의의 법 정신을 교훈하려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적절한 보상과,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통한 동일/유사한 범죄의 재발 방지를 목표로 한다고 보겠다.

2.4 마태복음 5:38~42에 나타난 예수의 동태보상법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38~39절)."

예수는 제자도에 대한 교훈 가운데 구약의 사법적인 정의의 측면보다는 개인/교회적인 측면에서의 '새로운' 정의의 법칙을 가르쳐 준다. 지금까지는 예수의 교훈이 보복보다는 희생과 용서의 원칙으로 이해되었으나,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의 출간 이후에 다르게 해석되었다. 예수는 개인적 혹은 교회적 차원에서 악인(혹은 악)에 대한 '저항'을 금지한다. 사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에서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인들의 올바른 정의의 집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문맥에서 가정하는 피해란, 구약이 말하는 일상적인 폭력이나 피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동태보상법이 전제하지 않았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제공해 주는데, 핵심은 '저항의 금지'인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대처법의 예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모욕에 대처하는 법이다. 두 번째는 생활의 기본적인 조건을 박탈하려는 소송에 대처하는 법이다. 세 번째는 강제 노역에 대처하는 법이다. 네 번째는 가난한 자의 요구에 항상 대응하는 법이다. 이 사례들은 나에게 요구하는 자들에게 저항하지 말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갚아 주라는 교훈인 것이다. 예수의 공동체에게 악(인)한 행동에 대한 '거부' 행위는 최선이 아닌 것이다. 첫 번째 경우는 자신에게 모욕을 주려는 사람에게 오히려 수치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인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탐욕에 가득 차서 전혀 담보로 잡을 수도 없는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도 주어서 탐욕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세 번째도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는 기본 거리를 넘어서는 노역을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오히려 강제 노역을 시킨 로마 군인이 어려움을 당하게 방법인 것이다. 마지막 경우는 자선을 요구하는 귀찮은 가난뱅이들에 대한 적선을 거부하지 말고 항상 응하도록 교훈하는 것이다(참고 Wilkins, 248~251).

이와 같은 '당혹스러운' 해석도 문제지만, 사실 이러한 교훈의 전제에는 구약의 동태보상법의 원리와 사례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하고 있다기보다는, 이 법규와 관련한 (구전으로 내려오던) 장로들의 '유전(遺傳)'에 따른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와 태도에 예수의 문제 제기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까지 예수는 "로마나 원수들이나 귀찮게 하는 자들에게 합당한 행동을 취하여 저항하라"는 구약에 대한 장로들의 유전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지, 공의와 정의의 집행을 요구하는 '구약'의 규례와 투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예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을 넘어서고 있다. 나를 모욕하는 자에게 더 모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줌으로써 모욕하는 자가 결과적으로 모욕을 당하게 만들라는 교훈인 것이다. 어찌 보면, 예수의 교훈이 무저항과 끊임없는 희생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적 불의와 억압과 착취와 가난의 굴레를 '저항'이라는 폭력적 방법이 없이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구약의 동태보상법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할 것이다.

3. 결론

5‧18과 관련하여 촉발된 성경의 동태보상법논란이 시작된 지도 벌써 10여 일이 넘어간다. 우리가 페이스북과 인터넷 신문을 넘나들며 이와 관련된 토론의 열기를 높인다고 해서 이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진상이 더 밝혀지거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더 늘어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하여 편파적이거나 양비론적 논의가 주기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의 비극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동태보상법의 원리에 대한 오해와 그 현대적 적용을 지연시키거나 왜곡시키거나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와 국가 체계에 있어서 정의와 공의를 지지하고 준행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목표와 가치라고 하겠다. 물론 그것이 국가나 공공적 수준과 개인적인 수준과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원리가 약화하거나 차별을 이루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동태보상법의 핵심 원리는 범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응징과 배상인 것이다. 5‧18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응징과 배상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 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성경의 동태보상법의 적용은 아직 미완의 과제인 것이다.

참고 문헌

Walter Brueggemann, 'Exodus', New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1994).

Nina L. Collins, 'Notes on the Text of Exodus 21:22', Vetus Testamentum 18/3 (1993): 289-301.

Russell Fuller, 'Exodus 21:22-23: The Miscarriage Interpretation and the Personhood of the Fetu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37/2 (1994): 169-184.

William Propp, Exodus 19-24 (Anchor Bible Commentaries; New York: Doubleday, 2006).

Douglas Stuart, Exodus (New American Commentaries;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6).

Gordon Wenham, Leviticus (New International Commentaries o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9).

Michael Wilkins, Matthews (New International Version Application Commentaries; Grand Rapids: Zondervan, 2004).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위키피디아 lex talionis 항목

필자의 출애굽기강의노트
필자의 레위기 주해와 설교(출간준비원고)
성기문, <모세의 고별설교> (서울: 솔로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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