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없는 신앙인의 모습

긴 세월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속칭 '가나안 성도'라 부른다 한다. 이 단어를 거꾸로 말하면 '교회 안 나가'를 의미하는 뜻이 된다. '목회사회학연구소'에서 교인 누수 현상을 실감하며 비상종을 울렸다. 4월 25일 명동 청어람에서 '가나안 성도' 숫자와 그 대안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인지라 참석했다. 대부분 신앙은 있지만 제도화된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속칭 '가나안 성도'들의 문제점을 진단해보았다. 그동안 '목회사회학연구소'는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한다. 왜 그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서도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심층 연구했다.

장진원 실장의 사회, 한기양 목사의 기도와 함께 정재영 교수(목회사회학 연구소 부소장)가 '소속 없는 신앙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사진 왼쪽) 기도하는 한기양 목사. (사진 제공 국인남)

최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 실체와 특성을 분야별로 분석했다. 2004년도 한국갤럽 조사 결과를 예로 들었다. 그 당시 교회를 떠난 사람이 758만 명, 그중 198만은 타 종교로, 560만 명은 '가나안성도(교회를 떠난 사람들)'가 된 결과를 볼 때 심각성을 짐작할 만했다. 그 후 9년이 지난 지금의 '가나안 성도' 숫자는 감히 우려할 만한 숫자로 감지된다.

이들 대부분은 교회 내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교회를 떠난 가장 큰 이유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한다가 30.3%를 차지했다. 그다음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 24.3%를 나타났다. 대체적으로 고학력자와 직분자일수록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 예로 맹목적인 충성, 무조건 순종, 헌금 강요, 전도, 교회 출석 등 교회의 제도화된 독선이 이들을 떠나게 한 요인으로 나왔다.

이런 목사 참 꼴불견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가 큰 몫을 차지했다. 각종 세습, 정종유착(정치와 종교), 권력 다툼, 건축, 논문 표절, 재정 독점, 문어발식 개척, 성 문제까지 대두되었다. 심지어 부끄러운 세습을 하고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나쁜 목사들이 많다. K교단 K교회 K 목사는 종편 방송에 나와서 뻔뻔하게 북한의 세습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러나 자신의 세습은 당연하다 말했다. 한마디로 "네가 하는 사랑은 불륜이고 내가 하는 사랑은 로맨스"라는 독단과 독선이 '가나안 성도'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공로자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상이 교회를 한심하게 볼 정도까지 와 있는데도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학력이 높고 직분을 맡은 교인들이 먼저 '가나안 성도'가 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나 개인의 의견은 무조건 비판적인 시야로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티 성도로 낙인찍어 설교자는 설교 때마다 이런 성도들을 집중 공격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렇듯 소수 공동체 의견이 묵살되는 곳이 교회다.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구성원들이 어떠한 공동체에서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도록 왜곡된 사고방식을 '집단사고(Groupthink)'"라 했다. 자칫 '집단사고'는 권위를 과시하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독선 독재 집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집단사고' 즉, 맹종을 부추기는 당회장의 독단과 독선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직분자들 대부분은 무조건 순종과 충성만이 신앙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택한다. 즉 자기방어적인 '집단사고'이다. 무한 성장주의, 물질숭배주의, 배타적 일방주의,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권위주의가 교회를 병들게 한 바이러스와 같다.

'가나안 성도'들은 이러한 수많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들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 성도가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된 것이 아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교회가 성도를 떠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가 떠난 교회는 이미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린 부도 위기에 처한 부실기업과 같다.

언제 붉은 딱지가 교회에 붙을지 모른다. 현재 건물을 짓다 실패하여 경매로 나온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교인 머리 숫자대로 대출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과연 누가 누구를 불쌍하다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요란해도 우리 교회와 상관없다는 관념으로 교회는 대형화를 넘어 초대형화를 향해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건물에 목매고 있는 목회자는 지금 길을 잘못 가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가 서구 사회를 따라가고 있다 우려하지만, 그것은 우려의 문제가 아닌 기정 사실적인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필자가 <크리스찬이여, 핸들을 꺾어라> 책을 썼을 당시,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성전마다 하얀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이미 나이 든 사람들만이 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주일 오후 예배나 수요 저녁 예배, 금요 철야는 서릿발보다 더 하얀 함박눈만이 앉아 있었다. 필자 자신도 충격이었다.

매년 젊은이와 어린아이가 사라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건물에 집착하고 세습과 독선의 배를 타고 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더 많은 '가나안 성도'가 증가할지 우려되는 문제다.

이런 모든 문제들을 볼 때 교회 공동체 회복이 시급한 과제임을 실감했다.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희망하는 교회도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찾는 성도가 16.6%를 차지했다. 그리고 대부분 구원의 확신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가나안 성도를 통해 본 현대인의 영성

조성돈 소장은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로 꼽았다.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강요받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양한 경험과 책을 통해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교회에 대한 실체를 보고 나만의 신앙생활로 돌아간다. 신앙의 생활화로 만족하는 사람들로서, 실천을 통해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자기식으로 표현하는 신앙생활자를 말하며 자신의 종교를 패치워크 종교성(Patchwork Religiositaet)즉 조각 천들을 연결하여서 담요를 만들 듯이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교적 상징들을 이어 붙여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했다.

▲ 조성돈 소장은 "강인하게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용납해 줄 교회와 하나님을 찾고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신앙의 정서적인 면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자들"이 가나안 성도라고 했다. (사진 제공 국인남)

대부분 교회가 신앙심을 볼모로 억지 아멘을 강요시키며 공동체의 맹종을 요구했다. 심지어 두 손 들고 울면서 찬양하며 감동하는 성도를 믿음 좋은 성도로 내세웠다. 어찌 보면 개인의 감성까지 침범하며 억지 춘향이 노릇을 강요한 결과들이 지금의 문제들을 야기했다. 신앙 안에서 자연발생적인 믿음이 성장하기까지는 긴 세월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는 시간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우물 앞에서 숭늉(헌금·전도·출석·건축)등을 강요하니 성도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도들은 일주일간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상처 받고 살다가 교회 와서 위로받고 재충전의 시간을 원했다. 그러나 교회는 더 큰 부담과 죄의식까지 심어 주었다. 특히 헌금과 전도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1960~80년대에는 그러한 독선이 통했기에 한동안 뜨거운 냄비로 달구어졌다. 그러나 그 냄비는 복음이 아닌 상품이었기에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성돈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강인하게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용납해 줄 교회와 하나님을 찾고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신앙의 정서적인 면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4영리에 묶는 시대는 지났다. 좀 더 논리적인 변증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들, 포기할 수 없는 '가나안 성도'"라 했다.

과연 누가 무엇을 포기하고, 누가 무엇을 포기할 수없는 것인지는 더 깊이 있게 상고해 봐야 할 문제로 남았다.

'가나안 성도'와 새로운 신앙의 방향

양희송 대표(청어람아카데미)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례가 있는데 대부분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제도권 교회를 떠났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전형적인 제도권 교회의 강화가 아니라 교회 바깥에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신앙적 각성과 새로운 신앙 유형을 형성한다. 또한 제도 종교에 대한 반발, 즉 무의미한 예배(종교 의식), 위선적이거나 피상적인 라이프스타일(성도들의 영성과 윤리), 윤리적 질문에 대한 무능력한 대답. 그리고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대표적 증상이다"고 했다.

▲ 양희송 대표(오른쪽)는 "(가나안 성도) 대부분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제도권 교회를 떠났을 뿐"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 국인남)

양 대표 주장은 기독교 신앙 바깥에서 이들의 신앙을 유지 발전시켜 줄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좀 더 앞서가는 대안으로 볼 수 있다. 필자 주위에는 '가나안 성도'가 많다. 필자도 이중 한 사람이다. 한기양 목사(기장)는 "기장 교인들이 '가나안 성도' 반열에 많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고신, 합동, 통합, 감리, 성결, 순복음, 침례 등 수많은 교파에서 떠나온 '가나온 성도'의 순례는 더 많다. 그것은 대형화된 교회에서 더 많은 '가나안 성도'가 이탈했기 때문이다.

우스운 한 예이다.

"기장 목사들은 술병에 술을 그대로 놓고 마시는데, 다른 교단 목사들은 박카스 병이나 우우 병에 술을 담아서 마시면서 거룩한 체한다." 그만큼 거룩으로 위장한 교단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디 술뿐이던가. 담배와 잡기까지 친구삼아 위장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과연 누가 가나안 교회를 만든 범인인가. 결국 '가나안 교회'가 먼저 바이러스를 옮긴 결과 '가나안 성도'들이 병들어 떠난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가나안 교회(안 나가는 교회)' 현실 앞에 서 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복음의 본질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로 '가나안 성도'들은 '영적 노숙인'이 아니다. 가야 할 저 본향 길을 향해 단지 외롭게 가고 있을 뿐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다. '가나안 성도'라는 별칭이 합당 타당하다. 이들은 가 보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 초심을 찾아가고 있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바로 교회 아닌가. 예수님도 성전 없는 사역을 감당했기에 복음이 지금 이곳까지 왔다.

그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초호화 초고층 교회를 짓고 사역했다면, 오늘날 복음은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다. 열두 제자가 각기 흩어져 '가나안 제자'가 되었기에 복음은 흩어져서 결실을 맺었다. 복음이 성전 안에 갇혀 소수 공동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면, 복음은 이미 진리가 아닌 상품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 복음이 점차 인간의 탐욕으로 교회가 상품화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서 있다. 정재영 교수의 주장과 같이 "'가나안 성도'들은 기성 교회에 대해 뚜렷한 불만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이다. 일부는 기성 교회와 차별성을 갖는 '대안적 교회'를 세우고 있다.

▲ 정재영 교수는 "가나안 성도 중 일부는 기성 교회와 차별성을 갖는 '대안적 교회'를 세우고 있다"고 했다. (사진 제공 국인남)

이것은 마치 중세 교회가 제도화되고 교권화됨에 따라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고 교권이 미치지 않는 사막으로 나갔던 사막 교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을 섣불리 교화하려 하거나 제도권으로 흡수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의 영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것을 기성 교회에서 수용함으로써 교회 갱신 노력이 절실함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필자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대안책으로 가정 교회를 '대안적 교회'라 말하고 싶다. 특히 미주 지역에서 가정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도 현재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다. 가족이 모이기도 힘든 시대이다. 먼저 가족이 모이고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절기와 세례 의식은 자신이 가고 싶은 교회로 가서 드린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에서 활력을 얻고 있다.

끝으로 조성돈 소장은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이 불쌍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러나 세상이 교회를 얼마나 한심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가 창피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말도 있다. 적을 알면 전쟁에서도 백전백승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 시각과 '가나안 성도'들 신념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이 함께 행할 때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행 7:47~50)."

바로 가정, 삶의 현장이 성전이라는 신념과 신앙의 지각을 넓힌다면 '가나안 성도', '가나안 교회' 문제도 그리 먼 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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