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 진리를 불문(不問)하는 WCC 에큐메니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제10차 총회가 2013년 10월말부터 약 열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사 42:1~4)"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다.

WCC 문제는 한국교회 장로교 교단 분열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를 찬성하는 측과 51인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이를 반대하는 측의 대립으로 인하여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교로부터 통합측이 이탈하였다. 합동측은 WCC가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단일한 교회를 추구하고,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며, 특정 정치 이념에 빠져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서 이를 반대하였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나온 말로서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의미가 통한다. 그것은 '우주' 혹은 '전 세계'를 뜻하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진리' 혹은 '질서'를 뜻하는 원리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말뜻에 비추어 본다면, 에큐메니즘 혹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은 진리를 떠나서는 논의될 수도, 추구될 수도 없다.

WCC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근대적' 에큐메니컬 운동은 진리의 일치보다 연합 사업과 협력의 방편을 모색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측면에서 초대 교회 이후 공의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대적' 에큐메니컬 운동과는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것을 'WCC 에큐메니컬 신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WCC의 신학이 그들이 추구하는 가시적·기구적 에큐메니컬 운동에 집중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에서는 주요한 교의 신학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WCC의 신학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에큐메니즘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2. 비성경적인 성경론

WCC는 성경을 전통 혹은 전통화의 산물로 본다. 성경은 교회와 개인의 경험을 기록한 책으로서 상대적인 권위만 가질 뿐이므로 그것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 66권만을 정경(正經)으로 보는 데에도 부정적이다.

WCC의 성경관은 1998년에 출판한 보고서 <질그릇에 담긴 보배 : 해석학에 관한 에큐메니컬 고찰을 위한 도구>에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들은 "에큐메니칼 성경 해석학"을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위한 해석학"으로 정의하고, 그 지침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성경은 일련의 문학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여타 문학적 자료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방법들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비평이 필수적이다.
2) 성경은 오랜 기간 동안 기록과 재기록과 해석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므로, 역사 비평이 필수적이다.
3) 성경은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내용들은 상호보완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상충될 수 있다. 이 때 무조건적인 조화를 피하고, 서로 모순되는 상태로 놓아두어야 한다.

WCC는 성경 기록을 일종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그리고 성경을 그 해석학적 작업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치는 해석자의 수준과 체험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해석자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는 성경의 상황적 의미를 그들은 '전통'이라고 부른다. 그들에 의하면 성경은 오직 전통의 형태로만 작용한다. 그들이 말하듯이,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후에 비로소 계시적 성격을 드러낸다."

WCC에 있어서, 성경은 다양한 전통들을 형성하는 원형적 전통에 불과하다. 그들은 성경을 대문자로 표현하여('Tradition') 일반 전통('tradition')과 구별할 뿐이다. 그들에 따르면, 성경은 계시적 성격을 드러낼 뿐 그 자체로 계시가 될 수 없다. 그들의 다음 말에 주목하자.

성경 자체는 영원한 진리들에 대한 직접적인 계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는 도구들에 대한 기록된 증언으로서 자신을 나타낸다.

WCC에 있어서, 성경은 여전히 인간의 해석을 기다리는 미완성·미해결의 책이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절대적 진리도, 그것으로부터 나온 보편적 교리도 없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교리적인 수렴(收斂, doctrinal convergences)"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WCC는 성경을 전통 혹은 전통화로 여겨서 그 절대적, 객관적 권위를 부정한다. 그들은 모든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또한 성경에는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완전한 구원 교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딤후 3:16; 계 22:18~19).

3.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3.1. 정통적인 삼위일체론 부인

WCC는 자신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325, 381)에 따라서 삼위일체를 올바로 고백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러한가?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WCC는 삼위 각각의 존재와 경륜(사역)은 도외시하고 그들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WCC는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다(We believe in One God)>라는 보고서에서 삼위 하나님 상호간의 '관계(relationship)'로부터 세 위격의 존재와 사역을 추론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그들은 이 관계를 '교제(koinonia, communion)'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위격의 존재 자체를 말하지는 않았다. 위격이 없는 위격 상호간의 관계—그것은 헛것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그것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념'에 불과하다.

동일한 입장이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We believe One Lord Jesus Christ)>라는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그들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계시되신다는 점에 집중한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그 관계를 절대적인 사랑과 선(善) 그리고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주님의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모종의 영원한 '관념'이 역사상 실제적으로 체화(體化, embodiment)된 사건에 불과하게 된다.

WCC는 그나마 이러한 관계조차도 위로부터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로 유추하고자 한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지상으로부터 천상으로, 즉 우리의 관계로부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더 나아가서 삼위 하나님 서로 간의 관계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들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제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이 유추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의 모임으로부터 유추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WCC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회합에서 부터 삼위일체론적 의미—즉 신적의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3.2.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가운데서의 중보를 부인

WCC는 <하나의 신앙을 고백하며(Confessing the One Faith)>라는 보고서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 확고하게 천명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을 "관계 속에 있는 인격(a person in relationship)"이라고 부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교제"가 곧 "영원한 삼위일체"를 뜻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모델, 모든 피조물의 로고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좀 더 원리적인 측면에서 표현한 말이다. 그들은 성육신의 의의를 "참 인성을 완전히 실현한" 예수가 우리도 그와 같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들의 주관심사는 "한 사람 개인(a human individual)" 예수의 모범적 행적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새로운 삶의 원형"을 보여주신 윤리교사 즉 랍비 정도에 머물 뿐이다.

왜 그들은 주님의 위격과 사역을 실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추상적인 관계로만 바라보는가? 이것은 그들이 동방교회의 신화(神化, deification) 사상을 받아들이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동양 정교회와 동방정교회가 1967년에 합의한 아래 문건은 이러한 신화 사상의 핵심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본성상 사람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이렇듯 사람의 진정한 소명을 계시하고 실현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기 자신과 완전한 교제에 들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광으로부터 영광으로 변화되게 하신다. 우리가 기독론적인 질문에 접근하는 것은 이러한 구원론적인 관점에서이다.

여기에서 WCC는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것이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것 즉 신화를 위해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은 이러한 아버지와의 교제의 원형을 제시해 주신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구원론을 기독론에 앞세운다. 구원론이 기독론을 규정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의를 먼저 이루신 분이라기보다 우리의 구원을 뒤에서 돕는 분 정도로 나타난다.

3.3. 성령이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심'을 부인

WCC가 성령의 위격과 사역을 다루는 방식도 성자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성령의 구원 사역이 삼위의 교제를 계시하는 일에서 시작되며 사람과의 교제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는 데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WCC로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는 필리오케(Filioque, et Filio,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의미의 라틴어) 교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들은 성자는 성령의 감화의 대상일 뿐 성령이 나오시는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리오케 교리는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비롯한 정통 신경들과 정통 신학자들에 의해서 고백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설명함에 있어서 필리오케 교리를 주요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믿고 주장해 왔다. 예컨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필리오케의 교리에 근거하여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시라는 사실이 구원론, 율법의 적용, 교회론과 성례론, 종말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반복해서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동방 신학자들을 포함한 WCC 에큐메니컬 신학자들은 필리오케 교리가 그 형성에 있어서부터 정치적이었다거나, 무모했다거나, 교부들의 가르침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유들을 열거하면서 그것을 거부한다. WCC는 필리오케 교리를 부인하므로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성령의 위격을 소홀히 하고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교제로부터 솟아나는 능력 혹은 그 작용 정도로 여긴다. 둘째, 그들은 주님께서 인성에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셨으나,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 즉 그분의 신성을 올바르게 조명하지 않는다. 셋째, 그들에 의하면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부어 주시는 성령 곧 '다른 보혜사'가 '주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사실이(요 14:16; 고후 3:17~18; 롬 8:9)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구원론이 기독론적 근거를 잃어버린다. 넷째, 그들에 의하면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교회의 비밀이 부인된다. 교회는 단지 지상의 가시적인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다섯째, 그리스도는 죄의 값을 치룬 구속자가 아니라 성도의 신화(神化)를 위한 하나의 전형적 모범으로 남을 뿐이다. 대속의 의의 교리가 무의미해지고 그리스도의 공로는 단지 하나의 모범적 선례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게 된다.

4. 그리스도 없는 교회론 : '비가시적 교회'를 부인

성경은 '비가시적 교회(무형 교회)'와 '가시적 교회(유형 교회)'를 함께 가르친다. '비가시적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의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말한다(엡 1:13; 딤후 2:19). 그리고 '가시적 교회'는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와 성례를 드리며 경건한 성도의 삶 가운데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자들과 그 자녀들의 모임을 말한다(엡 2:19; 4:11~13).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두 형태의 교회는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 않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WCC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교회들의 협의회'라고 본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교회는 단지 가시적 형태의 교회에만 제한된다. 그들은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에 대하여 고백은 하지만 이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기초시키지 않고 가시적 교회의 속성을 표현한 말로만 여긴다.

WCC는 교회의 일치가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아니라 성도 서로 간의 가시적 친교에 있다고 봄으로써 비가시적 교회의 비밀을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무조건적 선택과 그리스도를 통한 종말론적 성취를 외면하고 개개인의 주관적 신념과 공동체적 소망만을 교회에 남겨 두었다.

그들은 교회를 '주의 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몸'이라고 정의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들은 <교회의 본성과 사역(The Nature and Mission of the Church)>이라는 보고서에서 교회가 "말씀과 성령의 산물"인 것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실존적인 부딪힘을 통하여 말씀을 접한 사람들의 교제가 교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심에 관한 언급은 찾아 볼 수 없다.

WCC는 성도 상호 간의 교제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보다 앞선다고 여긴다. 그들에게는 가시적 교회가 비가시적 교회보다 앞선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의 가시적 연합은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을 하나로 이끄는 우주적 일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은 교회가 없는 교회의 일치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5. WCC의 그릇된 성례주의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表)로 제시한다. 성례는 말씀의 제정, 표징, 성령의 세 요소로 작용한다. 성례에는 고유한 은혜가 있다. 그리하여 말씀과 함께 '은혜의 방편'이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례 그 자체가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세례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며, 성찬을 통하여서 비로소 성화의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다.

세례(Baptism)와 성찬(Eucharist) 그리고 사역(Ministry)에 관한 리마 보고서를 칭하는 'BEM 문서'가 공식 발표된 이후 WCC는 전(全) 우주적 성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삼았다. WCC가 성례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시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이다.

WCC 신학의 모호성은 성례에서 극에 달한다. 그들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표징—물 혹은 씻음—이 제시하는 의미를 "성(性)이나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의 장벽이 극복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의 해방"에서 찾는다. 그들이 세례를 "문화화"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또한 WCC는 성찬을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양극단의 오류에 빠져있다. 이러한 오류 역시 성찬을 통하여 가시적인 교제를 강조하기 위한 그들의 동기로부터 기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찬은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 누리는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삶을 살고자 결단하는 실존적 사건이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독자의 실존적 결단을 통하여 비로소 계시가 되듯이, 성찬의 은혜도 그러하다.

WCC가 말하는 "성찬적 사건"은 '에큐메니칼 사건'을 뜻한다. 그들에 따르면, 성찬의 핵심적 가치는 십자가의 교훈을 되새기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교제에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영적‧실제적 임재는 없고 사람들 상호 간의 도덕적‧상징적 임재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한 사랑을 상징할 수만 있다면 굳이 그 표징이 떡과 잔일 필요가 없으며, 굳이 그 실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WCC의 입장을 '성례적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6. WCC의 가시적·기구적 교회 일치론 비판

6.1. '협의회적 교제'를 통한 '협의회적 공동체' 추구

WCC는 WCC 자체를 중심으로 교회의 기구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협의회성(conciliarity)'이라는 말을 고안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협의회적 교제(conciliar fellowship)'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WCC의 주요 관심사는 교회의 협의회적 성격에 있다. 우리가 위에서 고찰했듯이, WCC는 성경 자체를 계시로 여기지 않고 그것이 역사상 정황적 의미를 갖게 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된다고 본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전통화라고 부른다. WCC는 WCC 자체를 이러한 전통화의 주축(主軸)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로 로마 가톨릭에 기원을 둔 '협의회적 교제'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

'협의회적 교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협의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 그들이 공언하듯이 '협의회적 공동체(konziliare Gemeinschaft, conciliar community)'가 하나의 교회도, 유일한 교회도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교회를 대체하는 기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회를 무너뜨리고 세워지는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WCC가 '신앙과직제위원회'의 <교회의 일치-다음 단계들(The Unity of the Church-Next Steps)>라는 보고서에서 "하나의 교회는 그들 자체가 참으로 연합되어 있는 지역 교회들의 협의회적 교제로서 그려질 수 있다"고 한 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WCC는 자신을 '협의회적 교제'를 이루는 "진정한 우주적 협의회"로 여기고 있다. 이는 로마 가톨릭의 영향을 잘 드러낸다.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완전하고 실체적인 일체"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루고자 하며 그것이 이미 지상에서 실제적이며 우주적으로 주어졌다고 본다.

6.2. 종교다원주의의 길에 선 WCC

1990년에 작성된 '바르 선언문(Barr Statement)'은 WCC가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이 선언문은 "하나님은 나의 이웃인 힌두교도의 기도를 들으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추구되었으며, 다음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 부분은 '종교적 다원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일반 은총의 보편성을 구원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있다. 구원의 경험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보편성을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둘째 부분은 '기독론과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제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종교를 넘어서는 사랑의 차원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우주적 차원에서 그 신비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셋째 부분은 '성령과 종교적 다원성'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었다. 여기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고 선언하였다. 특히 타종교와 관련해서 이러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렇듯 바르 선언문은 WCC가 자주 사용하는 '대화' 혹은 '교제'라는 말이 종교다원주의를 근본에 둔 개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6.3. 선교를 퇴보시키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는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다. 화란의 선교학자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에 의해 주장된 이 개념은 그저 보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듯해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어도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활동을 통하여서 선교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선교의 인간화(humanization)'를 추구한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국내 민중 신학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WCC 선교관을 확정한 중요한 문서인 로서 1982년에 발표된 <선교와 복음 전도 : 에큐메니컬 확언(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에서는 '하나님의 선교'의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과 연대하여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취지를 역행한 복음 선교는 현 단계에서 유예(猶豫, 모라토리엄, moratorium)되어야 한다며 선교지로부터의 철수를 내세웠다.

WCC는 자신들의 선교론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총회가 시작될 즈음인 1950년대에는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선교사 숫자가 거의 비슷했으나, 30여년이 지난 1985년 통계에 이르러서는 진보주의 진영의 선교사(4439명)가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사(3만 5386명)보다 크게 못 미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2011년 6월 28일에 WCC와 '세계복음주의연맹(WEA, World Evangelical Alliance)' 그리고 로마 교황청이 공동 선교 문서로 발표한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증인(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은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는 교회 존재의 중심에 있다. 선교를 위한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여야 한다. 즉 종교들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우주적인 교제를 이끌어 내는 교회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서로 격려는 하되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익을 위하여 범종교적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여러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연합하는 일에 협력하여야 한다.

본 문건의 논조는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라는 공통의 목적이 있으며 기독교는 그것에 이르는 다양한 길들 가운데 한 길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종교혼합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영생의 구원이 아니라 인류의 현세적 공영과 공존일 뿐이다. 그들은 땅 끝까지 나아가라는 명령에는 깨어 있는지 모르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에는 귀를 닫고 있는 것이다(행 1:8).

7. 결론적 고찰 : WCC의 '비(非)성경적', '반(反)교리적' 에큐메니즘

WCC는 성경의 진리 가운데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묻지 않고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연합이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교리가 바로 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교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교회는 넘어진다.

교회의 '하나 됨'은 교리의 '하나임'에 기초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 추구된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교회가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다.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공의회들이 그러했다. 종교개혁이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리를 제일로 삼은 것은 성경의 진리 가운데서 교회의 순수성과 보편성을 함께 회복시키고자 함에 있었다.

주님을 나눌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눌 수 없다(고전 1:13). 교회가 하나인 것은 오직 교리 안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자격을 갖춘 일치(a qualified unity)", "진리 가운데의 일치(a unity-in-the-truth)"여야 한다.

WCC는 교리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은 문제 삼지 않고 서로 공감하는 것들만 붙들고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은 이를 "부정적 일치(a negative consensus)", "능동적 일치(a positive consensus)"라고 부른다. 과연 서로 다른 것을 그대로 둔 채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가?

WCC는 '교회들의' 협의회로서 자신들을 규정하지만 정작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에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비가시적 교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우기보다 교회의 전통을 말씀으로 여긴다. 교회를 창세 전에 정해진 백성의 모임으로 보지 않고 인류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산물과 같이 여긴다.

WCC는 교리에 관한 고백은 하지만 교리 그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들이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신학은 성경 비평주의,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에 젖어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비(非)성경적이며 반(反)교리적이다. 그들은 성경 자체를 계시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등에 관한 정통 교리가 모두 가변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WCC는 연합이 아니라 타협을, 일치가 아니라 공존을 추구할 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협의회적 교제'를 통하여 '협의회적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지상의 모든 교회를 WCC의 조직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WCC는 교회의 일치를 넘어서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확장이라기보다 세속화와 종교다원주의화를 의미한다.

WCC가 추구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적 선교가 아니라 세상적 선교를 추구한다. 그것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인류의 일치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연결하는 영적 고리가 '하나님-교회-세계'에서 '하나님-세계-교회'로 순서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폭력, 동성연애, 공산주의가 인류의 일치를 위하여 허용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되다(갈 1:6~9). 오직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 배운 것만을 자랑한다(고전 4:7; 딤후 3:14).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요 17:11). '여호와의 열심'(사 9:7)이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떠낸 반석과 우묵한 구덩이로 되돌아가야 한다(사 51:1~2).

교회는 성경적 진리를 온전하게 붙들고자 했을 때 오히려 편협하지 않았으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다. 그들은 그것이 양보할 수 없는 진리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은 다원주의나 혼합주의로 자신의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현실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진리를 상황에 종속시키는 것은 결국 성경을 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걸림돌이 된다. 참교회와 참성도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에 대한 복종에 있다. 진리의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곳에는 참교회가 없다. 교회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홀로라도 남아서 진리를 외치는 것은 교회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지키는 것이다.

진리의 '하나임'을 외치는 사람을 교회의 '하나 됨'을 해치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세태야말로 가장 교묘하게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는 그것이 진리 가운데 이루질 때만 평강이 된다. 그 진리는 참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 자신이다(요 14:6). 교회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엡 4:15). 교회의 본질을 성도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두고 그 가운데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에큐메니즘이 나아갈 유일한 길이다.

교리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무분별하게 모이기만 힘쓰는 WCC의 '그럼에도 불구하고(quamvis, although) 신학'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분열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지침을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 그것은 WCC 자체이다. 이 사실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하물며 성경의 진리를 해석하고 이를 수호해야 할 교사로서의 직무를 가진 신학자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서 필자는 WCC의 신학을 그들의 문건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여 교리적으로 비판하는 데 주목하였습니다. 사안의 본질이 성경의 진리 곧 교리 문제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더욱 자세한 고찰을 위해서는 필자의 졸저, <교회의 '하나 됨'과 교리의 '하나임'. 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에큐메니즘 비판 : 정통 개혁주의 조직신학 관점에서>(지평서원, 2011)와 <왜 우리는 WCC를 반대하는가>(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출판부, 2012)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고의 분량을 대폭 줄이다 보니 인용한 문건의 출처 등을 표시한 각주를 생략합니다. 필자의 졸저에 모두 표기되어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필자 주

문병호 교수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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