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어 이번 회에는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를 그 문맥과 사무엘하 후반부의 문맥에서 조금 더 살펴보고, 이 이야기에 대한 현대적 적용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1.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징벌하셨는가

지난 호에 언급한 대로, 이 이야기의 핵심 구절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삼하 12:13)"라는 구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절은 명확한 오역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옮기셨다"로 번역해야 한다. 오역이라는 필자의 주장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다윗과 다윗의 가문에 임할 재앙들'에 관한 나단의 신탁을 통해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문장은 하나님이 다윗을 심판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에 대한 진노를 누구에게 옮기셨는지도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이해된 바는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죄는 용서받았다는 입장 :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의 죄가 옮겨졌기에 그가 죽지 않을 것(13절)"이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말 성경(개역, 개역개정)이나 일부 다른 외국어 번역 성경에서는 아래의 2)와 연관 지어 다윗의 죄가 용서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2) 다윗의 죄는 타인에게 즉, 자기 아들에게 넘겨졌다는 입장 :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4절)." 이 입장은 다윗의 죄에 대한 징벌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처음으로 낳은 아이에게 임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들의 가장 중대한 문젯거리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며, 죄를 지은 당사자인 다윗이 죽지 않고 그의 자식이 죽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용서하겠느냐는 것이다. 나단이 전한 하나님의 마지막 신탁은 앞에서 나단이 전한 우화에 대한 다윗의 말에 대한 조롱일 수 있다. 다윗은 말했다.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5절)."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14절)." 그런데 신기하게도 히브리어로는 5절이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죽음의 아들이라(벤-마베트 하이쉬 하오세 조트)"고 말하며, 14절은 "너에게서 태어나는 아들도 정녕 죽을 것이다(감 하-벤 하일로 레카 모트 야무트)"라고 말한다. 구약을 보면, 세치 혀로 한 말 때문에, 혹은 자기가 벌인 잘못이 자기에게 동일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다윗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하겠다. 다윗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지만, 여호와는 다윗의 범죄를 옮기셨다. 다윗은 자기 말로 자기에게 임할 재앙을 결정한 꼴이 되어 버렸다.

3) 다윗과 다윗의 가문은 함께 죄의 징벌을 받게 되었다는 입장 :

이것은 필자가 지지하는 입장이다. 위의 1), 2)의 논의를 통해서 볼 때, 나단이 다윗에게 한 말 "당신의 죄가 옮겨졌으니,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나단의 우화에 대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이 다윗의 범죄를 용서하셨다거나 다윗에게 임할 재앙이 취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문맥적으로나 나단이 선포한 신탁이 단계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의 죄를 어찌 처벌해야 할지를 우화를 통해 다윗에게 물어보셨고 다윗은 자신이 받을 재앙을 결정한 꼴이 되어 버렸다. 우화 후에 나단이 전한 신탁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 재앙을 거기(아들의 죽음)에서 멈추지 아니하시고 다윗과 다윗의 가문에게 재앙을 임하게 하실 것이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으니 칼(군사적 재앙)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0~12)."

2.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가 두 차례 걸쳐 살펴본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나단의 신탁에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삼하 11~12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거리는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성적인 범죄는 자신의 권력에 심취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주어진 본분을 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범죄는 다윗이 '왕궁과 같이' 높고 화려하고 안락한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과 장수들과 이스라엘 군대를 호령하고 통제하는 자리에 서게 될 때,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리심을 받는다는 것을 망각하게 될 때 발생한다.

2) 다윗의 성적인 범죄는 가까이에 있는 자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항상 그들을 '욕정의 눈으로' 관찰하고 기회를 틈타며 자기 사적인 성욕을 채우는 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였다.

3) 다윗은 자신의 은밀한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4)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밝혀지거나 다루어지거나 지목을 받게 되면, (나단의 우화에서처럼) 자기를 범죄자와 별개의 존재로 여기거나 (우화를 들은 후에) 마지못한 범죄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윤리적 부담을 덜고자 하였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회개한 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오해하기까지 하였다.

5)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성범죄와 살인 음모까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잊었다. 다윗은 자기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철저하게 징계하실 것이라는 알지 못한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의 교리'의 달콤함에 속아, 지도자의 범죄가 얼마나 큰 범죄인지, 그것에 공동체에 얼마나 큰 부정적인 여파와 재앙을 초래할 것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필자가 10여 년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건강교회운동 총무로 일했을 때만큼이나 요즘도 목회자들의 성 추문과 성범죄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목사들은 교회당에서 교회 사무실에서 목사 숙소에서, 기도원 가다가 호텔에서 교회 직원이나 전도사나 집사나 여신도들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러 왔다. 새벽 기도 후에, 한밤중에 간음과 간통을 저질렀다.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도피하는 것은 '낭만적인 사건'에 속한다! 여인들을 성적으로 농락하는 것은 이단 사이비 교주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은밀한 범죄는 결국 누구의 입을 통해서건 들통 나게 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목사의 사모들이 남편 목사의 무죄를 항변하는 데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사건이 공론화가 되면,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 앞에서 당당하며 공적으로 회개의 말을 하며 '다윗이 용서받은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다윗이 왕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도 목사직을 유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 양, 다윗과 밧세바 사건을 증거 구절(prooftext)로 삼는다.

책임을 묻는 나단과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항변하는 목회자들을 종종 본다. 어떤 정치인의 주장처럼, "역사가 알아서 하게 하라"는 말처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말은 책임 회피나 일시적 모면의 수사학이 아니다. 두렵건대 우리는 이미 다윗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 일들'을 보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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