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데 이어서(창 1:28) 사람이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먹을거리를 지정하여 주신다.1) 사람은 씨 맺고 열매 맺는 식물을 먹어야 씨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다. 사람은 본디 채식 동물로 창조되었다.

사람에게 육식이 허용된 때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였다. 창 9:3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지라'고 말씀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땅의 식물이 모두 물에 녹아 버렸기 때문에 노아와 그 식구들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먹을 것이 없었다. 방주 안에는 동물들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동물들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에게 먹을 곡물이나 야채나 과일이 없을 경우 비상식량으로 육식을 허용하신 것이다. 더 나아가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병이 난 사람을 치유하기 위하여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동물을 잡되 그 피를 먹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원칙은 사람이 채식을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왕궁의 육식으로 훈련받는 어떤 소년들보다도 더 아름다운 용모로 빼어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채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 1:12~15) .

노아에게는 '모든 동물'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셨지만, 레위기는 다르다. 레위기에는 식물에 대한 금령은 없고 오로지 동물에 대해서만 금령을 두고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길짐승과 날짐승과 물짐승 가운데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정결한 동물만 먹도록 지도하셨다(레 11장). 레위기의 정결법에 어떠한 위생상의 원리가 있는지 아니면 생태학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종교상의 이유가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육식을 할 경우 매우 까다롭게 규정함으로써 아무것이나 마구 잡아먹지 못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아무것이나 마구 잡아먹는 악인의 식생활은 동물 가운데 엄선하여 조심스럽게 잡아먹는 의인의 식생활은 엄격히 구별된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금령을 무조건 준수하며 살려는 착한 마음이 있어야 이 금령을 지킬 수 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준수하지 못한 인류의 죄를 뉘우치면서 애초의 채식 생활로 돌아가서 속죄하려는 애절한 심정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레위기의 금령을 지킬 수 있게 한다.

가인이 에녹 도성을 건설하자 그 손자 라멕의 아들이 도성 바깥에서 축산업을 시작하였다(창 4:20, 아다는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동생을 폭행하여 죽인 가인의 후예들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식생활의 원리를 무시하고 도성의 폭력성을 유지하고 증대하기 위하여 가축을 도성 인근에서 기르는 축산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동물을 잡아먹는 사람은 힘이 세어져서 용사가 되어 명성을 드날리고 그의 폭력은 더욱 증대한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창 6:11).

사도행전을 보면 아무것이나 다 먹어도 좋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베드로가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부정한 동물과 정한 동물을 마구 섞어서 보자기에 담아 내려 보내셨다. 베드로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규정한 것은 못 먹겠다고 버티자 하나님은 아무것이나 다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이것은 구약성서의 음식물 규정이 율법으로서 다 폐지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으로 오해하기 쉽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진의는 무엇일까?

그 환상은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데 유대교의 율법이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 음식물 규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율법을 이방인에게 무리하게 적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방인이 먹을거리 때문에 시험에 들어서는 안 된다. 음식물 규정에 걸려서 복음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선 급한 것은 이방인의 구원이다. 사람을 일단 살려 놓고 볼 일이다.

먹을거리를 구별하여 율법을 준행하려는 마음은 이방인에게 아직 없다. 이방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하게 되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율법은 거룩한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 토라를 공부하고 깨달았을 때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게 된다. 구원의 조건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율법은 구원받은 자가 지키고 닦아야 할 수행의 길, 곧 성화의 길에 없어서는 안 될 안내자이다. 복음과 율법을 대립시켜서 구약성서의 율법을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문자적 율법주의는 둘 다 오류다.

아무튼 성경은 사람의 먹을거리에 매우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성도들은 이방인들처럼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 식도락에 빠지면 안 된다. 먹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면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여 가인과 같은 폭력자로 전락하기 쉽다. '죄의 소욕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삭이 야곱 보다 에서를 편애한 것은 에서의 영웅다운 풍모에 가문의 미래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복 형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활을 잘 쏘는 명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이삭은 유약한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함으로써 생긴 뼈저린 원한 때문에 이복형 이스마엘이 이삭을 죽이러 올 수도 있었다. 이복형에 대한 생각이 미치면 시나브로 이삭은 불안해졌다. 그러나 맏아들 에서가 용사로 성장하였다. 들판을 다니면서 사냥하는 용사로 자라났다. 한편, 이삭은 사냥꾼이 되어 짐승을 잡아 와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대접하곤 하였다. 이삭은 산짐승으로 별미를 만들어 즐기는 식도락가였다. 이삭은 육식의 즐거움에 빠져서 두 아들을 편애하는 우를 범하였다. 고기를 제공하는 에서를 집에 늘 머물러 있는 야곱보다 더 좋아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쌍둥이 아들 둘이 더욱 다투게 되었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죄를 지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아무쪼록 성도는 먹을거리를 채식 쪽으로 자꾸 옮겨 가야 한다.

동물도 채식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날짐승과 길짐승이 녹색 식물을 먹도록 창조되었다(창 1:30). 물고기들의 먹을거리는 언급하지 않았다. 식물은 길짐승과 날짐승의 먹을거리다(29~30절; 렘1 4:5; 욥 6:5; 38:27). 사람이 씨 맺는 식물을 먹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과는 달리, 동물은 '예레크 에쉐브'를 먹어야 하는데 그 뜻은 '녹색식물'이다.

지금은 맹수가 육식을 하지만, 본디 동물은 채식을 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의 죄가 증대하자 동물 중에도 육식하는 맹수들이 늘어났다. 인간이 악해지면서 악한 동물들이 생겨났고 인간은 이 맹수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말을 듣지 않는 육식동물로 인하여 죄 많은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관리인이 될 수 없게 되었다(창 1:28). 자연은 제멋대로 발달하였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자연과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가 강조한 대로 야훼의 날이 오면 육식동물이 채식을 하게 된다는 환상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것은 모든 생물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는 뜻이다. 새끼 사자를 동물원에서 기르면서 이유식으로 고기를 주기 시작할 때부터 그 사자는 차차로 난폭한 맹수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맹수가 창조의 원모습을 회복하여 풀을 먹을 수 있어야 이 피조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 문명의 죄악성을 지적하면서 미래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 도성에서 노예로 살았지만 적어도 고기는 얻어먹고 살았다(민 11:18). 그러나 광야에서는 오직 만나만 먹고 살아야 했다(민 11:6). 만나는 깟씨와 같이 생긴 곡물의 일종이었다. 광야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서였다. 세속 문명의 육식 생활에서 돌이켜 생명 사랑의 채식 생활로 바꾸고 마침내 말씀의 영식 생활로 성장하도록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 각주 설명

1) 사람의 먹을거리는 '에쉐브'와 '에츠'의 두 가지이다. '에츠'는 열매 맺는 유실수를 가리킨다. 위에서 이미 논의했듯이 '에쉐브'는 씨 맺는 곡물이나 야채를 가리킨다.

이영재 / 전주화평교회 목사·전주성경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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