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하는 교회, 투표하는 그리스도인> / 김근주, 김민웅, 김응교 등저 / 새물결플러스 펴냄 / 308쪽 / 1만 3000원
한밤중이 되어 가는 지금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본격적인 '정치 전쟁터'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2년 12월 15일이다. 지금 편안히 책을 읽으며 선거를 조망할 시기는 아닌 것 같지만, 이럴 때일수록 진지한 논의를 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진부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여전히 과격할 수 있는 내용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지금은 이미지 정치며 감성 정치며 프레임의 정치 시대다. 멈춰 서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투표하는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좌익 빨갱이'를 선택할 것이냐, '독재자의 딸'을 선택할 것이냐가 관건인 것이다.

이 책을 급히 들어 읽게 된 것은, 아직도 현실 정치의 한계가 나름의 이상 정치의 고상함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거를 '접겠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중차대한 시간에 그 귀중한 표를 접다니요! 모두 투표하세요.

본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성서에 나타난 정치 이념과 가치를 다루었다. 2부는 한국 개신교가 성서적 가치에서 이탈하고 실패한 사례와 원인을 2007년 대선을 중심으로 다룬다. 3부는 다양한 각도에서 2012년 대선에서 기독교의 '대통령' 선택에 관련한 논의를 한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진정한 '정치'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견과 공약보다는 여전히 '감정'과 '프레임' 정치에 매몰되는 것 같다. 나의 의견을 드러내거나 대화와 토론을 하거나 설득시키는 일에 낯설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정치의 '중요한 수단들'을 복음에 대한 '변절'이나 교회의 본분을 망각한 일로 여긴다. 스포츠에 정신을 잃도록 흥분하더라도 이들은 정치판에서는 이상하게 냉정하거나 차분해지기를 원한다. 엄격한 중립이나 양비론에 힘을 실어 준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노래한다. 이들의 생각은 조직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도 아니기에 설득하거나 설득되기가 쉽지 않다(보라, 김형원의 글).

구약에 대한 혐오나, 신약이 구약을 완성(혹은 폐기)했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광대함을 이야기해도 그리스도나 신약이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다. 왕정에 대한 혐오나 메시아 왕국의 영적인 국면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정치가 공평과 정의라는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의 재건은 단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서 구현될 일이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구현되기를 꿈에도 꾸지 않는 사람들이다. 구약의 리더십은 신약과 만나며,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지 않다(보라, 김회권의 글).

그리스도는 정치를 하지 않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다. 서평자는 그리스도가 정치를 하지 않았으나, 정치(가)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생활 혹은 교훈의 이념은 구약의 정치 이념과 다를 것이 없다. 앞서 말했듯이, 정의와 공평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의와 공평이 구약 율법의 이념이며 구약 정치의 이념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그는 기존의 타락한 정치와 단절하였으며 그들과 대결하였고 (세상 정권과 대결하는) 하나님나라를 오게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나라는 (여전히) 오고 있다. 예수는 잊히고 냉대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들로 회복시켰고 그들을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으로 삼았다(보라, 차정식의 글).

이 책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바울과 사도들과 요한계시록에 있어서의 정치 신학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의 '목회' 신학을 중심에 두고 구약과 복음서를 억압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바울은 인류의 보편적 타락과 범죄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 신학을 강조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나머지 책들을 등한히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나머지 책들을 무효라고 선언했던가? 아니다. 아울러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자신이 돌보던 교회들의 다양한 문제에 응답하고 돌아보는 일에 몰두하였다. 바울은 다가오는 로마제국과의 전쟁에 몰두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처절한 영적 전투를 요한계시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넘어가자.

2007년에 우리는 왜 실패하였는가? 기본적으로 여당(당시에는)의 인물난 혹은 작전 실패가 가장 클 것이다. 또한 기독교가 어떻게 이명박 승리에 사용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승리는 사실 미국 공화당의 승리의 2편 정도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일제나 이승만 정권 이후로 그 생명을 유지하던 기독교 '우파' 운동이나 '머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고지론이 먹혀든 것이다.

더 나아가 교회의 애국주의(우리가 나라를 지키고 수호해야 한다)나 좌익 빨갱이 프레임(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적이며, 북한의 남한 적화 야욕의 수단으로서 남한의 많은 사람이 이용되고 있다)이 먹혀들었다. 이와 같이 '미국과 같은' 왕을 세우는 데 성공한 한국 보수 기독교는 지속적으로 이명박 정권을 옹호하고 '노무현'으로 대변되는 민주 진보 세력들에게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국민과의 대화의 창구를 막아 버렸으며, 반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작업을 수행하였고, 기존의 수구 언론들과의 연대와, 기존 공적 언론들 수구화, 사유화하는 등의 지속적인 작전을 통하여 2012년 대선에까지 이르렀다(보라, 양희송, 김지방의 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은 촛불에 이어 나꼼수를 통해 표출되었다. 그들은 기존 정치, 언론, 사회, 문화, 심지어 기독교에 대한 맹공을 퍼부었고 그에 대한 커다란 공격에 직면했지만, 결국 여전히 무릎을 꿇지 않는 채로 남아 있다. 촛불시위와 산발적인 저항도 시들할 무렵, 희망이 좌절될 무렵, "씨바, 쫄지 마"로 무장한 무리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을 지지하는 다양한 조직들 앞에 '희생염소(scapegoat)'로 자임하였다. 결국은 김용민을 국회의원 후보로 내세우는 '무모함'이 실패로 (유일한) 좌절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그들은 큰 목사님과 잘못된 '일부' 교회들에 대한 칼날을 멈추지 않는다(보라, 최규창의 글).

우리가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재집권하거나 그의 부활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여러 가지 실책 가운데서는 그는 '따뜻한' 소통과 참된 민주화와 '대결 없는' 남북 화해의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노무현 현상이나 안철수 현상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문재인' 현상이 빈약해서 이번 선거가 더 힘겨웠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 딸' 신드롬은 일찌감치 폐기했어야 할 카드라는 점에서, 아직도 사용된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실 생각해 보자!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유사성의 기차의 끝 칸에 올라타려는데, 또 다시 박정희의 딸이라니! 물론 우리는 지금 새누리당 정권을 심판하는 자리지,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는 자리도 아니다. 우리가 박정희를 떠올리는 것은 많은 사람이 그녀를 박정희의 딸로서 대통령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며, 그녀가 이명박이 세운 터 위에서 여전히 박정희의 그늘에 안주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원칙론이지만, 지금이라도 입후보자들의 정책을 꼼꼼히 잘 살펴보고 선거에 임하기를 바란다. 이 책의 값어치는 저자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행동해야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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