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은 끝났는가?> / 마크 A. 놀, 캐롤린 나이스트롬 공저 / 이재근 옮김 / CLC(기독교문서선교회) 펴냄 / 448쪽 / 2만 원
본서는 정통, 혹은 보수적 천주교나 개신교인 모두에게 불편한 제목과 역사를 담고 있다. "종교개혁이 끝났는가"라니?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교에 전쟁을 선포한 이후로, 성경의 적그리스도가 교황이라고 부른 이후로 양자 사이의 전쟁의 포연(砲煙)은 그칠 줄 몰랐다. 지금도 종교개혁의 (일부)후예들에게 신학적 자유주의냐 신비주의 체험보다도 가장 증오스러운 것은 에큐메니컬 운동이나 로마가톨릭에게 호의(好意)를 보이는 것이다. 아직도 이들에게는 개신교내의 그러한 태도조차도 변질이며 반역이며 타락의 결정적인 증거로 보이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호전적인 입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책만 해도 내가 알기로 10여 권에 다다른다. 그와 같은 태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본서가 말하는 전환적인 태도도 필요하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 책은 양자 사이의 정치적 합의나 본질적 타협에 관한 책이 아니라, 500년의 기나긴 대립을 넘어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50여 년의 갈등과 접촉과 협력을 통해 나타난 양자 간의 대화와 상호 확인에 관한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은 근본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로마가톨릭이라는 다양한 배경 속에서 자라고 학문을 키워 왔던 미국 교회(기독교)사학자 마크 놀을 통해서만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종교개혁의 목적이 무엇이었는가?" "양자 사이의 불화의 원인과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양자 사이의 오해 해소와 화해(혹은 대화)의 근거(혹은 수단)는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한가?"

본서는 9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옛날 같지 않다')은 현대에 양자 사이에 존재하던 적대감의 깊은 골에 이상이 생겼다는 점을 알린다.

2장('분열의 역사')에서는 20세기 초에도 있었던 양자 사이의 분열과 갈등과 불신의 역사를 다룬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독재(로마가톨릭)나 민주(개신교)냐의 중요한 정치 체계적 기초에 대한 깊은 불신도 반영한다. 당시의 유럽이나 남미의 경우와는 달리, 미국의 개신교가 갖고 있는 로마가톨릭에 대한 불신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표준적 미국인은 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도라는 점이 갖는 정치적 함축을 생각해 보라. 이 말은 주류 미국인은 흑인도 아니고 가톨릭교도도 아니고 히스패닉도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다는 말이다. 1960년대에 나온 로레인 뵈트너의 로마가톨릭에 대한 책도 그들의 교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적 불신을 가감 없이 드러낼 정도다. 앞서 말한 대로 양자 사이의 깊은 간극의 기원은 적어도 500년 이전으로 돌아간다. 개신교에서는 그 기원을 예수, 바울에게까지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양자가 예수, 바울,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신들의 종교적 원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3장('왜 상황이 변했는가?')은 1950년대 이후에 발생한 상황의 변화를 다룬다. 그것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망라한 교회 내부의 변화와 교회 외부의 변화인 것이다. 가톨릭의 교회적 변화는 바티칸 II와 은사주의 운동이다. 기독교 간의 변화는 사회적, 혹은 전도의 공동적 목표를 위한 연합의 기회와 여성의 지위 향상이 있다. 사회적 변화는 가톨릭 출신 케네디의 대통령직 당선과 성, 국가 방위, 경제 등과 같은 기독교적 공공선의 함양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에 있다.

이후의 장들(4~8)은 양자의 접촉과 대화의 과정과 결과들을 다룬다.

4장('에큐메니컬 대화')은 바티칸 공의회 II 이후에 동방정교회를 포함한 다양한 기독교들과 대화한 사례를 다룬다. 성공회의 경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극복하는 '성공적인' 합의문을 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감리교, 오순절교회, 개혁교회, 루터교,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일단의 복음주의자들, 침례교회 등과도 대화를 나누었고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이들은 그들 사이에 여전히 존재하는 중대한 차이점들이 있음을 여전히 인정하였고 그럼에도 동의하거나 인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저자들이 본서의 6장('복음주의-가톨릭연대')에서 자세하게 다룬다. 이러한 대화의 노력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분들은 꼭 이 책을 읽어 보시길 바란다.

5장('가톨릭 교회교의서')은 가톨릭교의 최근 신학적 입장을 보여 주는 교회 교리서의 중요부분을 발췌한다. 가톨릭교는 교황 중심의 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곧 교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입장이 바뀌면 그게 곧 그들의 공식적인 입장의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 이 속에는 분명한 차이도 있고 분명한 일치(혹은 유사)가 있다.

7장('반 응: 적대에서 개종까지')에서는 그러한 접촉과 대화와 협력 가운데 발생한 '적대, 비판, 협력, 개종'의 현상들을 다룬다.

8장('미국사와 가톨릭교회')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정치적 적대감의 완화와 해소, 연합 전선 구축의 필요성의 문제를 2장에 이어서 다시금 다룬다.

9장('종교개혁은 끝났는가?')은 양자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그럼에도 개신교가 재고해 볼 것은 없는지를 찾는다. 저자들은 동방정교회, 서구 로마가톨릭, 복음주의 개신교, 오순절 주의를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각 시대의, 각 지역의, 각 언어의 기독교들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그 차이와 갈등 요소들을 "죄로 가득한 오류나 실수, 힘의 행사로 보기보다는 역사적 상황과 더 연관성이 큰 것"으로 여긴다(398쪽).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양자가 '서로 참여와 대화와 협력에 이르는 문'을 열고 더 많은 개혁과 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희망은 없는가? 이 책이 나온 이후에도 전혀 만남이나 대화나 연구조차도 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적대감과 불신과 비방, 심지어 정죄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본서는 우리 상황 속에서는 오히려 '강 건너 불구경'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사례에서 배울 것이 많다. 교리적 차이에 대한 극단적인 적대감의 약화와 사회적 도전과 문제에 대한 범기독교적 대응과 상호 개종의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대, 비판, 협력, 개종'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독자들이 본서를 주의 깊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들이 언급하듯이(91쪽), 사실 양자 간의 교리적 불화는 이미 오래전에 해결될 기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1541년의 레겐스부르크 공의회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대표들 간에 내려진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에 대한 합의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죄인 구원의 유일한 기반이지만, 동시에 의롭게 하는 믿음을 사랑의 선행에서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합의다. 물론 합의는 당사자들의 주장이 공유될 만한 포용적이고 함의적인 선언문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 자체는 그만큼 합의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쉽게 결렬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미 '일시적인 합의'가 영속적인 평화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 우리가 체험하고 우리가 본서를 통해서 읽어 보듯이, 500여 년의 분열의 역사는 쉽게 해소되거나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들의 주장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배우고 대화할 일은 필요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의 후예 혹은 기독교의 적통자로서의 '진정한' 자부심은 단순히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편견 혹은 비판과 우월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우리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냄으로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형식주의, 인간 중심적 예배, 권력 투쟁, 독단적 자기중심주의, 즉 개신교인이 수 세기 동안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그토록 분명하게 목격한 이런 폐단이 오늘날에는 개신교 복음주의 내부의 모든 면에서 번성해 있다(408~9쪽)."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