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교회는 엄밀하게 말해서 미국제 시장경제적 자본주의와 서유럽적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의 대결의 장이다. 돌아보면,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가난했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조하며 신앙과 인내로 현세를 견디면 내세에 복을 받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교회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정책과 맞물려서 그칠 줄 모르는 수적 성장에 몰두하였다. 이와 같은 경제적 성장과 물질적인 풍요, 그리고 그와는 반대로 깊어가는 사회적 어두움과 자연적·인위적·이데올로기적 갈등에 따른 세기말적 징조들은 1980년대의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황당무계한 종말론 신드롬을 나았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내세지향주의적 반응과는 반대로 70~80년대에 보수적 한국교회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독재정권들의 비호하에 극단적인 현세지향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가에 의해서 핍박을 받거나 암묵적으로 굴종하던 한국교회는 민주화 이후에 킹메이커로써 자본주의와 냉전이데올로기의 유지와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서만 우리는 한국교회의 경제 윤리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없다?

사실 수십 년간 현세 복음이 전파되었고 수많은 신도들이 그 축복의 복음의 주문(呪文)을 따라 행했으나,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은 IMF와 지속적인 경기 침체, 그에 따른 비정규직 양산이다. 그동안 수많은 신도들이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저주를 회피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에 쏟아 부었던 그 돈은 어디로 갔을까? 하나님은 신도들의 열심을 보셔서라도 한국교회의 머리가 되는 백성이 부자가 되는 국가로 만들어주셨어야 했는데…. 현세의 축복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쯤 하나님은 ‘하늘의 보화 창고’를 열어서 복을 있는 대로 넘치도록 쏟아 부어 주셨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이와 같은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취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못하는 이유로 좌파정권 탓을 하거나 한국의 우상숭배와 죄악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더 열심히 십일조와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그러한 문제들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한 불신앙 탓으로 여기고 여전히 예배자의 열심과 참여를 독려하기도 한다.

해결책은 다른 곳으로부터…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경을 보는 눈은 두 가지가 있다. 사회주의적으로 읽는 눈과 자본주의적으로 읽는 눈이다. 구약에서 십일조에 대한 구절 말고도 한국교회의 축복의 복음을 자본주의적으로 지지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부분들은 주로 창세기의 족장들(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과 신명기·욥기 그리고 솔로몬이다. 한국교회는 이들이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 사람들은 복의 종착점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수고한 만큼 받고 또 넘치도록 받는 것이 한국교회판 ‘미국식 시장경제적 자본주의’다. 게다가 이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시장경제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교회에게 자유·평등·분배(복지)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이며 공산주의자들이나 좌파들의 허망한 놀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반대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초대 신앙 공동체의 경제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경제관: 성령의 부어주심의 결과

이들은 사도들의 교훈, 교제, 떡을 떼는 것(식사), 기도에 전념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당시에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었으며,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서 공적 예배와 증거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모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의 모임은 ‘물건의 공유와 분배’로 특징 지워진다(행 2:44~45; 4:32~37). 사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중심적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중심적 공동체로 전환하였지만, 그들은 구약(예, 출 16:18; 신 15:7~18)으로부터 비롯되는 공동체내에서의 (물질적)교제의 정당성에 대해서 여전히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초대교회에서는 기적과 치유의 은사가 기도원의 은사 집회에 몰두하게 된 것도, 예수의 부활의 증거가 교회당 건축에 집중된 것도, 그들이 복을 많이 받아 떼부자가 되거나,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라는 증거가 되거나, 성직 매매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직 자발적인 헌신의 표로써,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성도 간에 행해진, 즉 부유한 성도가 가난한 성도를 돕는, 물질적 교제(코이노니아)가 원활해졌다. 이러한 공동체적 특징은 교회에 임한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제적인 예증으로써 언급된 바나바는 그가 일시적으로 구제와 교제의 헌금을 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자비량으로 선교 여행을 다녔던, 사도 바울과 함께 교제 헌금을 모금하고 전달하였던 사람으로 묘사됨을 볼 때, 공동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도 그의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경제관(고후 8~9; 고전 16:1~4; 롬 15:25)

사도행전에서의 물질적 교제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되었고, 바울의 경우에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를 돕는 이방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공동체의 영원한 진리로 자리 잡는다. 나눔의 정신은 바울신학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같은 일은 바울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다(갈 2:10; 행 11:27~30). 그것은 구약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고후 9:12)이기도 하다. 바울에게는 가난에 처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재정적으로 돕는 이 봉사의 나눔이 권리로 여겨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권을 본받음이며 이러한 가난해짐은 그리스도의 가난해짐을 본받음이었다. 즉 나눔은 단순한 공유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섬김은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역(즉 세 번째 선교 여행)의 완수가 지연되고 있어서 로마에 가는 날이 지연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사역이란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형제들과의 교제의 섬김(사역)이었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역(섬김)이 끝나야 바울은 로마로 가서 기독교인들과 신령한 복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것이다(롬 1:11).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질적인 섬김(교제)은 자발적이며 복음전파의 기반이었고 세계동포주의적이며 가난한 자의 궁핍을 경감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기독교의 한계를 보다

현시점에서 볼 때, 세상 구조의 악함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삶과 재물을 귀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의 재림만을 고대하는 내세지향주의가 잘못된 점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선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사악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도 아울러서 비판해야 한다. 사실 세상의 구조 속에서 우리의 변별력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신앙을 고백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같은 신앙고백과 성령의 인도를 국가나 사회나 이데올로기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빠져있다. 신앙고백과 성령도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이기적인 목적하에서 이용되고 있다. 축복지상주의는 하나님과 성경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권력과 이데올로기도 쉽게 포용할 수 있게 만들며 더 나아가 성경의 가치인 자유·평등·정의·분배도 악한 것이라고 매도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일은 ‘온전한’ 복음에 착념치 못함의 결과이며 자본주의적 기독교의 한계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다.

성기문/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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