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리적 전쟁을 요구하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도 물리적인 전쟁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오늘의 논쟁거리다. 근본주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에게 물리적인 전쟁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기독교 역사상 등장하는 두 가지 전통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들의 기원은 각각 구약과 신약이다. 우선 전쟁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전통 주장을 생각해보자.

▲ 이스보셋의 전사와 다윗의 전사들 사이의 싸움. <뒤레 판화성경>. ⓒ뉴스앤조이
정당한 전쟁, 기원와 발전

주후 4세기 이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이방 로마가 기독교화 되고, 군대의 힘으로 이교도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정당한 전쟁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당한 전쟁은 합법적인 권위에 의한 전쟁 명령은 때로 불가피하며 전쟁이 허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러한 측면에서 전쟁은 악을 제거하고 선을 증진시키는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필요악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개념은 이단 집단들을 제거하고 성지를 회복한다는 수차례의 십자군전쟁을 통해서 구현되었다. “야훼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며 자기의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렘 48:10)라는 말씀이 유태인들과 이슬람교도들, 심지어 동료 기독교인들을 학살하는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십자군전쟁의 이념들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에서의 전쟁이나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확장에서도 차용되었으며 심지어 1, 2차 세계대전 시에도 연합군들 중 미군에 의해서 흔하게 사용되었다(예, 몬트거머리 장군이 노르만디 상륙작전 때 사용함). 최근 들어서는 1, 2차 걸프전쟁에서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 대해서 선제 공격을 수행하였던 부시와 그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 지지층들에 의해서 애용되었다. 구약성경을 애용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즉 정의의 편)에 서서 악인을 응징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소명을 받았으며 그에 응답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들을 하나님의 전쟁으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과 공격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철저하게 방어적이며 필요악적인 정당한 전쟁론은 최근에 변화를 맞았다. 이러한 극단적인 전환이 초래하는 모호성과 위험성을 최근에 개봉된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Pre-Crime Unit의 한 일원이었다가 예언자들의 조작된 예언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는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의 불길한 예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이후에 현실화되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복음주의자 챨스 콜슨의 '선제공격론'이 게재된 직후에 부시 대통령은 '실제로' 그러한 이론을 이라크에 적용하였다. 그 이전에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선제 공격한 이후에 행해진 전형적인 정당한 전쟁의 패턴을 취한 것이라면 이제는 다른 전략과 방법론을 취한 것이었다. 찰스 콜슨의 주장은 정전(正戰)의 개념이 수동적이고 보복적인 전략에서 적극적이고 선제 공격적인 방법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를 예로 들어서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전에 그를 제거하였다면 그 큰 희생과 공포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제2의 히틀러는 이라크의 집권자 후세인이었다. 그러나 과연 후세인이 제2의 히틀러였는가? 그는 (부시의 주장대로) '숨겨진 대량 살상 무기'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던 존재였는가? 그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폭압의 전제군주였는가? 부시가 장담하던 이 전쟁의 목적이 그리고 이유가 명확히 실현되고 밝혀졌는가? 결국 부시의 주장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사실 1, 2차 걸프전쟁 당시 미국의 실제 목적은 △중동에 군사 기지 확보 △미국 경제의 활성화 △석유 획득이었다.

구약의 전쟁관

구약의 전쟁관은 "전쟁이 야훼께 속했다"라는 표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삼상 17:47). 그러나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말에는 "야훼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라는 부연 설명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물리적인 전쟁도 제의적이며 제한적이라는 점(모세의 출애굽에서 솔로몬 제국의 확장까지)과 하나님의 전쟁 대상이 항상 가나안 족속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진멸 대상이 종종 이스라엘 자신이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는 것이 야훼의 전쟁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사실 전쟁이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국가 간의 일상적인(?)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서 행해진 독특한 전쟁관은 하나님이 직접 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에 따라 수행되었지 인간의 계획과 방법에 따라서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전쟁에 참여하였고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불신이 아니라 충실하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졌다. 즉 전쟁의 대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이며 전쟁은 그에 대한 정당한 심판의 도구로 여겨졌던 것이다. 

신약적 차원에서의 전쟁 문제

이와 같이 제한적이며 독특했던 구약의 전쟁관은 신약적 측면에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갖는다. 우선 연속성을 살펴보자.

신약성경은 두 가지 면에서 구약의 전쟁관과 연속적이다. 신약은 신자들에게 '영적' 전쟁(윤리적·비폭력적·대안적)을 행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여전히 전쟁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역사적·폭력적인 전쟁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선지서와 묵시문학에서 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이며 종말론적인 전쟁이 예견·수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내에서 그리고 역사 밖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전쟁은 결국 하나님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들의 직접적인 관여가 배제된 채 이 선악간의 전쟁이 계속해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은 종말의 징조로 이해되었다. 신약에서도 풍부한 군사적 심상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영적인 영역에서의 현재적인 전투로 묘사된다. 특히 계시록에 있어서 묵시론적 전쟁의 심상이 많이 사용된다.

구약과 신약에서 전쟁관의 단절은 사실 예수로부터 발견된다.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는 예수 사역의 시작 자체가 '신원의 해'라는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하나님이 비폭력성과 온 인류의 복지에 관여하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파괴하고 죽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오셨다. 로마서에서처럼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나중의 심판을 위해서 지금 내어버려 두셨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종말론적·묵시론적 심판 전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예수의 평화주의와 희생 그리고 사랑의 정신은 복음서에서 잘 발견할 수 있으며 첫 3세기 동안의 기독교는 평화를 사랑하고 핍박으로 인해서 희생을 당하는 입장을 취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심판적·구속적 혹은 거룩한 폭력에 관하지 않으신다. 게다가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모세의 법과의 대체 혹은 폐지의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마태복음 26장 52~54절은 전쟁 도구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므로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쟁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논의 속에서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여호수아서는 물리적 전쟁의 토대로, 혹은 영적인 전쟁의 토대로, 심지어는 윤리적 전쟁의 토대로 혹은 리더십이나 고지론적 텍스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평화주의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여호수아서와 야훼의 전쟁 신학이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우선적으로 평화를 확보하고 유지할 뿐만 아니라, 침략적 전쟁을 부인(否認)해야 하며 평화의 회복과 윤리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평화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성기문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