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 부교수로 떠나는 강남순 교수. ⓒ뉴스앤조이 주재일
결국 강남순 교수가 한국을 떠난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남아달라고 할 때도 한국으로 돌아온 그였다. 미국유학시절 네 가족이 가지고 있었던 미국영주권을 한국에 귀국하던 해 바로 포기하고, 두 아들도 군대에 보냈다. 숱하게 국제대회에 참여하며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있었지만, 강 교수는 그때마다 돌아왔다. "한국에서, 감리교에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소명으로 알았다"면서. 그런 강 교수가 초빙교수라는 비정규직으로 일한 자신의 모교 감신대와 3년 가까이 성차별 문제로 싸우더니 돌연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Texas Christian University) 부교수가 되어 올해 6월 출국한다고 알려왔다.

감신대는 "부부가 모두 전임교수가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강 교수를 2004년 재임용에서 떨어뜨렸다. 강 교수의 남편 박충구 교수는 감신대의 전임교수다. 강 교수는 "나를 여성학자라는 독립된 주체로 보는 게 아니라 한 남자 교수의 아내로 보는 가부장적 대우"라며 감신대의 결정에 맞섰다. 강 교수와 학생들은 '학점 없는 강의'를 1년간 열었다. 학교가 교실문을 잠그면 휴게실 한쪽에서 강의하는 날도 많았다.

사건은 감신대와 감리교를 넘어 교계와 여성계로 번졌다. 여성운동가들과 여학생들은 감신대를 성차별 대학이라고 비판하며 강 교수를 거들어 '투쟁'했다. 2년 가까이 매주 목요일마다 집회와 기도회를 열었다. 기자회견도 여러 차례 열어 강 교수의 복직을 촉구했다. 이럴수록 감신대와 강 교수의 관계는 더 싸늘해졌다.

지난해 3월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강 교수 재임용 탈락은 '가족 상황에 의한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강 교수는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갈거라 기대했지만, 감신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복직하고 싶으면 사회법으로 해결하라고 강 교수를 압박했다. 그러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 나섰다. 민변 공익위원회가 감신대의 강 교수 임용 탈락을 공익을 해치는 문제로 보고 무료로 변호하겠다며 법적인 싸움을 하자고 제안했다.

"국가인권위가 도덕적 판결 내렸다"

지금까지 싸운 것보다 오히려 더 길지도 모르는 기나긴 법정 싸움을 앞두고, 강 교수는 훌훌 털고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감신대에서는 임기 2년의 계약직 초빙교수 자리도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쫓겨났는데, 미국에서는 그를 원할 때까지 가르칠 수 있는 전임교수로 부른 것이다. 국제 행사에 마음대로 참여할 수 있고, 그 때마다 경비를 학교가 지원하는 좋은 대우다. 또 이 대학은, 강 교수가 조교수부터 시작하는 관례를 깨고 부교수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요구에도 흔쾌히 승락했다.

자기 문제로 여기고 함께 싸워준 학생과 여성운동가, 변호사와 목회자까지 수많은 지지자들을 뒤로 한 채 미국으로 떠나는 강남순 교수. 감신대 교수실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강 교수를 5월 24일 만났다. 조그마한 교수실은 책장이 이미 빠지고 책들이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어수선했다. 그의 마음도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까 싶었다. '좋은' 대학에 '좋은' 조건으로 일하게 된 일로 기쁜 마음이 드는 동시에 지지자들의 바람을 뒤로하고 떠나는 미안함으로 혼란스럽지 않은지 궁금했다. 강 교수의 답은 오히려 시원하고 명쾌했다.

"어떤 분들은 법정에도 서서 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학교가 전혀 사과하지 않는데 여기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더 많은 분들이 이미 승리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학교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실력이 낮아서 떨어뜨렸지 성차별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저는 더 좋은 대학에 더 좋은 조건으로 갑니다. 지인들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보다 더 통쾌하다고 했습니다. '거 봐라. 너희들 말처럼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지 않느냐' 이겁니다. 감신대에 대한 도덕적이고 공적인 판결은 이미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렸습니다. 감신대 주요 교수들은 국가인권위원회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아 여성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실체는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감신대가 최소한의 상식을 지킬 줄 알았다"

▲ 강남순 교수는 미국에서도 중세적인 사고방식과 싸우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강 교수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만이 아니라 여성이면 누구나 겪을 차별이어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도 더 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전히 맴돈다고 했다. 마음이 이렇게 흔들릴 때 지인들이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더 창조적인 곳에 에너지를 쏟으라"며 그의 등을 밀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강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한 감신대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강 교수는, 감신대는 진보적인 학풍을 자랑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받고도 성차별적 행동을 성찰하지 않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실력이 없어서 떨어뜨렸다고 말한 것에는 학자로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감신대 면접위원들은 객관적 평가항목(학력·경력·연구실적·공개강의 등)에서는 다른 지원자들과 비슷한 점수를 부여했으나 주관적 평가항목(교회생활·학문적 자세·인격·품성)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부여하여 강 전 교수를 불리하게 대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강 교수는 "최소한의 상식을 지킬 줄 알았다. 나를 잘 아는 동창과 선후배가 채점을 했는데 학자로서의 자세와 품성에 대해 그렇게 평가하며 나를 떨어뜨릴 줄 몰랐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한국을 떠나기 전 자신과 함께 싸운 사람들과 이들과 3년간의 일을 정리하는 모임을 열 생각이다. 강 교수 자신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다. 강 교수는 감신대와 교계의 가부장적 시각부터 지적했다.

"강남순을 독립된 학자로 평가하지 않고 전임교수의 아내로 보는 가부장적 시각이 문제였습니다. 부부가 전임교수이면 학교의 각종 회의에서 권력의 불균형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교계에서도 한정된 파이를 한 집에서 너무 많이 가져간다는 식의 가족이기주의라고 평가했습니다. 실력이 없다는 것은 쫓아내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함께 싸우던 학생들이 희망"

강 교수는 자신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건이 여성운동이 진보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는 평가도 내렸다. 특히 함께 투쟁하던 학생 중 3명이 작년에 유학을 떠났으며 지금도 여러 명이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때로는 강요에 의해, 때로는 자기 성찰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독립된 주체로 보는 시각이 조금은 성숙했으리라 기대합니다. 지금 당장 드러나는 열매가 없지만 변화의 조짐은 보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와 부딪히다가 소명을 품고 유학이라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희망입니다."

강 교수와 함께 싸우던 학생들은 어렵게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시위한 게 지도교수의 눈밖에 나 추천서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강 교수와 강 교수의 남편인 박충구 교수가 추천서를 써 줘 유학 길에 올랐다. 시위와 기도회에 참여한 학생은 물론 여성 목회자나 학자들도 교계 내에서 은근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했다. 강 교수는 "그들이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보기 힘들고 한없이 빚진 마음이 듭니다" 하고 말했다.

또 강 교수는 자신과 함께 싸운 이들 덕분에 학자로서는 맛보기 힘든 경험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나는 펜으로만 일할 줄 알았지 온몸으로 부딪힌다는 게 어떤 것인지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심정을 내 삶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강 교수는 자신이 시위하고 있는 현장을 냉담하게 지나가는 동료 교수들을 보며 모멸감도 느꼈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격려하며 함께 나설 때는 연대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뼛속 깊이 깨달았다고 했다.

강 교수는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에 교수 임용 인터뷰를 하며 겪은 일을 감신대와 비교하며 한국의 신학 풍토를 꼬집었다.

"미국이 교수 한 사람은 뽑기 위해 여러 차례 검증을 거칩니다. 서류전형에서 합격한 뒤 교수들과 인터뷰를 하고, 총장과 부총장과의 인터뷰는 물론, 학교에서 이틀을 지내며 식사시간까지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교수들이 돌아가며 나를 찾아와 인터뷰합니다. 내가 교수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유심히 보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나의 교육 비전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참석자들은 내 주요 논문을 복사해 가지고 있었고, 어느 교수는 내가 논문에서 인용한 책에 대해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교수를 위해 녹음하는 교수까지 있을 정도로 꼼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했는지, 남편이 누구인지, 내가 미국 오면 자녀들을 어떻게 사는지 등 사적인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묻는 게 불법이랍니다. 대신 그들은 내 학문적 지향과 고민, 깊이 등을 물었고, 학교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족 문제로 시달리다보니 그들의 태도가 신선했습니다. 내가 합격하자 교수들에게 나와 함께 일하게 돼 기쁘다는 전자우편을 여러 통 받았습니다. 내가 이사하는데 도울 일은 없는지 물어오는 교수들이 많습니다. 오랫동안 지낸 교수들과도 동료의식을 느끼기 어려웠는데, 불과 며칠 만난 사람들에게 동료로서 애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