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과상황 신철민
요즘 한국교회가 ‘전쟁의 하나님’과 ‘평화의 그리스도’의 대리전(代理戰)을 치루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한국사회의 첨예한 갈등의 연장이거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보면, 이 문제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 사람들의 ‘양심적’ 병역거부문제나 미국 주도의 이라크 파병이나 대북강경대응문제와도 연관되어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는 신구약의 정경적 문맥 속에서 얼마나 균형 있고 포괄적으로 해석하여 그 결과물들을 건전한 현실이해 속에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구약전체에 전쟁의 개념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런 평화사상은 성경에서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발견되는 편이다. 생각보다도 구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편견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하나님이나 동일하게 우리에게 전쟁을 요구하신다. 이 말을 듣고 놀랄 사람들도 있지만, 안심하시라.

구약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

구약의 하나님은 특히 창세기를 제외한 오경과 여호수아서에서 역대기(물론 룻기는 제외다)까지 신자들에게 ‘물리적 군사적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시거나 그러한 전쟁을 묵인하고 계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야웨의 전쟁 혹은 성전(聖戰)이라고 부르는 전쟁에 하나님이 신자들을 하나님의 군사들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정당성과 합법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여기서 논의할 공간이 부족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구약의 전쟁도 고대근동의 문맥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구약의 물리적이고 군사적인 전쟁의 목적은 실제적일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측면에서 죄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 컸다. 이와 같은 죄에 대한 심판은 가나안 족속들뿐만 아니라,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주위나라들의 무력에 의해서 징벌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전통이 기독교역사속에서 발견된다. 우선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전통(이러한 문자적 해석의 전통은 서구제국주의나 미국이나 한국교회에서 발견되는 기독교근본주의, 혹은 회교근본주의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도 있다. 이들은 악의 무리와의 전쟁을 실제 물리적 군사적 측면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구약의 전쟁에 현재적 적용은 하나님을 따르는 선한 무리들과 하나님을 반대하는 악한 무리들과의 싸움으로 쉽게 비화된다. 이러한 전통은 특히 세계적인 혹은 국지적인 전쟁이 수행될 때 그러한 개념을 담고 있는 성경구절들이 자주 애용되어 부활하곤 했으며 최근에는 이라크 침공과 관련하여 한국의 많은 보수교회와 단체들과 미국의 부시 정권이 주 고객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상에 대하여 신약적 관점에서 ‘영적인 전쟁’, ‘윤리적 전쟁’ 심지어는 평화주의적 입장에서의 해석하려는 다양한 전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영적 전쟁’이라고 함은 하늘의 권세 잡은 사탄과 마귀와의 전쟁을 말한다.

이러한 전쟁은 기도회나 기도원에서 수행되기도 하고 모 선교단체처럼 선교지에 가서 ‘땅 밟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소위 반(反)기독교적 문화에 대한 ‘문화적’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윤리적 전쟁’이라고 함은 의와 불의와의 전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들의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종말론적 혹은 묵시론적 사상의 지원을 얻게 되거나 그러한 세력들의 척결차원에서 공권력과 야합하거나 폭력을 용인하는 차원에까지 비화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서 신자들에게 부과되었던 이와 같은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그리고 실제적인 전쟁의 부르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수행하도록 요구하시기도 했지만, 그것이 온 세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영원한 원칙으로 주어지지는 않았다. 이스라엘 국가를 통한 하나님의 신정정치가 끝났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시대도 세상 속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손을 빌려서’ 이웃국가들과의 전쟁을 하심으로 죄를 징벌하고 의를 세우시고 역사를 인도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이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된다. 기근과 질병과 지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전쟁의 중지)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최후승리의 징조로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평화의 초석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쟁관은 더 나이가 역사 저편에서 행해진 선과 악의 최후의 전쟁을 언급하는 묵시론적 이해에까지 이르게 된다.

신약의 전쟁과 평화사상

신약의 하나님은 그러한 전쟁(즉 물리적이며 군사적인 전쟁)에 참여하도록 신자들을 결코 소환(召喚)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말론적 묵시론적 측면에서 “죄와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의 전쟁에 소환되며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벌일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죄와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이 실제적인 우리의 삶과 사회 경제 정치적 구조와는 무관한 것인가? 이러한 싸움은 단순히 기도회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신약에는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의 신앙공동체의 윤리에 대한 교훈이 있다. 예수의 교훈에 따르면 신앙공동체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론은 세상과 동화되지는 않으나, ‘세상에 침투하는’ 신앙공동체가 있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 영원한 긴장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세상에 침투하는’ 신앙공동체에 대한 오해가 있다. 절대적인 평화주의와 같은 단일론도 있지만, 극단적인 이원론도 있다. 이들은 예수의 희생과 사랑과 용서의 윤리를 개인화 혹은 신앙공동체내에서만 적용하며 정의와 평등과 자유의 문제를 (비기독교적인) 사회적 국가적 문제로 본다. 이것을 일종의 ‘기독교현실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기독교적 원칙들이 비기독교적 사회나 국가에 ‘강제적으로 실행되도록’ 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소위 기독교국가에서나 기독교가 득세(得勢)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유혹이 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죄’와의 전투에로 소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공동체를 넘어서는 사회와 국가적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죄를 미워하고 죄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자기희생과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계신다.

그러나 이 세속적 국가와 제도와 구조는 오히려 우리의 ‘고귀한’ 덕목에 저항하며 우리를 죄악으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선적인 방법론은 우리의 자발적이며 일관되며 자기희생적인 측면에서 정의와 평화의 삶을 통해서 세상 속에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위험한’ 외줄 위에서 줄타기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 속에 이와 같은 ‘각성케 하는’ 긴장감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성기문 / 말씀발전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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