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셨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모두 예수께로 나아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셨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하여 예수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시니 그들이 계속해서 예수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일어나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그러자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떠났고 결국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사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자 그녀가 대답하였다.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너는 네 길을 가고 지금부터는 죄를 짓지 말라.”(요 7:53~8:11)

이 구절만큼 소설화(?)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좋은 안주거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예수가 땅에 무어라고 썼을까에 대한 것이거나 여기 등장하는 여인이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인가에 달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무의미한 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돌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의 죄명을 쓰고 있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쓰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은 단순히 모호할 뿐이다.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은 동일시는 후대에 등장할 뿐이다. 게다가 ‘모이큐에인’(간음하다)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듯이 그녀는 기혼녀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과 관련해서 우선 고려되어야 할 문제는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에 관한 것이다. D사본 이외에는 신약사본의 초기 증거들이 이 단락의 존재를 입증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대의 사본전통에서도 요한복음에서 7장 36절이나 44절 이후에 붙어 있기도 하고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있거나 누가복음 21장 38절 이후에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본문상의 혼란과 아울러 이 단락의 문체적 특징은 요한복음의 문체보다는 공관복음서와 더 잘 어울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일종의 고아단락(orphan passage)으로 여겨야 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후대에 현재의 요한복음의 이 자리에 삽입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락이 고대 전통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본문의 역사성과 진정성이 부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받은 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난해한 사례를 제시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가 지금까지 전했던 사랑과 용서의 교훈과 기존에 유대인들이 금지옥엽으로 믿어왔고 지켜왔던 모세율법의 준수 여부와 관련하여 예수를 곤궁에 빠뜨리려고 했다고 보았다. 정의냐 사랑이냐. 독자들 중에서 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예수는 공관복음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마 16:1, 막 8:11, 눅 11:16),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모세의 규례와 이혼문제”(마 19:3),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제기한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데나리온”(마 22:18), 바리새인이 제기한 “십계명의 준수”(마 22:35, 눅 10:25) 등과 같은 내용으로 시험을 당했다. 물론 공관복음서에 이와 유사한 시험들이 등장하지만, 시험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뿐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법과 국가의 법에 대한 갈등이 많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에 왕조가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는 토라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있어서 왕권의 절대화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조가 몰락하고 고대근동의 대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한 후로는 하나님의 법과 제국의 법 사이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었다. 속국민(屬國民)들은 군주와 군주의 법을 따라야 했다. 물론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제국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관용을 베풀었지만, 두 법과 두 나라가 매순간마다 충돌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예수가 로마제국뿐만 아니라 유대 지도자들에게 눈에 가시거리였지만, 예수를 척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오죽하면 예수가 로마제국에 대한 반역자로 몰리고 고소되어 로마제국의 공권력에 의해서 살해되었을까! 유대 지도자들은 사람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도시 내에서 벌어진 ‘유부녀와 간음’이란 당연히 법에 따라서 즉결처형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법에는 간음이 사형집행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스데반의 투석에 의한 즉결처형이나 사울이 돌아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는 등의 행동은 로마법상 정상적인 행위가 될 수 없었고 이것은 로마당국이 그러한 행위들을 몰랐거나 태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간음녀를 죽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로마법과 제도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간음녀를 죽이지 말라고 했다면 예수는 모세의 법을 거스르는 중대한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목적은 예수의 말을 통해서 로마당국에 고소할 기회를 얻으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가이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 데나리온 동전의 경우에서처럼 이번 기회에도 그와 같은 시험을 벗어날 수 있었던 재치를 발휘하였다. 사실 율법에 따르면, 간음녀에 대한 즉결처분의 경우에는 증인들이 먼저 돌을 들어서 그녀에게 던져야 했던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한동안 흙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예수는 대답하기를 재촉하는 자들에게 일어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그녀를 쳐라”고 말하였다. 만약에 예수가 “법대로 현장을 발견했던 자들이 먼저 돌로 그녀를 쳐라”고 말했더라면 간음녀도 죽었을 테지만 예수도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 없는 자”라는 말을 하였다.

유효한 증인들이 없는 경우에는 즉결처분이 가능하지 못했다. 율법의 한계는 거기에 있었다. 증인이 없다면…. 우리 모두가 죄인인 이유는 증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나와 상대방이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예수 앞에 있던 사람들은 현장에서 잡힌 간음녀와 현장에서 잡히지 아니한 죄인들로 나눌 수 있었다.

예수를 로마당국에 고발할 빌미를 찾으려고 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숨겨진 죄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한다. 이제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 든 사람들로부터 젊은 사람들까지 모두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다. 이제는 한 가운데의 간음녀와 몸을 굽혀 바닥에 글을 쓰던 예수 두 사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예수는 묻는다. 증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간음녀는 증인들은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이제 현장범을 잡혔던 간음녀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간음녀는 무죄인가? 증인들과 모든 처형 참여자들이 가버렸기 때문에? 물론 이것이 법이 갖는 한계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녀는 여전히 죄인이다. 간음한 죄인이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여자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도 그녀를 “간음죄를 지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정죄의 취소가 아니라, 신적인 측면에서의 정죄의 유예(일종의 용서와 자비)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에게 “네 길을 가라. 지금부터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 습관적인 행위의 금지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예수는 로마법이나 모세의 법도 위반하지 않았으며, 간음녀도 살려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책략도 수포로 끝나버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수는 아직 밝혀지지 못했지만 죄를 범하고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군중의 양심을 깨우쳤으며 간음죄를 범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훈하였다.

*현대기독교아카데미에서 4월 6일부터 <가족해체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창세기 읽기>를  6주 동안 강의한다. 많은 참여를 바란다(연락처http://daeantheology.cyworld.com).
 
성기문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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