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방학동안에 7주에 걸쳐서 현대기독교아카데미에서 강연한 주제들 중에서 <복음과 상황> 독자들을 위하여 선별하여 새롭게 쓴 것으로 총5회에 걸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 모세오경에 언급된 십일조는 세 가지 국면을 언급한다. 레위인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이다. ⓒ복음과상황 자료사진
한국교회에서 ‘십일조’ 주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주제다. 한번 논의를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이 없이 이어지는 뜨거운 이슈다. 나 자신도 그동안 십일조에 대해서 많은 논란과 글을 썼는데, 아직도 할 말이 남아서 이렇게 십일조에 대한 논의를 또 하고 있다는 말인가?

사실 우리가 교회에 내고 있는 십일조는 성경, 특히 구약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구약의 십일조에 대해서 이런 말 저런 말을 덧붙여서 전지전능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이 말 그대로 십일조다. 오늘 십일조에 관한 논의를 그 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문젯거리인 “악성부채나 극심한 돈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위 생계곤란자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십일조 드림이 하나님의 기쁨?

최근 <빛과 소금> 2005년 9월호에 크리스천재정관리상담센터 대표로 있는 신상래 씨의 ‘Money 십일조의 비밀을 이해하라’라는 글을 일부 인용하고자 한다. “악성부채나 극심한 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 십일조 드리라는 말이다. 사실 생계를 이어가는 것조차 빠듯한 형편에 십일조 내라고 하면 교회가 도움을 주는 곳이 아니라 강도의 집단처럼 비춰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십일조는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데 말이다”  이와 같이 신상래 씨의 서두어는 참 좋은 말이다. 그동안 십일조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다. 결론이 기대된다. 그런데 그의 본론은 기존의 주장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상래 씨는 십일조를 제대로 내도 재정문제와 악성부채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마음의 자세와 동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십일조는 “하나님의 재산을 맡기는 관리자를 위한 자격시험”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정문제와 악성부채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극심한 재정 부족 속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십일조를 아끼지 않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재정문제와 악성부채의 해결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결국 한 가정의 재정 상태와는 상관없이 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악성채무자 등은 심각한 재정 부족으로 상상도 못하는 괴로움 속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평상시보다 몇 배의 고통과 망설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배고픔을 참고 겨울을 견디고 눈물로써 ‘십일조’의 씨앗을 뿌린 사람에게 가을의 풍성한 소출을 기대할 수 있듯이, 눈물을 머금고 이를 악물고 십일조를 드려 보시기를 바란다.”
 
신상래 씨와 같은 주장은 십일조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헌금으로 반드시 출석하는 교회에 내야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견해는 구약의 십일조가 구약의 모든 성도들에 의해서 성전에만 드려졌다는 ‘선입견’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선입견과 성경구절의 의미는 다르다. 즉 구약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 사이에서 본문의 의미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아니고 성경에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잘 모르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농사(밀․보리․포도․올리브)나 목축업(소·양·염소 등)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종과 가축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함께 생업에 종사하였고, 매년에 한 번 혹은 매년에 두 번 이상 추수를 하였으며,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제사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왕정시대에 접어 들어가면서 나름대로의 도시화․산업화가 발전되어가면서 생산과 소비가 분화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규례를 이해해야 하는데, 구약성경에는 모세오경을 중심으로 십일조의 세 가지 국면이 언급되어 있다. 즉 제의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레위인들(민 18장), 종들을 포함한 가족들, 그리고 제의적 업무에 참여하지 않는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객이 십일조의 대상들이다(신 12, 14, 26장). 제사라는 것이 전부를 태워 버리는 제사도 있었지만, 일부는 제사장과 예배자가 나눠먹는 제사도 있었듯이, 제의적인 일을 수행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먹을거리로 사용되는 제물의 부분들도 있었다.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

당시에도 그랬듯이 사실 우리가 말로는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사실 번제가 아닌 이상에야 헌금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 편의적으로 교회가 헌금을 모으는 것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두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도록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구약의 십일조라는 것이 하나님이 파종에서 추수기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농사나 목축을 잘 할 수 있도록 해주신 데 대한 감사와 축제 그리고 공유적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감사와 축제, 그리고 공유적 의미는 십일조의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다. 신명기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그 목적인 것이다.

말 그대로 이러한 원칙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어른과 아이, 심지어는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도 함께 십일조의 정신을 향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출신 종은 재정적인 파탄 때문에 그 빚을 면제 받는 대신에 특정기간(즉 6년간) 종살이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밭이나 과수원이나 가축이 있어서 파종과 추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가난하여 가진 자들의 나눔과 배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웠는지는 잘 모르지만, 레위인들과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도 언급되고 있다. 모세오경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내라고 말하고 있지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십일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말라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비록 그 주체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거기서 전제되고 있는 것은 정상적으로 토지와 가축을 소지하고 있지만 그것들에게서 소산(所産)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헌금은 믿음의 분량의 척도이기도 하지만 재정 상태의 척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먹고 살게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전 재산’을 모두 드린 과부 이야기를 하면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 문맥은 예수께서 그 가난한 과부의 분에 넘치는 헌신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재물과 시간과 노력의 헌신과 열심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믿음과 헌신을 평가하기에 앞서서 구약성경이 말하는 십일조의 목적과 용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비와 사랑과 돌보심의 하나님을 더 이상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冷血漢)으로 만들지 말자.

성기문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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