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정확하게 ‘은혜’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은혜 넘치는 예배’를 소망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리더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은혜와 영성이 넘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하고 있다. 성도들도 예배를 통해 은혜 받기를 원하다 보니 소위 은혜 충만하다고 소문난 교회들이 짜릿한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 마치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은혜 넘치는 교회를 점집에다가 비유하는 것을 보면 독자 여러분들도 필자가 은혜로운 예배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슬쩍 느낄 것 같다.

시종 차분한 외부 강사...참다 못한 담임목사 “이런 식의 부흥회면 은혜 못 받습니다”

몇 년 전, 필자가 다니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필자는 동소문동의 산동네를 헐고 세워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S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다. 그 교회에서 Y목사님을 초청하여 나흘간 부흥회를 열었던 때의 일이다. 필자는 부흥회를 즐겨 참석하는 편이 아니고, 마침 좀 그럴만한 사정도 있었던지라 첫날과 둘째 날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Y목사님의 저서를 통해서 그 분의 깊이 있는 성경묵상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아쉽기는 했다. 그런데 첫 이틀간의 집회에 참석 했던 아내는 예상대로 여느 부흥사들과는 달리 시종 차분한 어조와 깊이 있는 말씀으로 성경의 심오한 세계를 차근차근 풀어주셔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게 되어 유익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책으로 만난 Y목사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세 번째 날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 번째 날의 집회의 모습만 놓고 본다면 아내는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Y목사님은 거의 광대가 되어서 애써 참석자들을 웃기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는데 그 유머라는 것이 그리 고품격 유머가 아니어서 억지웃음을 자아내려고 애쓰는 저질 코미디언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집회의 말미에는 격정적이고 자극적이고 큰 목소리로 커다랗고 와글거리는 통성교회와 집단 눈물을 유도해 내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것이 여느 그렇고 그런 부흥사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대체 둘째 날과 셋째 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마음에 집히는 것이 도무지 없었다. 그 의문은 바로 다음 주의 주일예배에서 풀렸다. 담임목사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부흥회를 하는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특별하게 은혜를 체험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특별한 행사이다. 그런데 이틀 동안 Y목사가 하는 것을 보니 도저히 은혜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비싼 예산을 들여서 좀 유명하다해서 초청했는데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둘째 날 행사가 끝나고 나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좀 화끈하게 해 달라고 주문했다”는 것. 성도가 은혜 받기를 바라는 담임목사의 충정이야 얼마나 고맙겠는가마는 문제는 ‘은혜가 무엇인갗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회중들로 하여금 주변 동네에 민폐를 끼칠 정도로 악쓰며 실신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드리는 통성기도(실제로 언젠가 S교회의 부흥회 때 학습과 강의를 도저히 할 수 없다는 주변 보습학원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고 필자와 목사님이 파출소에 임의동행형식으로 연행된 적도 있었다.), 펑펑 터지는 눈물, 설교 중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아멘소리로 온 성도의 아멘공장 공장장화, 굉음을 내는 밴드의 반주에 맞추어 손바닥이 찢어져라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목청 터지게 부르는 찬송 . 담임목사님이 생각하는 은혜 넘치는 예배는 이런 것 같다.

‘은혜로운 예배 만들기’ 위한 교회의 눈물겨운 물심양면 노력

많은 교회들은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필자가 지금 출석하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고, 거의 모든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리라. 정교하고 탁월한 연주력을 지닌 밴드를 구성, 보다 훌륭한 연주자로 구성하기 위해 사례비를 책정, 프로 연주 그룹 뺨치는 악기와 장비를 구입, 조명을 통해 찬양곡에 걸맞은 분위기를 연출, OHP는 기본이고, 동영상 구현이 가능한 미디어 시스템을 통해 가사와 그래픽, 동영상 띄우기, 예배당 전체를 연주회장 수준의 음향을 구현하기 위해 리모델링하고, 거액을 들여 최상의 음향시스템 장착하기 등등. 심지어 큐시트를 작성하는 교회도 모았고, 잘 훈련된 율동 팀을 등장시키고, 율동 팀과 연주팀, 인도자들이 각기 다르게 유니폼을 맞추어 입기도 하며, 그 유니폼이 그 때 그 때의 예배의 분위기에 맞게 참으로 다양하고 패셔너블하게 바뀌는 교회도 보았다. 또 흔히 이야기하는 찬양예배, 열린 예배가 아닌 일상적인 형태의 예배라 하더라도 피아노나 오르간반주는 기본이고, 교회의 규모가 웬만해 지면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게 된다. 필자가 직접 본 어느 교회는 모 지방교향악단의 부지휘자를 지휘자로 영입하여 급료를 지불하고, 오케스트라에는 외국인단원까지 영입하기도 했다. 성가대의 솔로이스트들과 지휘자들에게 사례 지급하는 교회는 숱하게 많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느껴지는 은혜는 가짜 은혜다.”라고 단정 지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특별한 감동을 느끼고, 그 예배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이 자라나며,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러한 투자가 반드시 헛된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것’...그러나 ‘은혜는 값 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오해

바트(But), 그러나.

이제 또 다른 차원의 은혜를 생각해보자. 필자는 예수원에 가 본 적이 없다. 안가보고 하는 이야기이라서 조심스럽기는 하다. 또 예수원을 방문해 본 모든 사람들의 느낌이 똑같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예수원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예수원에 대한 서적이나 기록들을 토대로 보건대, 많은 이들이 예수원을 통해서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원이라는 곳에 특별한 악기나 음향, 조명, 밴드 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곳에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그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누고, 찬송을 부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곳의 시대에 뒤떨어진 예배와 일상을 통해서 느껴지는 은혜의 실체는 무엇이며, 앞에서 이야기했든 온간 준비와 투자를 통해서 얻어지는 은혜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많은 교회들이 은혜 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들이는 지난한 노력들, 그리고 그 노력들의 결과로 얻어지는 ‘은혜’라는 것이 반드시 무의미하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 은혜를 통해서도 성도들의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고, 깨어짐과 깨우침과 회개가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라는 것이 엄청난 자금의 투자와 방송국의 프로그램 제작과정을 뺨치는 정교하고, 세밀한 준비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렵다.

필자가 배우고 생각한 상식으로는 은혜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의 막대한 자금의 투자와 그로 인해 얻어지는 뉴미디어 시대의 탁월한 과학기술의 진보의 산물인 각종 장비와 음향조명시스템, 그리고 정교한 노력과 준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한동네 사는 사랑하는 유 아무개 목사님 가족과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이 글에서 말한 내용에 대해 대충 이야기를 나누어다. 유 목사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그거요. 목사들이 자신이 없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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