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 대광고 교목실장 류상태  기자회원의 글 ‘보수신앙을 자랑하는 목사님들께’에 대한 본지 양희송 편집위원장의 소견입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필자가 <복음과상황> <뉴스앤조이>의 공식 대표자격을 갖고 쓰는 것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저는 류상태 님이 대광고에서 나오신 이후로 쓰신 글들이 어려움 가운데서 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내 보이는 것들이라서 한국교회가 안팎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기대했었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가 여러모로 자충수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류상태 님의 발언과 행동은 신선한 대안을 기대한 언론의 주목 대상이었습니다.

저는 류상태 님의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오강남 교수와 더불어 소위 ‘신중심적 다원주의’의 흐름이신 것으로 짐작할 따름입니다. 아니면 교정해 주십시오.) 그러나, 류상태 님이 자신의 생각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교류하는 것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류상태 님의 글을 접하면서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이번 글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실 것 같은데, 그 안타까움이 계속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한번 경청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한국교회의 문제를 진보와 보수의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문제설정입니다. 한국사회 전체가 점점 더 이런 방식으로 사안을 보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을 좌파라고 공격하니 민주노동당이 웃지 않습니까?

열린우리당이 스스로를 개혁세력이라고 자임해도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뭐가 크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70년대 한국교회에서 통하던 보수와 진보 구분은 크게 갱신되어야 합니다. 각 진영에서 자생적으로 이런 구분이 낡은 것이 되어감을 인정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소위 진보진영 대 보수진영의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적 기득권의 문제는 보수주의자들만의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인간 심성의 밑바닥 문제로 씨름해야할 사안입니다. 그것이 보수와 진보의 문제로 치환되는 순간 우리는 매우 오도된 싸움과 논쟁에 말려들게 됩니다.

저희는 기자의 눈으로 한기총도 KNCC도 혹은 또 다른 진보적 기구들도 취재를 합니다. 기득권과 그로 인한 문제는 여기저기 할 것 없이 고루 널려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도덕적 차별성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질적인 차이로, 류(類)가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결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이야기는 과거에 보수진영이 보수적이었고, 진보진영이 진보적이었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로 회귀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것으로 논의의 결론이 나거나, 어느 편이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내일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계속 그 이야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는 류상태 님의 논지가, 혹은 댓글로 올라오는 일부의 글들에서 이 논의를 쉽게 보수-진보 논쟁으로 치환시켜놓고 편한 게임을 벌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금 벌어져야 할 이야기는 그보다는 더 진전된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둘째, 한국교회의 문제는 인상비평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서도 느꼈던 비슷한 아쉬움입니다. 물론 종교적 진리와 가르침이 굳이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서만 진위가 가려지란 법은 없습니다. 일선 목회자의 묵묵한 헌신과 실천, 남을 위한 희생과 위로가 진실로 종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인 경우가 더 많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류상태 님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그런 나름대로 선한 의도와 실천들이 서로 충돌을 빚고 있는 사안 아닙니까? 종교다원주의의 여러 논의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많은 논의들에서 주요한 개념이 정돈이 되고, 쟁점이 다듬어진 것으로 아는데 그들의 도움을 힘입어 좀더 단단한 논리와 내용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저는 류상태 님의 글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교감하고, 논의의 장을 펼쳐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소모적인 논란으로 기울고 마는 것이 의아합니다.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고, 그를 위해 성실하게, 희생을 감수하고 싸우는 것 같은데도 불필요한 반발이 많이 나오는 것은 글 자체에 깃든 인상비평적 경향 때문 같습니다.

그래서는 한국교회에 대한 항의의 몸짓으로 파열음은 내겠지만, 이 거대한 체제에 그 정도 방어기제가 없겠습니까. 거대한 벽과 맞서 싸우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류상태 님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서 예수 천당은 믿을 수 있지만, 불신 지옥은 안 믿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류상태 님이 믿으시는 ‘예수 천당’은 ‘죽어서 천당 간다’는 의미입니까. 그 ‘예수’는 또 어떤 예수인가요. 만약 ‘예수 천당’의 의미를 나름대로 재규정 하셨다면 ‘불신 지옥’을 같은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류상태 님이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통째로 문제제기 하셔야 합당하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앞을 믿든 뒤를 믿든 류상태 님은 그 표현에 의미 부여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왜 그 전체를 두고 논의를 펼치지 않습니까? 각각의 용어를 규정하고, 신학적이든 종교적이든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고 말하면 그 논의 자체는 각자의 입장으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글쓰기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혼란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겁니까, 모르고 그렇게 하신 겁니까. 어느 쪽이라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종교적 기득권 수호에 대한 비판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비판이 꼭 성경을 벗어난 자유로운 해석에서 비롯되어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종교개혁이나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 시도되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성경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언제까지 ‘문자주의’란 단골메뉴로 비판받아야 할지 의문입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입장들 가운데서도 각자의 신앙 전통에 충실할 것을 지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성경을 중요하게 받아들인 것이 꼭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불경의 위치와 기독교에서 성경의 위치가 동일해야할 이유도 없을테니 말입니다. 이 부분은 제 입장이니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보기에 성경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설득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좋은 글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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