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복음주의
목창균 지음/ 황금부엉이 펴냄/ 395쪽/ 15,000원
‘복음주의’(evangelicalism)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언급되는 빈도나 강도가 증가했지만, 무엇보다도 이제는 일반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어휘가 되었다. 이게 다 복음주의가 미국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문제는 이런 논의들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용어의 자의적 규정과 해석들이다. 복음주의를 미화하는 이들이나 비판하는 이들이나 너나없이 이미 제출된 논의는 참고하지 않고 저마다 나름대로의 해석을 제출하고 있으니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국내에 출판된 책으로는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장로교출판사)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엠마오), 좀더 전문적인 연구로 조지 마스던의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생명의말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목창균 교수(서울신학대 총장)의 이 저서는 국내 저자가 그간의 학문적 논의를 폭넓게 종합해서 소화한 복음주의 개관으로 권할 만하다.

그는 성결대와 숭실대에서 공부했고, 미국 페이스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드류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전공해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비교적 보수적 배경에서 출발해 학문적 폭을 넓혀가는 방향으로 공부한 이력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보수적 신앙을 가진 온건한 복음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국내의 복음주의 논의에는 전투적 강경주의자가 적지 않은 만큼 그의 존재감이 또렷하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복음주의에 대한 친절한 개관서

책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부 ‘복음주의란 무엇인갗와 제2부 ‘복음주의의 뿌리’는 복음주의 전반에 대한 표준적 개관이라고 볼 만하다. 이 분야에서 사용되는 대표적 학자와 저작을 고르게 읽고 다양한 입장을 중립적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처음 이 논의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무난한 입문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데이빗 베빙턴의 복음주의의 특징 4가지, 즉 행동주의(activism), 성경주의(biblicism), 회심주의(conversionism), 십자가중심주의(crucicentrism)를 소개하면서도 그는 마크 놀을 인용하며 흔한 오해를 지적한다. “복음주의자들이 지성의 생명력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세 가지 문제점을 시급히 교정해야 한다. 첫째, 특징과 본질의 혼동이다. 복음주의자들은 행동주의, 회심과 같은 특징을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런 특징들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감사와 헌신적인 삶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특징과 본질을 혼동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기독교 신앙의 특성과 기독교 지성의 부흥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19쪽) 이는 복음주의를 사회적 현상이나 운동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에 대해 신학적, 신앙적 본질에서 조명해야 할 필요를 강조한 존 스토트의 입장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교리와 체험 사이를 오가는 논의에 대해서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주장하거나 강조한다고 해서 모두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을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통주의, 성서적 권위 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독점적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복음의 본질적 요소로, 신앙고백으로 그리고 전도와 세계선교에 대한 명령으로 표현하는 열정적 관심이다. 종교개혁적 신학개념과 갱신 및 회심의 정신이 결합되어야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부흥과 갱신의 역동성이 복음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교리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감정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신념이나 교리로 간주하는 것과 신앙운동과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복음주의 전통의 양면 중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대 복음주의는 신학인 동시에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신념에 토대를 둔 영적 부흥 및 갱신운동이다.” (44쪽)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주의 신앙이 서야 할 역동적 균형감각을 잘 짚어주었다.

저자의 안목이 비교적 잘 드러나고 있는 부분은 제3부 ‘복음주의의 흐름’, 제4부 ‘복음주의와 신학’이다. 제3부는 복음주의와 공통기반을 갖고 있으면서 차별화 되는 여러 흐름들, 근본주의, 진보적 복음주의, 성결운동, 오순절주의, 신정통주의 등을 각각 한 장씩 할애해서 비교대조하고 있다. 제4부는 ‘성경관’, ‘성서 영감론’에 각 한 장씩 할애해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고, ‘영성’, ‘종교경험’, ‘종말론’을 둘러싼 입장들을 다룬 다음 ‘종교다원주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보수적 복음주의 입장이긴 하나 흔히 진보적 복음주의, 신정통주의로 규정되는 입장에 과도한 우려를 보내는 이들과는 거리감을 둔다. 성경관의 경우도 국내에서는 ‘성서무오(inerrancy)’ 입장이 거의 유일한 목소리로 알려져 있으나 ‘제한적 무오(infallibility)’ 등의 입장을 비교적 공정하게 소개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논의에서도 클락 피녹의 입장을 진보적 복음주의 항목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차후 논의 전개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정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적 함의와 영국 전통 참조 부족이 약점

이 책에서 가장 큰 빈구석으로 느껴지는 지점은 두 부분인데, 전체 논의의 틀을 거의 전적으로 미국복음주의의 맥락에 두었기 때문에 한국적 정황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물론 이 작업은 또 한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나)과 유럽이나 특히 영국의 복음주의 전통을 전적으로 도외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 중심으로 공부한 학자들의 공통적인 한계인데, 상당히 많은 문제설정이 미국적 특수성에 기인하는데 이를 복음주의 운동이나 복음주의 신학 일반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폐단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영국은 근본주의 자체가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복음주의운동에서는 미국 근본주의의 문제설정 가운데 상당수가 적실성이 없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점, 성서관에 있어서도 영국은 훨씬 더 일찍부터 성서학에서 비평적 연구를 수용했고, FF 브루스나 하워드 마샬 등 성서학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만큼 좋은 복음주의 학자군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들 수 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도 칼 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은 알리스터 맥그라스를 비롯 영국 성공회의 복음주의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현대 신학 가운데 가장 복음주의 신학에 근친성이 있는 입장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적 복음주의의 규명에도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은 크게 아쉬운 부분인데, 그나 혹은 누가 복음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충분히 의식한 저작을 내놓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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