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최근에 <목회와 신학>에서 박찬호 교수(2005년 11월호)와 이상원 교수(2005년 12월호) 사이에서 벌어진 사형 제도의 찬반 논쟁에 대해서 필자가 할 말이 조금 있어서 이렇게 기고를 결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이야기들은 두 교수들의 논의에 주로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수고스럽더라도 두 사람의 글을 필자의 글과 함께 읽는다면 더욱 유익한 논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누군가 단도직입적으로 사형 제도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묻는다면, 필자는 아직까지는 사형 제도 존치를 반대하는 정도의 입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의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먼저 이상원 교수의 여러 가지 주장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비판이 필요한 부분들을 먼저 언급하고 본 주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1)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주로 “살인자의 잔혹성과 뉘우침 없음과 악한 영향력과 여파”를 근거(일종의 극단적 사례)로 (일반적인) 사형 제도의 유지 혹은 존치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적용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감정과 여론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법론은 사형 제도 반대론의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한 명을 단순하게 살해한 자”와 “잔혹하게 연쇄 혹은 집단적으로 살해한 자”를 죄의 심각성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성경이 “어쩔 수 없는 살인”(혹은 정상이 참작될 만한 살인)과 살인광(殺人狂)을 구별하여 차등 처벌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학대가 심한 부모나 남편이나 자식을 죽였을 경우에는 정상이 참작되어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법 감정과 국민 정서상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구약의 사형법에도 “눈물”이 있던가?

(2) 또 하나는 사형 제도의 집행이 주는 유익이다.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된다.” 21세기와 같이 다양한 그리고 극악한 범죄자들 중에서 사형될 것을 두려워 살인하지 않게 되는 방지 효과가 얼마나 클까? 이것도 다분히 목적론적이고 기계적인 주장이다. 차라리 인간이 존엄적인 존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노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금령이 오히려 사형 제도 찬성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2. 성경은 사형 제도를 찬성하고 있는가?

필자가 항상 주장하는 이야기지만,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서로 화합될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서로 성경을 인용하면서 서로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사형 제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성경과 하나님의 명령을 더 많이 인용한다고 해서 더 신학적이고 더 경건하고 더 정당한 것은 물론 아니다.

1) 창세기는 사형 제도를 찬성하고 있는가?
기독교가 사형 제도를 지지해야 할 근거로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이 하신 보편 명령을 인용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에 속한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창세기 9:6은 난해 구절이다. 즉 살인자의 피를 “누가 흘리게 하느냐”가 모호하다는 말이다. 즉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주어가 모호하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그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로도 해석될 수가 있고, 또는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 사람은 자기의 피가 흘려질 것이다”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전자로 해석된다면 친척이나 국가에 의한 사형 제도의 신적 명령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후자로 해석된다면(우리말 개역성경의 경우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고대 번역본 중의 하나인 70인경이 후자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한 입장과는 무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6절과 연관되는 5절에서는 주어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내(하나님)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우리가 5, 6절을 연결시켜서 볼 때 (비록 6절의 문장 구조가 애매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명령은 피 흘리는 자 즉 사람을 살해한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사람”을 무론하고 그에게 하나님이 직접 혹은 결국 징벌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5, 6절을 별개로 볼 경우에는 5절은 하나님에 의한 처벌로, 6절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기관이나 심지어 인간 정부에게 살인자를 죽일 수 있는 권리나 특권을 제공해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6절의 문장 구조적인 난점보다는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과 징벌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는 이 구절들을 각각의 조항들로 보기에는 난점이 더 많이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문맥의 주된 관심사는 살인의 심각성과 처벌의 정당성의 강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관련지어서 한 가지 더 고려할 것이 있다. 우리가 구약의 법 조항에 나타난 사형 제도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부분을 살펴보자. 놀랍고 흥미로운 예가 창세기 앞 부분에서 등장한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4:14).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가인을 자신의 현존에서 쫓아내는 형벌을 주시자 가인은 하나님의 현존에서 쫓겨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생명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께 생존의 가능성을 구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인은 분명히 동생의 무죄한 피를 흘린 자로 사형에 처하기 합당한 자다. 어째서 하나님은 가인이 사람들에 의해서 사형되는 것을 막으셨을까? 게다가 하나님은 아벨의 살인자 가인을 살리시고 그를 사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표징(sign)을 주시기까지 하신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4:15).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한 살인죄에 대한 살해의 집행이 가인의 요구에 의해서 하나님의 허가를 얻어내는 장면은 “살인자에 대한 살인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허망한 본문으로 여겨진다. 물론 사형 제도 유지 혹은 지지론자들의 경우에 가인의 경우가 “예외”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회피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 사건의 중대한 가해자를 이렇게 취급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은 가인의 후예 라멕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뿐인가 사형에 대항하는 범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도 수백 년을 더 살지 않았던가? 가인의 생존은 예외였던가? 아니면 하나님은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즉각적인 사형 이외의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시고 계셨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정의와 은총, 이것은 상반되어야 하는가? 혹은 아닌가?

그러한 논점에서 본다면 노아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자연법”에 의존한 사형 제도 지지의 주장은 호소력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물론 하나님은 살인한 자를 처벌하시고 정의를 세우시지만 그것은 인간 제도를 통해서만 집행되거나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은 창세기를 통하여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아니면 찾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2) 구약의 율법은 사형 제도를 찬성하고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대답은 “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살인의 금지는 십계명에도 나온다. 심지어 살인자를 포함한 다른 중대한 범죄의 경우에는 증인이 앞장서서 그 대상을 돌로 쳐서 죽임으로서 정의를 세우라고 명령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구약이 사형 제도를 찬성하고 있는 것인가? 그 대답은 “아니요”일 수도 있다.

박찬호 교수가 그의 글(p. 199)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가 현 세속 사회에서 사형 제도를 옹호할 목적으로 구약성경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구약 율법에서 사형 제도는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형 대상은 “살인, 재판관의 말을 업신여기는 행위, 과실치사, 위증죄, 사람을 죽인 황소의 소유자의 태만, 우상숭배, 신성모독, 마술이나 요술, 거짓 예언, 배교, 안식일 위반, 동성애, 수간, 간통, 폭행, 근친상간, 부모에 대한 저주, 존속 구타, 유괴, 사제의 음주, 성전 기물의 무단 접촉” 등을 포함한다. 이건 마치 혹을 떼려다가 혹은 더 붙이는 결과가 온다. 사형 제도 찬성하려다가 필자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행해지는 사형 대상이 될 처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살인자에게만 사형을 언도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형 제도의 존속을 위해서 구약의 사형 제도에 관한 구절을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 제도일까? 빈대 잡으려도 초가삼간 태우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우리는 이대로 하자면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나님을 잘못 믿게 하는 사람들인 무당과 점쟁이들도 모두 붙잡아다가 사형에 처해야 한다. 법이란 것이 선택적이고 자의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 시대에 이러한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구약 시대의 왕정 이전 혹은 왕정 이후 시대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가 있었던 사회제도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정의와 잣대가 존재하였고 인정되었고 준수될 여지가 있었다.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율법을 통해서 살인자와 같은 중죄인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전쟁을 하도록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고의적인 살인의 경우에 부정의한 사형 집행이 행해지지 않도록 도피성 제도를 주셨다. 구약이 증거하듯이 살인자는 즉각 사형이라는 원칙만이 철두철미하게 집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 더 큰 해석학적 문제는 이러한 살인자에게 사형을 인간에게 허용하던 제도와 시스템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라는 신정정치의 몰락(?)을 통해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혹은 신정정치의 체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것은 교회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인 우리들에게 실체로서의 국가나 신정정치 체계를 유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페르시아와 헬라 그리고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종교적인 체계 외에는 사형 제도라는 인간을 통한 정의 구현(?)의 매개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로 발생한 신학적 문제가 신앙인과 세속 정권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이나 일반 계시라는 논리를 통해서 해소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앞의 창세기 본문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중적인 혹은 모순적인 상황(즉 하나님의 철저한 정의가 이교적 정권 혹은 세속적 정권을 통해서 구현해야 하는가 혹은 구현될 수 있는가)은 우리가 기독교의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을 고려할 때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 국가가 되었던 로마제국이나 중세 유럽 국가들 혹은 기독교 공화정들의 경우에 이러한 신정국가적 이상을 부분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현재도 미국 근본주의자들이나 회교권 국가들 가운데서 그들의 이념과 사상을 국교와 같은 강제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발견되지만 그와 같은 신정국가적 이념과 이상은 역사상 더 이상 반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성경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3) 신약은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가?
보수적 기독교 윤리의 입장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는 사회에는 구약 하나님의 정의의 원칙을 적용하고,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칙을 적용하는 “이중잣대”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인의 공동체가 자신들과 이웃들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이중 혹은 삼중의 잣대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적어도 20세기의 윤리 신학자들 사이에서의 뜨거운 이슈였고 아직도 확정된 주제는 아니다.

예수나 초대교회가 사형 제도를 (명백하게)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 제도는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있다. 이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침묵의 논증의 하나다. 본문의 침묵이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이 논증은 반대로 예수나 초대교회가 사형 제도를 (명백히) 찬성한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형 제도를 찬성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원 교수에 따르면) 신약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구절은 얼마 없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이 말은 뒤집어서 보면 초대교회가 국가 권력의 중요한 제도들 중의 하나였던 사형 제도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증거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19에서 언급된 “원수를 사랑하라”는 권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 말은 개인적인 복수로서의 정의 집행은 하지 말고 국가 권력에 의한 사형 제도를 통한 하나님의 정의의 집행을 허용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구절이 아니라 그 다음 장과의 연관성 속에서 제시될 수 있다. 즉 이 말과 연관지어서 로마서 13장 4절이 국가적 사형 제도의 찬성 혹은 지지의 증거 본문으로 사용될 수 있을까?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여기서 “통치하는 (이교적) 권세자”가 가지고 있는 칼은 사형 집행 도구만을 국한지어서 말한다기보다는 “국가적 공권력 혹은 무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기독교인(‘네가...’)이 살인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세속 정권이 사형 집행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라고 불리는 “통치하는 (이교적) 권세자들”에 대한 언급은 바울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바울의 말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이교도들은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을 옹호하고 악을 징벌하는 데(권선징악적 차원)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구절을 (직접적으로) “사형 제도의 찬성”의 증거 본문으로 사용하는 데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제임스 던(James Dunn)이 자신의 로마서 주석(WBC)에서 말하고 있듯이, 사도 바울과 로마교회 구성원들이 처한 “정치적 무기력(powerlessness)의 문맥에서의 정치적 무저항주의(quietism)의 옹호”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p. 774). 다시 말하자면 이 내용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으려 한다면 세상 정권의 일반적 특성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바울 당시의 특수한 상황으로 이해하고 보편적인 원칙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말씀은 기독교 자체가 혹은 세속적 국가나 정권의 차원에서 심하게 그리고 자주 악용되었다는 점을 먼저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2000여 년의 기독교의 역사에게 가장 오용된 혹은 과도하게 적용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종교개혁 때 침례교도나 급진 개혁주의자들을 무력으로 억압할 때나 독일 나치정권 때나 박정희 등 독재정권 때에 이 본문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본문에 대한 악용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무력의 남용의 범위까지 허용하는 교훈을 주었을까? 그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예로부터 (비록 우리가 살인자에게만 적용된다고 믿고 있지만) 이 사형 제도는 살인한 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았다. 사실 정치범들이 국가 전복과 국가 안녕의 중대한 위반자라는 차원에서 사형 제도의 “단골”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예수님은 로마제국에 대한 “국가 질서 문란죄”로 인해서 사형 당한 장본인이었다. 예수님이 국가 권력의 사형 제도의 남용을 통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해야 할 권세가 박탈되어 있어서 이교도 정권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그들의 정적(政敵)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3. 나는 왜 현재의 “사형 제도 존치론”을 반대하는가?

사형 제도는 성경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성경 내적으로도 흔히 발견될 수 있었던 제도였다는데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이며 기독교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신구약 성경은 “인간 생명 존중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고 “신정정치 하에서” 살인을 포함한 더 포괄적인 범죄들에 대한 사형 제도를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생명으로 갚는 원칙”(동태 복수)이 율법 속에서나 이스라엘 역사상 무조건적으로 100% 적용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인간 정부의 사형 집행의 절대적인 정당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지도 않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구약 시대와 같은 신정정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고 하는 치명적인 “제약”을 들었고 바울에게서 세속적 정부의 일반적인 정의 집행의 (개연적) 가능성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경적 주장은 찬성이냐 반대의 문제를 떠나서 인간 생명의 귀중함과 하나님의 징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 정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사형 제도의 원칙적 집행을 찬성할 것이나 그것이 성경적인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형제 폐지 논란에 직면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정의가 구현되고 인간 생명이 존중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결론적으로 악인의 처벌을 통한 정의의 궁극적인 수행은 죄인들인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인간들은 사형 제도를 통해서 잘못과 오류를 범해왔다. 불행하게도 사형 제도는 사람들의 악의와 악한 행실을 막는 데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 사형 제도가 존재한다고 사형 제도의 폐지를 반대할 것인가? 그 문맥과 그 상황과 그 신학 속에서의 사형 제도가 현재의 문맥과 상황과 처지에 있어서 적용 가능한 것인가를 고려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학과 기독교 윤리가 아닐까?

구약과 신약에서 신자들에게 주신 일차적인 교훈은 “생명 존중의 사상”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성경을 이용하여 사형 제도의 원칙론만을 주장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너무나 많은 한계점들이 존재한다. 사형 제도를 존치하는 것보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고 보호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더 유익하다면 그 쪽을 더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 더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성기문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 외래교수, 말씀발전소 대표

“모세는 이혼을 허락했다! - 윤리적 난제로 읽는 구약성경”이라는 제목으로 2005년 12월 29일부터 2006년 2월 23일(7회)까지 매주 목요일 저녁 7:00~9:00에 십일조, 안식일, 낙태와 안락사, 전쟁과 폭력, 동성애, 이혼, 제사의 난제들을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공개강좌를 현대기독교아카데미(대표 김동춘 교수)에서 개최한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 연락 및 등록처 http://daeantheology.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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