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손봉호 외 지음, IVP

드디어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한국에서 기독교철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이 책은 그동안의 연구에 결과물 가운데 하나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다.

비록 본서가 외국 철학자들의 논의만을 담고 있으며, 독자적 철학 노선을 펼치고 있는 연구서가 아니기에 그 가치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한다면 비록 이 책이 해외의 기독교철학자들의 업적을 정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평가한 작업은 분명 한국 기독교 철학에 있어 사유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철학함에 있어 사유의 도움을 제공받는다는 것은 국내·국외라는 낡은 경계선을 무시하고 이를 넘나드는 작업임을 감안한다면, 기독교적으로 철학하기의 나래를 편 선배들의 고민을 뒤따라 가보는 일은 분명 넘어야 할 산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이 지니는 가치인 것이다.

본서에 언급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개괄하는 것은 동어반복에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별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보다는 주목할 만한 논의를 펼친 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더 큰 의의를 가질 듯싶다. 이에 필자가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철학자는 코넬리스 반 퍼슨이다.

철학 사유의 길 제시한 '반 퍼슨'

우선 화란 자유대학의 교수를 역임했던 반 퍼슨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그의 제자 강영안 교수의 말대로 반 퍼슨은 독자적인 철학 노선을 구축한 바는 없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신학하고 기독교적으로 철학하는 것이 던져주는 의미에 대한 그의 연구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반 퍼슨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전통적 개혁신학의 교리적 논의에 기초한 이해를 답습하지 않는다. 전통적 개혁신학은 하나님을 존재론적 삼위일체 신앙에 근거하여 파악한다. 이에 반해 반 퍼슨 교수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히 최고 존재자로 기록하고, 편재성은 무엇이며, 그의 초월성은 무엇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기술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에서 파악되는 분이다. 반 퍼슨은 이 근거를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에서 찾고 있다.

이를 우리는 인간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허나 성경에 드러난 내용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이 주장이 큰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 때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나 성육신하여 나타나실 때, 언제든지 인간을 향하여 있었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관계성에 기초한 이러한 반 퍼슨의 통찰은 적어도 그동안 한국의 개혁교회와 개혁파 신학자들의 논의에 일대 전환을 마련해줄 수 있다.

다음으로 반 퍼슨이 말하는 기독교적으로 철학함이 어떤 함의를 가지는 것인지 살펴보자.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비기독교 철학에 호의적이다. 그에게 기독교적으로 철학하기는 독자적 노선을 정립하기 이전에 오히려 비기독교 철학을 깊이 연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부정의 방식으로 즉,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무엇이 기독교적이고, 무엇이 비기독교적인지를 가려내는데 급급했던 그동안의 일부 기독교적 학문연구 방식에 철퇴를 가하는 주장이다.

철학이란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물음, 지식에 대한 연구, 윤리와 가치에 대한 탐구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모든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주제요 사유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의 고립과 방어를 넘어서 진정한 철학함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아울러 강영안 교수가 지적한대로, 반 퍼슨은 우리의 생각과 철학을 성경의 비판받도록 내어놓으며 우리에게도 죄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럴 경우 기독교인의 철학은 죽은 정통 안에 갇히는 또 다른 독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에게도 죄의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겸손함으로 철학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비기독교인의 철학에 대해 보다 신중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주기도 할 것이다.

비록 지면 관계상 다루지 못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9인의 철학자 가운데 폴 리쾨르와 앨빈 플란팅가의 업적도 앞으로 더욱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별히 플란팅가는 그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소개가 거의 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입장은 반 퍼슨과는 달리 기독교 철학의 독자적 노선을 구축하고자 하는 입장이기에 이를 비교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다. 또한 기독교적 믿음의 정당성과 신의 존재를 분석철학의 입장에서 증명해낸다는 것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서두에서 보낸 찬사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전문철학자의 명부에 올리기 힘든 판넨베르그나 쉐퍼가 이 책에 편입된 것은 의아한 부분이다.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현상학 계열의 테브나즈나 마리옹, 또는 미국의 아도르노 연구에 권위자 가운데 하나인 쥐더바르트, 칼빈 칼리지에서는 보기 드물게 프랑스철학 연구에 힘을 쓰고 있는 제임스. K. A. 스미스 등의 전문 철학자들이 다루어지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손봉호 교수…기독교철학은 '놀이'다(?)

기독교철학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내려준 손봉호 교수의 입장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다. 그는 기독교철학을 '놀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다른 전통이 형성해놓은 규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일면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뿐인가? '놀이'라는 관점은 비록 철학함에 있어 바른 자세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철학은 끊임없이 시대의 변혁과 대안을 제시하는 기능도 있다. 기독교철학도 예외라고 하기 힘들다.

손봉호 교수가 지적한대로 기독교철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라면, 이는 세상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경우 기독교 철학이 시대와 세상의 변혁에 대한 소리를 내포하지 않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놀이'의 개념은 기독교 철학을 설명하는 데 있어 분명 가치 있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소박한 설명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함의는 크다. 그렇기에 기독교적으로 철학하고 사유하길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 있게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읽다보면 반드시 우리 세대가 해야 하는 작업, 우리 세대가 펼쳐야 할 고민들이 보일 것이다. 본 서평의 말미에 내놓은 응석어린 불만도 사실은 저자들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좀 더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사유하지 못하는 필자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본서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논의들과 부족한 연구들은 다름 아닌 우리 후학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주: 이 글은 총신대보사 9월호 신문에 실었던 것을 보충한 것입니다.)

김동규 / 총신대 졸업, 현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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