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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채영애 교수의 '사랑의 집' 이야기
방황 끝에 얻은 '살며 나누며 사랑하며'
  • 박명철 (aimpark@newsnjoy.or.kr)
  • 승인 2000.10.06 18:18
채영애 교수. 총신대 선교대학원에서 공중보건학을 가르치는 그이를 두 시간 남짓 만났다.

그의 삶의 터전도 아닌 총신대의 교수 휴게실에서, 그리고 바삐 나오며 생각했다, 설익은 글을 쓸 것 같다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그녀와 나눈 이야기를 훑어보면서 다시 아쉬움을 느낀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듣다 토론으로 번져버리지만 않았어도 그 짧은 시간을 그렇게 후다닥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이 글은 미완의 글이 될 것이고, 조만간 그녀의 삶 더 깊숙한 곳을 찾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1948년생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쉰 셋의 나이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그녀에게서는 얼핏 수녀에게서나 느끼는 신비로운 향기가 있다. 얼굴 가득 활짝 웃음이 필 때면 속 깊은 웃음의 의미들을 따지고 싶어진다. 묻고 또 묻다보면 그녀가 지녔을 수많은 고민의 무게를 공감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시작된 지점에 채 닿기도 전에 재빨리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13년 전 '전설의 고향집'으로 들어온 이유

13년 전 충북 진천으로 들어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한 채를 얻어 이모와 둘이서 살았다. 사람들이 ‘전설의 고향집’이라고 부르는 그 집에서 그녀는 비로소 ‘삶’을 시작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지만 그들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삶의 마지막에 부딪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 알코올 중독으로 희망을 접어버린 사람, 또 다른 병을 얻은 사람…. 그렇게 외롭고 병들어 이 세상의 거센 물살을 맞서기 두려운 이들이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그의 집을 들렀고, 머물렀고, 살았고, 떠났다.

친구란 모든 것을 주고받는 사이다. 부모 옆에 자녀들이 있고 그 자녀들의 성장 수준에 맞추어 제각각 형제와 자매처럼 사는 것이다. 느슨하지만 가족 같은 관계, 이를 그녀는 친구라고 말한다. 이런 친구들과의 삶을 살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방황했다.

미국 영국 등지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중보건학 교육학 신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지역사회개발 등을 공부했다. 그녀의 공부는 사실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는 식이었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무엇이 삶인지에 대한 질문 방식이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대답은 없었고, 삶의 희망을 못 찾으니 결국 죽음만 떠올랐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뉴욕에 머무르면서 생각은 정리되어 갔다. 성경을 읽고 빌 브라이트 박사의 책을 좋아했다. 제자에 대해 고민했고, 순종에 대해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알아서 순종하자는, 막연하지만 끝이 보일 듯한 실마리를 붙잡은 것이다. 실마리의 끝은 사랑이었다. 삶이란 곧 사랑하는 일이었다. 성령의 힘을 도움 받아 사랑하는 것이었다. 대상은 하나님이었고, 나였고, 너였고, 자연이었다. 나머지는 기도하며 주님께 물어서 결정하면 되었다. 사랑으로 인격은 변화되었다. 사랑이 있어 사람들은 낙천적이 되었고, 단순한 삶에서 건강을 찾았다.

광으로 쓰던 공간을 수리해 마을 아이들이 와서 책을 잃고 비디오를 보고 음악을 듣는 장소로 열었다. 아이들은 이곳을 사랑의 도서실이라고 불렀고, 이 집은 사랑의 집이라고 불렀다. 가난했지만 나눌 것이 있었고, 적은 것을 나누었지만 풍요로웠다. 사랑의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8명이다. 이들은 모두 이곳의 생활 원칙을 따르며 공동체의 삶을 산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권면한 삶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것을 그녀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며 더도 덜도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을 위해 세 가지 생활 규칙을 지키면 된다. 스스로 모든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도우며, 서로를 세워주고 도움이 되는 말만 하며, 환경은 아름답고 깨끗이 창조한다.

단지 혼자 있으면 삶이 파괴될 것을 알기에 함께 살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모두 채워준다. 아픈 사람은 치유되고, 생산도 함께 한다. 열 곳의 마을이 모두 교회가 된다. 시설 교회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교회이고 동시에 마을이다. 성도는 빛과 소금이어서 어디에 있든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하여 성도들이 있는 곳은 선교지가 되고 교회가 된다.

그들이 살면서 만들어내는 온갖 것들을 일러 ‘예수문화’라고 한다. 그것은 쉽게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는 문화이다. 하여 정직하고, 친절하고, 순결하며, 노동을 소중히 여긴다. 이런 문화들이 친구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올 때, 그곳이 교회인 셈이다.

이런 삶이야말로 자유를 가져오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세우는 힘이 된다. 하여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독립의 기쁨을 누린다. 얽매이지 않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독립은 홀로 머무르지 않고 나누는 일이다. 곧 개인 전도와 제자훈련은 이런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어디서나 예수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자유와 독립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집에서는 국제예수제자훈련원이 있고 개인전도 전문가 훈련 과정이 개설된다. 누구나 와서 이 과정을 훈련받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한다. 그녀의 전도훈련 강의는 무엇보다도 전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치중한다. 주님의 지상 명령에 대한 책임만 강조될 뿐 정작 중요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상실해 버린 우리 시대의 전도문화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그래서 전도 훈련은 ‘사랑’과 ‘사랑의 기술’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의 예술임을 깨우친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그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전도 전문가가 된다. 교회 성장이니, 회원 확보니, 세미나 장사니 하는 온갖 겉치레 말들이 세탁되고 난 뒤 다시 ‘전도’의 본래 의미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탄문화 주인공을 되찾읍시다"

13년이 그렇게 흘렀다. 처음 이곳에서 함께 삶을 시작했던 이모도 돌아가시고, 전설의 고향 집에서 내려와 주막집을 고쳐 새로운 터전도 꾸몄다. 함께 공동체의 삶을 사는 목사님도 들어왔고, 더 많은 ‘친구들’이 이곳을 찾았다. 관청에서도 노숙자가 생기면 이곳으로 보내고, 가끔 보조금도 보낸다. 처음에는 쌀이 떨어지면 곧장 그녀에게 달려와 “쌀이 없는데 어쩌죠?” 묻던 친구도 지금은 으레 함께 기도하자고만 할 뿐 허겁지겁 뛰지 않는다. 삶이 된 것이다.

요즘 그의 관심은 성탄문화를 되살리는 데 있다. 주인공이 사라져 버린 성탄절 문화를 보면서 안타까워하는데 머무르지 못해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이 캠페인을 전개하자고 설득하느라고 바쁘다. 이 땅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음에도 그녀의 성탄축하 캠페인은 외로워 보인다. 아마 모두들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인 듯한 표정이다.

그런 이들을 향해 ‘성탄을 축하합시다’고 호소하는 맑은 눈동자에서 그녀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나에 대한, 우리들에 대한 연민이 스쳤다.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자유 없이, 친구 없이 홀로 삶을 파괴하고 있는 우리들의 슬픈 눈동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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