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노동자였던 어떤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시집을 펴냈습니다. 그는 한때 억압받는 이들의 분노를 일삼았지만 얼마되지 않아 그 억압의 고통으로 주어진 인기에 영합해 갈바 모르는 시인으로 전락했습니다.

저 또한 억압된 인류의 역사는 투쟁을 통해 해방될 것이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분노와 증오의 혈기를 쏟던 적(지금도 또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발 내리는 깊은 산 계곡에 잠입해 인본주의적 희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악이 도처에 깔린 세상을 보며 예수의 피를 기억했습니다.

지난 토요일(4일) 어떤 모임의 참석을 위해 닿은 곳은 전남 광양의 백운산 깊은 봉강 계곡이란 곳이었습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총구가 살육을 서슴지 않던 지난 50년대에는 이 곳이 빨치산의 유격전구였다고 합니다.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으면서 가진 자의 횡포에 대항하던 사내들의 죽음 행렬, 이 땅에 뿌리내린 기독교는 살육의 역사를 일깨워 바로잡으려 하기 보다 보수 우익적 편안을 선택하며 죽음의 잔치에 부화뇌동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난 냉전시대 살육과 학살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바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칼 마르크는 종교를 아편이라며 적대시했습니다. 그의 적대적 시각이 부른 피의 살육은 역사의 죄일 뿐 아니라 저 하늘나라의 하늘 아버지가 용서치 않을 범죄일 것입니다. 하지만 되짚어볼 필요는 있습니다. 평화와 평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보다 종교라는 허울아래 권력의 횡포를 일삼던 인류사에서의 종교권력은 예수의 십자가를 흉기로 사용했습니다. 회개가 선행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죽음과 죽음으로 피를 토하던 이 땅을 생각합니다. 고난받는 자의 신음을 외면하고 독재자들을 위해 올린 조찬기도회, 천국을 팔아 세상을 외면할 것을 강권한 그 말씀의 마취...

지금 이 땅에는 예수를 쫓아내고 장사치들이 장악한 성전들로 가득합니다. 분쟁과 탐욕이 그치질 않는 성전, 이 죄악을 탕감 받기 위해서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 옷을 찢는 회개로 울부짖어야 합니다. 저는 모릅니다. 예수의 뜻이 무엇인지 하지만,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안락사로 인도하는 의자가 아님을, 그의 사랑이 죽은 자을 외면하고 죽인 자를 감싸며 죄의식을 털어 내주는 면죄부가 아님을 저는 믿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성긴 눈발이 어둠의 계곡을 퍼붓습니다. 내리는 눈발 속에 예수의 피를 알지 못하고 죽어간 가엾은 영혼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 합니다. 오직 증오만이 범람했던 땅의 죄악이 여전히 도도히 흐르는 분단의 한반도의 끝자락, 누가 있어 이 죄에서 해방시켜 줄 것인가 저는 소리치지 못합니다.

깊은 산 계곡 한자락에 동백꽃이 피었습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퍼붓는 초봄의 눈발에 붉은 동백꽃이 선연한 빛깔로 횐 빛에 대항합니다. 다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반달이 청정하게 떠 있습니다.

저 하늘의 광활한 우주 안자락에서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의 죄악과 증오를 무어라 하실지 저는 또 모릅니다. 다만 믿는 것은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가 모든 것을 온전케 할 해방이라는 것을 저는 믿고 싶습니다. 알든 모르든 오직 아멘! 만을 강요하는 목자들로부터 이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뜻도 아니며 하늘 아버지의 계시도 아님을 아무 것도 모르는 신출내기 성도는 믿습니다.

성긴 눈발에도 봄은 움트고 있습니다. 먼데 들녘의 청보리는 밟히고 밟혀야 싹을 틔워주는 죄악의 땅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종할 것은 예수의 피 흘림이며, 못 박힘이며 성전을 장악한 장사치를 내쫓는 분노의 채찍질 임을 저는 성경에서 읽었습니다.

이제 봄이 오면 순순한 성도가 되고 싶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을 떠나시며 보내주신 성령에 감동·감화 받아 거짓에 침묵하는 입이 아니라 거짓은 거짓이므로 진리 앞에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소리 소리치고 싶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주의 세상 앞에 무릎 꿇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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