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공부하지 않는 나로서 공자를 언급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원전 그대로의 공자가 아님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여기서의 공자란 내가 생각하고, 느껴왔던 공자이며, 유교이다.)

2년 전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출간되자마자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며, 공자의 유교를 옹호하는 한 유학자의 책 또한 출간되었다. 누가 이 나라를 죽였는지에 대해서 한바탕 논쟁이 오고 갔다. 공자에게 이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 그 자체가 되었건, 아니면 공자를 해석하는 주변 사람이 되었건, 유교의 영향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난 때로 내 속에 있는 공자를 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하려는 출세의 욕망이 내 속에 들끓을 때도 있다. 유가의 눈으로 바라본 노동의 목적은 바로 출세가 아닌가!(물론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배워온 유가는 그렇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바로 출세의 서열에 다름 아니다.

물론 자신의 서 있는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달란트를 발휘하다 보면 자신의 이름을 떨칠 수도 있는 일이고, 꽤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목적인 이상, 노동은 왜곡된다. 하나님의 명령은 온데간데 없고, 공자의 가르침만 남게 된다.

교회는 중산층 이상을 위한 종교라는 말을 심심챦게 듣게 된다. '누구누구는 십일조가 얼마라더라, 누구누구는 어디에서 일한다더라, 참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야'라는 교회 내의 쓸데 없는 소문은 우리 속의 공자를 다시 부활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부의 몇 푼 돈이 아무 이유 없이 교회에서 부끄러워지는 것은 분명 이 교회에 공자가 살아있기 때문이며, 내 속의 공자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투데이의 발행인이라는 한 대형교회 목사의 아들도 출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리스도가 그러한 노동의 과정에 함께 참여할 여지가 있을까! 그리스도께 그의 직장에서 그와 함께 일해 달라고 부르짖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그러한 기도는 공자의 제단에서 드려야 한다. 하긴 자존심을 팽개쳐버린 부끄러운 출세는 공자가 원하는 바도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운 노동이라면, 그 노동을 포기해야 마땅하다.        

대형교회의 세습반대라는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 세습을 포기하지 못하는 까닭은 공자의 "입신양명"을 포기하지 못한 까닭이며, 그것은 교회의 정치권력화가 상당부분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교회가 입신양명의 도구가 되어버린 서글픈 자화상을 우리는 이 시대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는 한국교회의 참 모습을 잃어버리게 한다. 주의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망각하게 한다. 사람에 대한 절대복종이라는 해괴망칙한 충성심은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린다. 무소불위의 권위주의가 한국교회에 판을 치고 있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렇게 잘못된 평가일까? 중요한 직분자가 되면, 의례 얼마 정도의 감사헌금을 내고 있는 아름다운(?) 전통은 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라는 공자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누구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난 내 속의 공자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괴롭다. 그리스도가 살아 숨쉬어야 할 내 마음의 중심에서 공자가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내 옛사람의 목소리이며, 끊임 없이 죽여가야 할 치열한 내적 전쟁터에서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난, 언제쯤 이 공자의 망령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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