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3~7)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까? 뭐, 손에 들고 있는 빵처럼 반절로 뚝 떼서 나눠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먼저 슬픔을 나누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이때 굳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할까요. 무어라 할 말 없습니다." 그런 다음 손을 잡고 같이 울어주면 됩니다. 슬픔을 당하는 사람편에서도 역시 이런 인사말에 굳이 대꾸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의 슬픔이 어느 정도인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위로하는 사람 손을 잡고 같이 울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슬픔은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러면 이것을 기쁨을 나누는 경우에 적용해 봅시다. 축하해주러 간 사람이 말을 합니다. "무슨 말로 축하를 드려야 할까요? 그저 할 말이 없습니다." 어때요? 약간 이상하지요. 그리고 기쁜 사람이 축하해주러 온 사람에게 아무런 말이 없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다가가서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시겠어요?" 이런 축하의 말에 아무 말도 대꾸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언가 이상한 일이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축하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기뻐하고 축하를 받는 기분이 납니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냥 말로만 해서는 별로입니다. 말에 덧붙여 무언가를 더해야 합니다. 무엇을 덧붙여야 하는가는 기쁨의 단계별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본인 속으로만 기쁜 정도입니다. 콧노래가 나오고 즐겁기는 한데 그냥 혼자서도 견딜 만한 정도- 물론 견딘다는 말이 조금 어색하지만-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해주는데 별다른 행동이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혼자 즐거워하는 단계이니까요.
 
두 번째 단계는 그것이 겉으로 표현되는 단계입니다. 이 경우는 '입이 귀에 걸린다'는 표현대로 다른 사람이 척 보면 그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면 족합니다.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면 그냥 '줄줄줄'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 기쁨의 최고 단계는,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 못하는 단계입니다. 그런 단계에서는 친구를 불러 같이 밥을 먹거나 잔치를 벌입니다. 그렇게 잔치를 벌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단계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 잔치에 참여한 다른 사람 모두가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 보니 그렇게 기쁨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무언가 상당히 즐거운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같이 기뻐하자 그럽니다.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았으니 다음 일은 잔치를 벌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것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기쁜 일이 생기도록 할 수 있을까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6절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6절로 보아 우리가 검토한 바 기쁨의 3단계 중에서 가장 최상의 단계인 이웃과 친구를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그 기쁨의 정도가 어떤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매우 기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기쁨을 나누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인가요? 그일이 얼마나 기쁘길레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였을까요? 그렇게 이웃과 친구를 불러모아 잔치를 벌이게 되는 그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6절 후반절에 나옵니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다름이 아니라 잔치를 벌이는 이유는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온 일입니다. 자,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잃은 양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잃은 양을 되찾은 것은 실상은 자기의 재산에 더 플러스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없어질 뻔한 재산을 그냥 유지하는 차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그 양을 다시 찾은 것을 왜 그렇게 기뻐하는 것일까요? 즐거워하되 1단계나 2단계도 아니고 기쁨의 가장 높은 단계인 잔치를 벌여서까지 그 기쁨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어느 날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애를 쓰고 찾았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일 때문에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그 양과 주인과의 사이가 무언가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있다! 그것은 그 주인이 양을 단순한 하나의 물건이나, 재산의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 양을 생각하는 정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들여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하나의 재산으로만 생각했다면 굳이 잔치를 벌일 필요가 없겠지요. 잔치하려면 돈이 드는데, 재산의 일부인 양을 찾은 것을 가지고 다시 돈을 허비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여기 둘 사이를 그 이상의 관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요? 시편을 읽어볼까요. 시편 100편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편 100:3) 

바로 여기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는 말에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편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을 때에 별다른 보충 설명 없이도 그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말씀을 청중들에게 할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 말씀인 시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바로 시편 100편, 그리고 시편 23편을 떠올리면서 여기의 목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양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바로 양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양은 그의 백성인 우리를 말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기르시는 양인 우리를 끝까지 찾아 다니시다가 찾은즉, 즐거워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가면서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다. 잃은 양을 찾으러 가서 드디어 양을 발견합니다.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여기서 즐거워는 자기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단계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속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말입니다.
 
그 다음 5절 이어서 '어깨에 매고.' 이것을 다르게도 해석할 수가 있겠지만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일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와 아이들을 어깨에 무동 태워주던 그런 시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나와 아이들은 얼마나 기뻤던가? 그래서 이 말은 이제 기쁨이 밖으로 표현되는 단계입니다. 기쁨이 넘쳐서 혼자 속으로만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양을 찾은 일이 기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양 때문에 애쓰고 헤맨 것을 분하게 생각했다면, 어깨에 양을 메고 오는게 아니라 아마 양의 목에다 줄을 걸어서 마구 마구 끌고 올 것입니다. 개 끌듯이 끌고 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목자는 그렇게 힘들게 양을 찾았던 고생은 다 잊어버리고 양을 찾았다는 기쁨에 양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른 이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단계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이는 이 단계는 아까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습니다. 그렇게 주인은 그 양을 찾아 낸 것을 기뻐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양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잃어버린 양은 그의 기르시는 양, 곧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렇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양은 주인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입니다. 만약 기쁨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성가신 존재라면 그 양이 없어졌을 때에 '아이구 속시원하다,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면서 좋아라 했을 것 아닙니까? 스바냐 선지자는 기쁨의 존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되시는 것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 품에 돌아왔을 때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기쁨의 잔치를 벌이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상은 양의 주인되는 목자의 입장에서 가지는 기쁨입니다. 자, 그러면 이 사건은 단지 잃은 양을 찾은 자의 기쁨으로서만 끝나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자기의 기쁨만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반드시 상대편인 그 기르시는 양인 우리에게도 기쁨이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남의 속도 모르고 하나님만 혼자서 기뻐하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이지만 또한 길을 잃었다 다시 목자의 품에 안기게 된 그 양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기쁨이 양에게 있습니까?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기쁨입니다. 생명을 건진 기쁨입니다. 양이 목자의 손에서 벗어나 혼자 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늑대나 이리의 손에 들어가 죽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양 떼가 지나가면 그것을 노리는 짐승들이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철없는 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또는 목자가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 양은 늑대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바로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삼상 17:34)

그렇게 양의 목숨은 항시 위태로운 것인데 오늘 본문의 그 양은 주인을 잘 만난 것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 늑대의 입에 들어갈 수도 있었는데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주인(목자)을 잘못 만난 양의 모습은 어떤지 아십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태만한 목자, 아무런 책임감도 없는 그야말로 삯군 목자에 의해 길러지는 양은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는 배대로 곯고 또한 제대로 보살펴 주지 않으니 몸에 병 또한 많습니다. 벌레나 파리가 마구 달려들어 괴롭혀도 그것을 제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웅덩이에 빠지기를 반복해 온몸은 비 맞은 개처럼 후줄그레하고, 털은 군데군데 빠져있고 온 몸은 상처 투성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갑작스런 늑대의 습격을 받아 한두 마리씩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남아있는 양들은 언제 어느 때 다시 늑대가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에 질려 삽니다. 그런데도 그 목자는 몰라라 합니다. 심지어는 제 양이 몇 마리가 있는지 몇 마리가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지냅니다.
 
그러한 양들이 울타리 한구석에 옹기종기 모여서 울타리 건너편의 다른 양들, 살찌고 건강하고 제대로 보살핌을 받아 온 몸에 윤이 나는 양들이 있는 곳을 슬픈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양들이 집을 나가더라도 주인은 나 몰라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절벽을 헤매다 결국은 못된 짐승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본문의 잃어버렸다 다시 주인에 의해 집에 돌아오게 된 양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주인이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동안에 그 양들은 지금 시편 23편의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

주인에 의해 구원받은 양은 그러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온 것이 기뻐 잔치를 벌이는데 우리는 하나님 품에 다시 안기게 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흘러야만 정상입니다. 구원받은 기쁨,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만족감이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그 기쁨을 밖으로 표현하는 방법은 예배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기쁨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올 때, 그리고 나갈 때에 우리의 마음은 기쁨이 넘치고 그것이 얼굴에 환한 미소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벌이는 잔치입니다. 축제입니다.

또한 우리가 예배 후에 갖는 교제의 자리도 바로 그런 축제의 연장입니다. 음식을 서로 나누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귀한 자리가 바로 '음식 교제'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모습으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인가요? 우리의 기쁨은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기쁨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예수님이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일까요? 양 백 마리 가진 목자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잔치를 벌이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니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쁨이 바로 하늘 나라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가면 하늘 나라를 얻게 되는데 이때 하늘에서 벌어지는 잔치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그러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마다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은 주인이 잔치를 베푼 것처럼 잔치를 베푼다는게 바로 요점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 부분을 특별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늘에서는 잔치를 벌입니다. 죄인이었던 사람 하나가 하나님 품에 돌아오는 순간, 하나님은 기쁨에 넘쳐 천사들을 불러 천국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라, 오늘도 에반스빌에서 내 잃어버린 양한마리가 돌아왔구나, 내 어찌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 이제 기쁨의 잔치를 벌여보자'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한 영혼이 돌아올 때마다 그런 잔치가 열린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십니까?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기뻐하십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온 산골짝을 헤매시는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그렇게 하나님 품에 돌아오는 것을 그 무엇보다 기뻐하십니다. 바로 그런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먹지 못하여 세상의 썩어져 갈 것으로만 배불러 곧 영영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들… 울부짖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며 속일 자를 찾고 있는 사탄의 꼬임에 속아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믿는다 하면서도 한 발은 저 세상의 웅덩이에 담가놓은 채 그것에 자꾸 빠져들어가는 사람들…그런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오세용 목사 / 에반스빌 제자침례교회 담임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대로 해드려야 합니다.

그런 일을 위해 쓰임받는 우리 교회,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세용 목사 / 에반스빌 제자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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