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달을 가리켰는데 손가락을 보는 기독교

달을 가리켰는데 가리킨 달은 보질 않고 손가락만 쳐다본다는 격언의 뜻을 모를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으리라고 본다. 거대하리만치 기가 막힌 이러한 상황 연출이 오늘날의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의 인식과 태도에 딱 들어맞는 얘기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도대체 무슨 얘긴가.

예수는 이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다. 현대의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예수 공생애의 핵심 주제가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라는 점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예수는 이 땅에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다가 결국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여기서 '달'이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다. 예수는 죽기까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 나라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설파했던 예수 자신이 그 중심주제로서 자리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잘 보면 알겠지만, 복음서에서 바울 서신을 비롯한 여러 서신들의 주제로 옮아갔던 것은 바로 그 주제가 <하나님 나라>에서 <기독론>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예수 공생애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의 비유와 말씀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복음서 외의 바울 서신을 비롯한 다른 서신들에 이르면 예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그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설파했던 예수의 대한 선포(kerygma),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그 중심주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들은 꽤 많다. 나는 지금 내 멋대로 창작한 학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신약학 개론서만이라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금방 캐치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보수권 신학서적들은 이 점을 지적한 언급들이 별로 없는 반면에, 진보신학자들에게 이 사실은 이미 당근으로 통하고 있을 정도다. 직접 비교해보라).

이런 점에서 오늘날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바울에 대한 분분한 논쟁도 없잖아 있다. 예컨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숱하게 언급하면서도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역사적인 기소 이유나 그 처형 장소인 골고다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하질 않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신학적 관심사가 달랐을 것이기에.

물론 보수권의 학자라면 예수와 바울 사이의 복음의 연속성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이겠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나름대로 연속성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또한 그렇지 않은 학자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앞서 분분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 자신은 예수와 바울 사이의 연속성의 입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보수적 의미로서는 아니다. 어쨌든 이는 오히려 바울신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문제와도 관련을 갖기에 또 다른 얘길 해야 하는 터라 여기서 언급하진 않겠다.

'천국'과 '천당'을 정확히 구분할 줄 모르고서 쓰는 한국 기독교

또 하나, 오늘날의 신앙적 행태를 볼 경우 특기할만한 사항을 먼저 짚고 넘어가려 한다. 나중에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에서도 자세히 얘기할 것이지만, 예수가 설파했던 그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은 개역 성경에선 <천국>으로도 번역되는데, 이것이 소위 기존 기독교인들에게는 그토록 말하는 <천당>과 혼용되어 버려서 결국은 오늘날 '천국'과  '천당'을 제대로 분간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다. 이 자리를 빌어 분명히 말하지만, 천국과 천당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천당'이란 개념은 죽고 나서 죽은 뒤의 우리의 영혼이 영원복락을 누리는 내세라는 이원론적 개념에 해당한다. 반면 '천국'이란 개념은 죽고 난 뒤의 영원복락의 내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현세와 내세라는 그런 구분 없이, 그것이 내세든 현세든 어디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정의가 통치하는 그 나라라면, 그 나라가 곧 천국,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설파했던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내세적인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며, 이런 점에서 천당과도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천당'이란 표현은 성경 어디에도 없는 개념이다.

▲ 예수는 낮고 천한 곳에 왔지만 기독교는 도리어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높은 곳에 예수를 두어 신격화해 버렸다.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기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 땅에서의 역사적 예수의 삶인 하나님 나라 운동은 쏘옥 빠져 있다. (사진 엠파스 검색)
나중에 할 언급인데도 나 자신이 여기서 미리 이 얘길 꺼낸 이유가 있다. 바로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오류의 패턴을 오늘날의 주류 기독교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뭔가? 바로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를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혼용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나타난 재밌는 현상 하나는,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믿되 예수의 역사적 삶을 따라 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예수와 바울 얘기도 했었지만, 사실상 여기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식의 잘못된 이신칭의 교리가 암암리에 퍼지게 된 연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제 우리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면서 축척된 그 학문적 담론들을 일별해보고, 도대체 '역사적 예수'를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와 차후에는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최신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내용도 제시해보고자 한다.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교리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엄밀하게 다르다. 전자는 '교리에 관한 예수'이며, 후자는 곧 <실재적 예수>(real jesus)를 의미한다. 이때 교리적 예수란 본래의 실재적 예수에다가 일종의 시대적 정황과도 관련되는 성서기자의 삶의 자리와 해석이 덧붙여져 점차 공식화한 '도그마로서의 예수'를 일컫는다. 사실 당시 초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자체부터 이것은 이미 실재에 대한 해석이었지 실재 자체에 대한 직접적 기술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가 있었기에 궁극적으로 교리가 나올 수 있었겠지만 그 역은 아니다.

많은 예수 연구가들은 이 땅에서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던 실재적 예수의 역사적 행태를 일컬어 일명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것은 적어도 기존의 주류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Jesus as Christ)가 나올 수 있었던 '본래의 <원 사건>(original event)으로서의 예수'로 봄으로써 구분한다. 이때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다른 표현으로는 <케리그마>(Kerygma)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자 일찍이 설교에서부터 이미 확립되고 전승되었던 예수상이며, 나중에 니케아 신조 등 교리적ㆍ신화적 예수로 발전되어 기독교 안에 굳건한 교회 전통으로서 자리하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예수상은 바로 교리적 예수에 속한다. 예컨대, 한국교회가 보는 예수는 '독생자로 오신 동정녀 탄생의 예수,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후 다시 재림하실 예수'가 그 핵심이다. 그리고는 이것이 곧바로 실재적 예수, 역사적 예수로 둔갑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역사적 예수의 삶인 하나님 나라 운동은 쏘옥 빠져 있다. 다시 말해, 한국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다기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혹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공부가 전혀 없으셨거나 이런 얘길 처음 듣는 분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이 아마도 이렇게 따지실 분도 있을진 모르겠다. 교리적 예수나 역사적 예수나 같은 것인데, 이 둘을 왜 구분하냐고 말이다. 원컨대, 제발 어디 가서 그런 얘길 하시기 이전에 본인이 이런 얘길 하는 이유를 굳이 알고 싶으시다면 그냥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서들 아무 거라도 좋으니 꼭 보시길 바란다. 행여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보길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케리그마의 궁극적 원인자는 역시 역사적 예수

이미 신약학자 불트만(R. Bultmann)은 복음서가 케리그마의 집산이라고까지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케리그마'란 말 그대로 '선포'를 뜻하는데, 이것은 앞서 얘기한 예수에 대한 고백에 해당하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 달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라는 초대교회에 형성된 신앙고백으로서의 예수를 일컫는다. 이는 선포다. 따라서 이미 먼저 주어진 것이며, 사실상 이 부분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판이 불허되는 지점이다.

대부분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아마도 비판은 생각조차 안할 것이리라. 기독교의 근간을 여기에 두기도 하니까. 만일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여기저기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비난할 것 또한 뻔한 것! 어쨌든 일찍부터 초대교회에 형성된 신앙고백에 해당하는 케리그마의 예수상(象)이 자리함으로서 결국은 이후의 많은 자들의 신앙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끝까지 그 케리그마가 나올 수 있게 된 배후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적 예수를 오늘날의 우리가 곧바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자신들은 적어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그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체험만은 아직 부재한 것이다. 분명히 케리그마의 근원적 실체는 결국 역사적 예수로부터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라도 있어야 성서에 쓰인 신앙고백의 예수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든지 말든지 할 수 있잖은가.

도대체 어떤 것이 사실(fact)인가? : 복음서들간의 불일치

골치 아프게 따질 것 없이 그냥 무조건 믿어라? 이는 여전히 보수 기독교인들이 잘 쓰는 수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말대로, 머리가 거부하는 것이 있는데도 가슴이 계속 예배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내 머리로는 잘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냐고?

그렇다면 약간만 언급해보겠다. 사실 이 같은 문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한국교회 대부분의 잘못된 신앙적 습성과도 뿌리 깊게 관련되어 있다(성경해석 문제에 있어선 이번 다음 주제 때 얘기할 것이다. 요즘 생각해보면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주제부터 먼저 했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적어도 헤롯왕이 죽기 전에 태어난 것으로 나오는데 당시 역사적으로 헤롯은 BC 4년경에 죽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탄생은 적어도 BC 4년 이후를 넘을 수 없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분명히 인구조사 때 태어난 것으로 나오는 데, 이는 역사적으로 AD 6년경에 해당한다. 즉, 적어도 10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에만 맹렬히 집착할 경우 분명히 둘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일 게다. 도대체 누구 언급이 사실(fact)인가?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은 실제로 예수의 '발'에 부은 것인가?(요한 12:1~8) 아니면 예수의 '머리'에 부은 것인가?(마태 26:6~13, 마가 14:3~9)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에 나온 예수의 족보를 잘 보면 서로 안맞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예수의 공생애가 3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의 계산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공생애는 1년 정도다. 도대체 어느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사실이 아닌 것은 그냥 버려야 하는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결코 그럴 순 없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과 관련한 빈무덤 기사를 보면 마가복음에는 한 청년이 나오지만 마태복음에는 두 천사가 나온다. 성경을 잘 보면 알겠지만, 마가복음은 본래 16장 8절이 마지막이다. 나머지 글은 후대의 첨가다(더러는 이 점을 표시해놓은 성경책도 있다). 요한복음의 경우도 21장은 후대의 첨가다. 왜냐하면 20장의 마지막 부분을 잘 보면 사실 끝맺음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만 나오지만 예수의 탄생 때 무수한 아기들이 죽었다고 나온다. 또한 복음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그냥 찢어지고, 태양이 빛을 잃어 컴컴해지며, 땅이 흔들려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기록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면, 당시의 유대사가 요세푸스나 여러 기록들에 의해서도 기록되었을 법 하다. 그런 초자연적 현상을 본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하지만 무수한 아기들의 죽음도 그렇고 예수의 십자가 현장의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기록들은 복음서를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단 한 줄조차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지금 내 멋대로 지어내서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얘기들은 논의의 여지가 없이 학계에서도 정설로 통용되는 것만 추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설이 다는 아니라고 항변할 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할 경우 그냥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아예 공부해보지도 않고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주변에 참 많잖은가. 혹시 여러분은 이런 얘길 처음 듣는가? 설마 그래서 두려운가?

실은 목사가 신학교에서 이런 걸 배웠어도 교회에서 평신도에게 이런 얘길 안하는 이유도 있다. 물론 별 필요성을 못느껴서일 것이다. 게다가 이런 얘길 교회에서 하게 될 경우 목사가 볼 때도 피곤한 것일 수 있다. 그냥 목자가 주는 거나 얌전히 잘 받아나 먹지, 무슨 놈의 성서비평이 어떻고, 역사적 예수 타령이냐고. 교인수 증가(=십일조 증가)에 도움되는 것도 아닌 것을. 궁극적으론 이에 대한 거대한 이유와 이해관계들이 있지만 여기서 상세하게 논하긴 그렇고 작금의 역사적 예수라는 주제를 위해서 이 얘긴 이만 접고자 한다.

▲ 위는 영국 BBS 방송국에서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최신의 법의학적 지식과 컴퓨터 기술을 총동원하여 역사적 예수에 가까운 얼굴 모습을 복원해 본 예수의 얼굴. (사진 엠파스 검색)
어쨌든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예수 이해에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성과들은 반영되어 있지도 않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나타난 예수를 역사적 예수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문자주의에 기인한 예수요, 그렇기에 실재적ㆍ역사적 예수를 오히려 박제시켜 놓은 죽은 예수일 뿐이다. 그러한 이해는 사실상 예수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물론 그 영화보고 은혜 받은 사람들도 참 많았을 텐데, 나의 이런 얘기가 매우 달갑지 않게 들릴 것이란 점도 잘 인지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기나긴 학문적 축척들을 쌓아온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 어떠한 것인지를 잠시 개관해보자.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제1탐구 시기

알다시피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주의 발달은 성서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것은 거룩한 성서에다가 바로 이성적 비평의 잣대를 들이댔다는 것이다. 이때 구약에서의 주된 포인트가 된 문서가 모세오경이었다면, 신약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발전과 함께 신약학도 나름대로 발달해왔었다고 하겠다. 물론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가 신약학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신약학의 매우 중요한 주제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위 자유주의 신학(liberale Theologie)은 이로 인해 움튼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중세 교회의 도그마를 탈각시키고 예수에게서 천상의 그리스도라는 박제를 벗겨내는데 힘을 기울였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사실만을 앞세우고 기적이나 신화들에는 별로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는 근대 세계관이 가졌던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낙관적 신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점은 자유주의 신학의 치명적 한계이기도 하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최초로 학문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H. S. Reimarus : 1694~1768)라는 학자였다. 그에 따르면 예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신화적인 여러 교리로서 예수를 볼 것이 아니라 종말론의 지평에서 청년 예수의 삶을 볼 것을 말하고 있다. 이른바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와 '신조로서의 예수'를 구분함으로써 거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에 스트라우스(S. F. Strauss)라는 학자는 <비판적으로 검토한 예수의 생애>(1835)라는 방대한 책에서 복음서 안의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와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예수'를 세세히 구분시켜 놓았다. 그 반향은 매우 커서 결국 튀빙엔 교수직에서 물러날 정도였다. 스트라우스 이후에도 역사적 예수 탐구는 바이쓰(J. Weiβ), 켈러(M. Kahler), 카우츠키(K. Kautzky), 브레데(W. Wrede) 등등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서 연구되어졌다. 여기서 굳이 각각의 학자들의 연구내용들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20세기 초에 그때까지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들을 단 한 방에 끝장내버리는 결정판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알버트 슈바이처(A. Schweitzer)의 명저인 <예수 생애 연구사>(1913, 번역본 있음)이다(제1판은 1906년에 나왔었고 본래의 그 제목은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였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기에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는 여기서 지난 200년 동안에 나온 600여 편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들을 신학적으로 총정리하고 평가하였다. 그가 보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묵시적 종말론자였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내린 가장 끔찍한 결론은 그때까지의 모든 역사적 예수 연구들은 본래의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이 될 수 없고, 각 저자의 시대상의 반영을 오히려 역사적 예수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폭로한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알버트 슈바이처는 그때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하여 일종의 파산선고를 내린 셈이다. 그리고서 그는 얼마 뒤 화려한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의료선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버린다. 이로써 그동안 활발하게 연구되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학자들은 그때까지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가리켜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제 1 탐구' 시대라고 일컫고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無)탐구 시기와 제2탐구의 발흥

이후에 역사적 예수는 무(無)탐구 시대로 접어든다. 슈바이처 이후에는 굳이 나서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무(無)탐구 시기에 나온 신약학 저서로 유명한 것이 바로 불트만(R. Bultmann)의 유명한 <공관복음 전승사>(1921)와 <신약성서 신학>(1953)이다(둘 다 한국어 번역본 있음). 무(無)탐구 시대의 목소리에 걸맞게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탐구의 불가능성과 불필요성을 얘기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불트만의 입장은, 양식비평을 통해 복음서는 이미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임을 밝혔고, 또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를 전제하고 있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불가능할뿐더러 불필요하다고까지 보았었다. 무엇보다 불트만은 어느 누구보다도 성서를 엄청 치밀하게 분석하리만큼 역사비평적 방법에 매우 충실한 학자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그는 영미권에서도 일급의 신약학자로 통할 만큼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업적은 무시못할 수준임― 생전에도 유명했던 학자의 최종 결론이 결국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불가능, 불필요 선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입장은 놀랍게도 그의 제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케제만(E. Käsemann)은 그 같은 불트만의 입장에 대해 "The Problem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글에서 불트만의 연구 성과들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없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 있다면 가현설(Doketismus)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고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후기 불트만 학파가 출범을 하게 되고,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탐구(New Quest)인 제 2 탐구 시대가 열린다.

제2탐구 시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로는 훅스(E. Fuchs)와 보른캄(G. Bornkamm)을 들 수 있겠는데, 훅스는 1956년에 발표한 그의 저서에서 복음서의 등장하는 예수의 행태에 주목하면서, 가난한 자, 세리, 창녀 같은 당시의 죄인들과 함께 한 밥상에서 먹는 식탁교제를 역사적 예수의 두드러진 행태로 보았었다. 특히 그는 바울서신이 복음서보다 앞선 것에 착안하여 바울이 말한 부활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밝히는 데에 주력하였다.

보른캄은 <나자렛 예수>(1956, 번역본 있음)에서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보른캄은 말하길,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보도들은 모두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신악고백 전승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의 추종자들이 주관적으로 체험한 환상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 대한 초대교회의 응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제2탐구의 특징은 대체로 불트만의 입장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촉발된 터라 그런지 케리그마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을 밝히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다. 제1탐구는 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예수에 대한 물음이었다면, 제2탐구는 후기 불트만 학파에 의해 주도된 역사적 예수 탐구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제1탐구와 제2탐구 모두 유럽쪽 특히 독일신학자들의 연구에 몰려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물결 : 제3탐구

그러다가 1985년부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새로운 경향이 ―특히 북미권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라고 불려진다. 이 흐름은 그전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는 다른 변별된 특징들을 보여주면서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매우 새롭고도 많은 영향력을 가져다주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물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계속 이어집니다.)

* 혹시라도 위에 언급한 나의 글들이 매우 위험스럽게 들리는 분들에게
나는 무슨 지어낸 얘길 꺼내거나 무슨 대단한 새로운 내용을 말한 것도 아니다. 이쪽 분야에 이미 공부하신 분들에게는 너무나 상식적으로 일반화된 얘기들을 조금 정리한 것뿐이다. 일단 가장 기초적인 워밍업 단계로서의 책으로 <신약성서개론-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2002, 대한기독교서회)를 추천하고 싶다. 신약공부의 전초적인 맥을 짚어준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저자가 아니라 한국의 알만한 여러 신학대의 13명의 신약학 교수들이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인들을 위해서 2년간이나 공들여서 펴낸 책이다. 책을 읽어본다면 알겠지만, 여러분들이 위험하다고 보는 이런 내용들을 -외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많은 신학교에서는 이미 예장통합, 감리교, 기장측 할 것 없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진보 진영의 신약공부 책으로는 <함께 읽는 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도 읽어볼 만하다. 이 책 역시 한 사람의 저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이 공들여서 펴낸 성경교재이다. 혹시 자기가 다니는 교회신앙만 전부 다인 줄 알다가 이런 책을 처음 들춰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매우 놀랍게 여기리라는 생각도 들 듯 싶다.

* 역사적 예수에 대한 국내 참고도서들
알버트 슈바이처,  <예수의 생애 연구사>, 대한기독교서회
루돌프 불트만,  <공관복음서 전승사>, 대한기독교서회
루돌프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성광문화사
귄터 보른캄, <나자렛 예수>, 대한기독교서회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마커스 보그 편저, <예수르네상스>, 한국신학연구소
김명수, <역사적 예수의 생애>, 한국신학연구소
게르트 타이센,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김진호, <예수 역사학>, 다산글방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존 도미닉 크로산, <예수-사회적 혁명가의 전기>, 한국기독교연구소
로버트 펑크,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마커스 보그, <예수의 의미>, 한국기독교연구소
리처드 홀슬리, <예수와 제국>, 한국기독교연구소
(특히 한국기독교연구소의 책들은 '제3탐구'에 해당하는 최신 역사적 예수 연구의 책들을 많이 펴내고 있다. 위의 책들은 대략적으로 뽑아본 것이다.)

*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좋은 사이트
www.jesuyongu.com/theoryFramese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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