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9:57~62)

도(道)를 수련해서 어떤 경지에 이르는 길은 많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태권도라든지, 세상의 많은 종교의 '도'라든지, 명의가 되는 과정의 '길'이라든지, 하물며 요가의 정수를 터득하는 길까지 모든 도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터득하는데도 그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딤전 3:9)라고 했고,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경건'은 '믿음'의 뜻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특히 '비밀'이란 것은 헬라어로 '무스테리온'이란 의미로 동방신비 종교에서 종교적 입문식에 사용되어 종교정책적 교리나 신비적 전설의 전수를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비밀'이란 '숨은 뜻' 또는 좀더 재미있게 표현해서, '유단자'(有段者)란 의미입니다. 유도나 바둑의 "초단이다, 9단이다" 하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유도나 바둑의 9단 정도라면 유도나 바둑의 세계에서 그 진수를 도통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처럼 신앙세계의 도리, 진리를 터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의 '유단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숨은 비의(秘義)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주를 따르겠다고 나선 본문의 구도자 세 사람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지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직업난이 심해서 신학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목사가 되려는 자나 이미 된 자에게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이 넘치다 식을 수 있는 구도자

첫 번째 구도자는 자원해서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입니다. 한 때 어떤 충격과 감명을 받은지는 모르나,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열광적인 태도는 좋으나, 쉽게 식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동문서답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이런 자의 열광을 선동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마침내 그 열광의 노예가 되어 멸망시킬 뿐임을 아시고, 예수는 그에게 찬물을 뿌려서 정신을 차리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를 따르기 전에 먼저 값을 계산해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다른다는 것은 손익계산에서 전부 손해 뿐인데 그래도 따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굉장히 정직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는 첫 공생애를 시작하신 분으로 이런 열혈분자를 많이 따르게 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요사이 개척교회 하는 분들의 심정은 "누구라도 좋다"는 심정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나오면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보다 더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에 비하면, 예수께서는 너무 냉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납니다.

하였튼 예수는 허위로 사람을 유혹하는 그런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길이 가시밭길이란 것을 사실 그대로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 인자는 이 세상에서 박대를 받고, 평안히 쉴 만한 장소도 없다고 없다고 하셨습니다. 철저한 고난의 길을 걸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주의 길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시금 물어오는 주님의 음성이라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보다 율법의 요구를 따르는 구도자

두 번째 구도자는 첫 번째 구도자와는 다르게 자진해서 예수를 따르지 않고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나를 따르라"고 불러서 그의 결심을 촉구했던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서 그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려는 강한 열정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결단을 내리기 전에, 무슨 구실이 있어서 그 결심을 연기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장사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를 허락하실 것으로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인륜지사에 속하는,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윤리 문제인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말하면 율법입니다.

이 사람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윤리도덕이요, 율법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각은 율법보다, 윤리도덕보다 복음이 우선이라는 의미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소명 앞에는 다른 이유를 달지 말고 즉시 따를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모든 일은 때가 있는데 그 때를 놓치면 다시 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절박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좋은 생각이 실행되지 못하고 번번이 억압되어 버리면 그 실행은 더 어려워 집니다. 어떤 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위로, 감사 혹은 치하의 메일을 하리라 생각하고 하루 하루 미루면 결국 오래 지체되거나 아주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의 의도는 우리 마음이 동할 때, 좋은 일은 선행하라는 교훈으로 받아도 되겠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구도자

세 번째 구도자는 예수를 따르려는 열심도 있지만, 동시에 이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른 말로 해석을 해보면, 자기 쪽에서 먼저 '조건'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그 조건에 자기를 완전히 결박 당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따라갈 마음은 있으면서도 자신과 예수 사이에(중간에) 무엇을 끼어넣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선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따르는데는 먼저 조건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의 순종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요, 이 가능성의 실현은 어디까지나 어떤 조건과 가설의 실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은 인간적 관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요, 저것이 다음이라는 순서와 권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드려 예수를 섬기고자 하나, 그 대가로 먼저 조건이 제시되는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 대한 순종은 이 순간 이미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자신의 판단력을 따라 합리적, 윤리적이고 타당성 있는 한 사람의 계획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잘라 말해서 이 제3의 구도자는 예수를 따르려고 하면서도 조건을 내세움으로 따라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가 순종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끼어 들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순종 그 자체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허락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결국 예수만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배신한 자입니다.

예수의 뜻을 그가 원치 않은 것은 곧 자신의 본 뜻도 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일으켜 세웠으나 즉석에서 넘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먼저 허락하옵소서"라는 말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는 이 말을 구체화하여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위험과 고난 없이 주님의 제자 수행할 생각 말라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것을 뜻합니다. 소명에 따라 옮긴 한 발자국은 이미 지금의 생활에서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오라는 부름은 즉석에서 생활태도를 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옛 태도를 지속하면서 따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는 세관을, 베드로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르게 세리에게 새 하나님만 인식시켜 주고 옛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였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예수가 성육신하시지 않은 상태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도요, 자신의 말씀은 한갓 교훈이 아니라, 생명적 새 창조의 능력임을 스스로 밝혀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예수와 같이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부름을 받은 자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오직 예수만을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해석은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제3구도자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뜻은 과거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송두리째 버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석양을 향해 구슬진 걸음을 걷지 않고, 여명을 향해 희망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구호는 언제나 '뒤로 가'가 아니라,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전심전력하사 자발적 적빈(赤貧)을 택하시고, 가족과 친구들의 소원함을 무릅썼으며, 비방과 위협을 감수하셨고, 결국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직을 위험과 고난없이 수행할 생각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때 감정적으로 흥분되고, 이런저런 감격으로 그냥 도취한 상태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한 자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이다. 이 길은 고난의 길인 것을 각오하고 또 다짐하고 또 한번 다짐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라 가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따르라는 소명이 있었는데도 손익을 따지고, 양다리 걸쳐서 머뭇거리는 자는 아닌지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따라야 하는데, 먼저 조건을 제시하여 조건에 맞으면 따르겠다는 제자는 아닌지 자신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이미 따르면서 옛날 모습 그대로, 과거의 것을 청산하지 못하고 따르는 자는 아닌지도 고요히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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