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어느 꽃밭에 해바라기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둘은 자기들의 영원한 이상인 해님을 향하여 뻗어가며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의 눈에는 나팔꽃이 기댈 곳을 찾아 그들 사이를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팔꽃은 먼저 아우님 해바라기에게 부탁을 해봅니다.

"작은 해바라기님! 저는 혼자서는 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저는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해바라기 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신다면, 해바라기 님께 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동생 해바라기는 대뜸 화부터 내고 맙니다.

"뭐라구? 나는 너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딱 질색이야! 나는 누군가가 내 몸에 와 닿는 것이 싫어. 나는 저기 하늘에 보이는 해님을 향해 커가기에도 벅차단 말이야. 그러니 다른 데나 가서 알아보라고."

작은 해바라기의 가시 돋친 말에 잔뜩 주눅이 든 나팔꽃은 이제 큰 해바라기에게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큰 해바라기는 발치의 나팔꽃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큰 해바라기의 미소에 힘을 얻은 나팔꽃은 이번에는 큰 해바라기에게 부탁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큰 해바라기님! 저는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존재랍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기대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좀 거추장스러우시더라도 큰 해바라기님께서 저의 기댈 곳이 되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큰 해바라기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큰 해바라기님께 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과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나팔꽃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가씨의 버팀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사실 해님만을 향하여 경쟁하듯 달려온 저의 길은 각박하기만 했답니다. 아가씨와 함께 저기 하늘의 해님을 향한 여행을 하고 싶군요. 어서 아가씨의 여린줄기를 저의 몸에 기대세요. 제 몸에는 작은 솜털들이 박혀 있긴 하지만, 아가씨가 조심조심 타고 오른다면, 못 오를 리 없을 거예요."

큰 해바라기의 기꺼운 허락을 받은 나팔꽃은 큰 해바라기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큰 해바라기의 몸에는 작은 솜털들이 박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팔꽃은 솜털들이 자신의 줄기에 박히는 아픔을 견디면서 큰 해바라기의 몸을 부지런히 타고 올라갔습니다. 이제 형님 해바라기의 몸은 그야말로 연분홍 나팔꽃들로 화려하게 옷 입혀져 있었습니다. 나팔꽃들로 인해 형님 해바라기의 풍성함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갈 듯한 기세로 밤새도록 몰아쳤습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동이 틀 무렵, 그 꽃밭에는 작은 해바라기가 목이 꺾인 채 흔들거리고 있었고, 큰 해바라기는 상처 하나 없이 늠름하게 서 있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수많은 나팔꽃 줄기들이 막아주었던 것입니다. 거센 비바람을 이겨낸 형님 해바라기와 그 몸을 휘감아 오른 나팔꽃들 위에 해님이 따사로운 빛살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의 모듬살이를 빗댄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모듬살이라고 하지만, 남이 자기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자기 주위에 또 다른 울타리를 둘러치고, 자신만의 영역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모듬살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모듬살이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외톨이일 뿐입니다. 작은 해바라기가 보여준 삶의 방식은 자신의 마음 문을 닫아 잠근 채, 그 누구도 자신의 곁에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혹자는 개인주의라는 미명 하에 그런 삶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는 약자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강자만이 조명을 받을 뿐입니다. 남을 돌아보지 못하는 키 재기나 힘 겨루기는 남도 파멸시키고, 결국에는 자신도 파멸시킨다는 것을 작은 해바라기의 삶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부살이를 용납하는 모듬살이입니다. 그것은 큰 해바라기의 삶의 방식입니다. 비록 저마다 핵이 되어 이룬 모듬살이이지만, 그 안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품어 안고, 약자가 강자에게 기댈 수 있는 더부살이를 용납하는 모듬살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힘있는 이는 힘없는 이에게 든든한 버팀대가 되어주고, 힘없는 이는 힘있는 이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은 선물을 주는 더부살이야말로 우리네 모듬살이가 추구해야 할 생활방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이런 모듬살이 속의 더부살이를 자비가 넘치는 삶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자비가 넘치는 삶이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사전 속에 묻혀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자비를 각박한 우리네 삶의 한가운데로 옮겨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어느 문인은 '나쁜 사람'을 '나뿐인 사람',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자비가 넘치는 사람은 그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자비란 "자신만이 유일한 존재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해바라기가 자신의 몸을 나팔꽃에게 내어주었듯이, 자비가 넘치는 삶은 나와 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와 만물이 상호 의존하고 있음에 눈뜨는 삶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이 줄곧 견지하시는 주제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선(善)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은 자비입니다." 그러니까 자비가 넘치는 삶은 하느님의 마음에 어울리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서로를 버티어 주는 '더부살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가 넘치는 삶이며, 하느님을 추구하는 이에게 어울리는 삶입니다.

남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남이 자신의 세계에 틈입하는 것을 거북스러워하며, 남이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외로움을 타는 개인주의를 버리고,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을 내어주고, 서로를 더욱 든든하게 세우는 '더부살이'로 나아가는 것이 어떨는지요?

김순현 목사 / 고현감리교회 담임

이 글은 계간 <샘> 2003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