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 45~53)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바리새인들에게 알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보고 받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공회는 입법권 및 사법권을 가진 유대의 최고 의결기구였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회와 대법원을 합쳐놓은 권력기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공회가 나사로 부활 사건 때문에 열렸다는 것은 그만큼 나사로 부활 사건이 권력층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만큼 갈릴리 목수 출신 예수의 행적이 권력 상층부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표적을 많이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결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와 세리와 창녀들을 멀리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규정한 부정한 사람들을 멀리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워놓은 유대적 가치관을 파괴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들의 걱정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로 부활 사건과 같은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를 것 같았습니다. 만약 유대인 모두가 예수를 따르게 된다면, 장구한 세월 동안 유지시켜온 유대 민족의 정체성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이 일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정치 9단의 가야바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수의 행적을 살피면서 그들 내면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사람 모두가 예수를 따르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자신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해서 만들어낸 두려움일 수 있고, 아니면 객관적 판단에 의한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상상 속에서라도 이와 같은 두려움을 가졌던 것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면에서도 위험한 인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는 순간 예수와 그 일당은 민중봉기를 일으켜 로마에 맞서게 될 것이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로마는 하루아침에 유대 땅과 민족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배 상황에 놓여 있기는 했지만, 로마의 온건한 식민지배 정책에 의해 정치적인 면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 있어서는 유대의 정통성을 유지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섣부른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상황을 더 파국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유대민족이 지구상에서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인물로 판단한 것은 큰 오류였지만, 섣부른 민중봉기가 유대를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 30년 후에 유대에 민중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로마 군대는 유대와 예루살렘은 초토화시켰고, 유대 민족을 전 세계로 흩어버렸습니다.

많은 공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염려를 늘어놓았으나 예수의 활동을 가로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에게 여러 번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점점 더 왕성하게 활동하였습니다. 논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논리 싸움에서도 밀렸습니다. 군중들 앞에서 망신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결국에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난감해하는 상황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아무 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가야바를 포함한 대부분의 공의회원들은 오래 전부터 예수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또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고 할 때 이미 죽일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군중들 앞에서 그를 무력화하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체포 조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놓은 덫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가 그들의 속마음을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허점들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해보아도 예수의 설명이 완전히 틀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죽일 명분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역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탁월한 정치 9단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도 남음이 있는, 어느 누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그런 명분을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대의명제였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민족 전체의 운명을 상정하고 만들어낸 명분이었습니다. 굳이 예수를 죽일 마땅한 이유를 예수 개인의 행동과 가르침에서 찾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을 때 찾아오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히려 일을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또는 일을 다 해치우고 나서도 뿌듯한 의협심을 갖게 하는 그런 명분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가야바의 평화'

가야바가 말한 명제는 일명 '마이너스 일의 평화'였습니다. 절대다수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자를 과감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분연히 일어나서 모인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왜 이렇게 모르느냐고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무지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에게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자고 하였습니다. 민족의 운명 앞에서 주저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굳게 결심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의 운명 앞에서 한 사람의 희생쯤은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야바의 연출에 모인 사람 모두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날 이후 공회는 하나되어 움직였습니다. 대제사장, 그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마이너스 일의 평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간의 다양한 심리 현상들이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독재자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국가와 사회, 교회와 가정을 지배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곧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교회와 가정의 절대 기준과 규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국가와 민족, 교회와 가정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합니다.

대신에 그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이 곧 국가나 사회, 공동체의 생각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의 통치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사회 안정을 해치는 나쁜 바이러스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통치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일에 과감합니다. 사회 안정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일이 가정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 자신을 위하는 일입니다.

또한 마이너스 일의 평화는 집단 안에서 안정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집단에서 떨어질 때 공포를 느낍니다. 특히 부조리한 집단에 속해 있을 경우 그 집단이 휘두르는 폭력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낍니다. 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체들은 집단과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집단이 행하는 극단적인 폭력에서 벗어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단과 동일시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는 부조리한 집단의 희생양이 됩니다.

희생양이 생기게 되면 다른 개체들은 잔인성을 발휘해서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 충성심이 인정되는 만큼 개체들은 집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희생양의 희생으로 인해 다른 개체들은 잠시 동안 집단과 하나가 되고, 나머지 개체들은 안정감을 얻습니다. 희생양이 사라지면 마이너스 일이 평화를 아는 개체들은 자신은 아니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희생양을 찾기에 열을 올립니다. 희생양이 있을 때 한 나머지 개체들은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깃든 폭력의 상스러움

진중권씨는 그가 쓴 <폭력과 상스러움>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내제되어 있는 마이너스 일의 제의는 한 사회와 국가 차원을 넘어 세계사적인 영역에까지 그 맹휘를 떨친다고 주장합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를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순수해지고 전체의 동질성은 강화된다. 불순물을 배제할수록 공동체는 신선해지고 이 신성함이 휘두르는 폭력은 가볍게 인간적 규모를 넘어선다. 성스러운 아우슈비츠의 폭력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화적 폭력이다. 내적 동질성의 강화는 곧 외적 배타성의 강화다. 공동체가 정화되어 더 이상 이물질이 없을 때, 그리하여 더 이상 내부에서 적을 찾아볼 수 없을 때, 폭력은 이제 '세계사적 사건'을 저지르러 밖으로 뻗어나간다."

이와 같은 마이너스 일의 평화를 통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인류 사회에서 희생되어 왔습니다. 지금도 학교 교실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크게는 국가와 세계 속에서 마이너스 일의 평화를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양육 현장에서 마이너스 일의 평화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일명 왕따라고 부르는 따돌림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도 크고 깊기에 그 고통이 지나간 이후에도 수십 년간 그 고통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야만적인 마이너스 일의 평화가 없는 세상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인간의 삶과는 정반대로 살아가셨습니다. 그 분은 유대사회가 왕따시킨 사람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녕'을 위해 집단 속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집단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집단에게 충성심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끌었던 것은 전체를 위한 마이너스 일의 평화가 아니라,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명제였습니다. 이 명제를 따랐기에 그의 눈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집단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그들의 존엄성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정신차리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마이너스 일의 평화를 너무 쉽게 적용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아빠만 없으면, 엄마만 없으면, 형만 없으면, 동생만 없으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쉽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 교회에 저 사람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누구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꺾지 않은 이상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의 행동과 농담 속에서 한 사람이 왕따를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가족 중에, 공동체 중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 그들을 떠날 수도 있고, 그들을 가족 혹은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런 결정을 내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면 품을 수 있는 사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또한 마이너스 일의 평화를 종종 생각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을 알고 나서도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양육 상황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양이 있을 때, 양의 문제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졌을 때 그 양이 떠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이런 나의 생각을 오랫동안 품을 수 없었습니다. 마이너스 일의 평화는 내가 추구해야할 가치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양을 품다가 죽으면 순교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 이후 나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품기가 힘들어서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어쩔 수 없이 양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는 내가 살기 위해서였고, 또한 양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나긴 과정을 통해서 나는 비로소 양들의 내면에 대해서 이해해 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을 알게 되었고, 그 무의식에 의해서 인간은 지배를 받고 있고, 그 무의식의 세계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태동하는 시점부터 환경에 의해, 특히 부모에 의해서 조성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 조성된 무의식을 파악하는 것, 그리고 그 무의식과 대화하는 것, 나아가 무의식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의식의 세계에서 고쳐나가는 것이 인간치료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생양과 함께하는 사람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것을 깊이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대부분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치료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의 가르침 또한 인간 내면의 깊이 있는 이해에서 나온 것들이자, 인간치료의 핵심들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마이너스 일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내 영역에서 제외시켜갔더라면 이와 같은 귀한 것들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자가 했던 말들 중에 '자신에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듣기에 쓴 말을 하는 사람과 함께 하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쓴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남에게 싫은 말만하고 다니는 사람은 이 말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반대로 이 말을 듣고 자신에게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을 쉽게 내어 치지 않고, 그들을 수용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말의 깊이를 이해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야바의 길을 걷습니다. 오늘도 가야바들은 끊임없이 한 사람의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많은 희생양들은 수많은 가야바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오늘도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집단을 위해서 한 사람의 희생양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집단에서 내어 침을 받은 희생양들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자신에게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수용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는 사람들입니다.

박민수 / 은혜공동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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