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장기려 박사. 그분은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치료한 분이셨습니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북조선의 제1호 의학박사였고, 이산가족으로 전쟁의 아픔을 평생 안고 사신 분입니다. 1986년 박사님은 국제회의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북녘의 가족 소식을 듣습니다. 장남인 장택용씨가 약학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박사님은 정부로부터 북한 방문을 제안 받았습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였습니다. 그때 박사님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뒤에 박사님이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들이 몇몇 지인들로부터 들렸습니다.

"나는 매일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쪽에서 살 수 있든지, 둘 중 하나라면 평양에 가겠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이 저 혼자이겠습니까? 저만 그런 특혜를 받을 수야 없지요."

그리고 1995년의 성탄절, 세상을 떠나기 전 박사님은 아내 김봉숙씨에게 전해달라며 마지막 말씀을 남겼습니다. "떠날 때 두고 온 2남3녀의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에 고마움을 보내며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만남을 기약한다."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6월입니다.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장기려 박사님의 삶은 그래서 오늘에도 희망입니다. 오늘 박사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당신의 사랑이 가족애에 머물지 않고, 민족애에만도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을 희망을 길어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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