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3:33)

우리는 서로 영향을 받지만 또 주기도 합니다.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내가 남에게 뜻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나아가 겸손케 됩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뜻있는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대단한 품격과 능력이 있다고 남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남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힘에 의해 그렇게 빚어 나온 것일 뿐입니다. 마치 누룩이 밀가루와 반죽하여 불어나듯이 말입니다. 누룩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보잘 것 없는 누룩이 이렇게 저렇게 반죽이 되어 점차 커지고 펼쳐집니다. 기묘하게도 부풀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별것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신령한 힘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시는 권능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힘 때문에 우리가 가진 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실로 볼품 없는 누룩이 상상할 수 없는 데로 부풀어 번져나갑니다.

우리 모두 누룩의 고리에 든 한 띠처럼 서로 누룩이 되어,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며 뜻있게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I. 이야기 하나

오늘은 먼저 엉뚱한, 참으로 엉뚱스러운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시민운동 단체의 일로 지난 열흘 동안 중국에 머물 때, 다른 한 분과 방을 같이 쓰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씩 한방을 쓰도록 배치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방을 함께 쓸 분은 60이 된 노신사였습니다.

첫날 저녁이었습니다. 그 분과 함께 방에 들어와 채 짐을 다 풀기도 전입니다. 그 분이 느닷없이 제게 물었습니다. "신촌교회에 다닌 적 있으시지요?" 아련한 지난 기억을 되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의아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다녔지요. 아주 오래전입니다만."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곧바로 되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신촌교회에 다닌 것을 아시지요?"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의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제 물음이 끝나자마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신촌교회에서 만났으니까요." 저는 정말 어리벙벙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가 나를 그 교회에서 만났다고…?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는 경복중학교 학생이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중고등부를 지도한 선생이었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에 놀러왔다는 것도 이야기했고, 눈이 오는 어느 겨울날에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야산에 올라 거기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그 교회 사람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오랜 세월 안개에 싸인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습니다. 필름을 거꾸로 돌리면서 지난날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그날 밤 그가 살아온 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긴 이야기도 요약해 들려주었습니다. 지난 기억에 북받쳐 우리 두 사람은 제대로 잠들 수 없는 특별한 '북경의 밤'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만남'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듣는 이들도 모두 감격하는 듯 했습니다. 저도 그 이야기에 다시 끼어들어 그 자리의 특별한 느낌에 한층 더 깊게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II. 영의 힘이기에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는 저를 몹시 당혹케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어린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크리스천 비전'을 주었다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또 이었습니다. 그의 신앙 생활에 여러 사람이 끼친 영향이 있었지만 그 신앙 생활의 출발점 가까이에 제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놀라기도 하고 낯이 뜨겁기도 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별것 아닌 대학생 주제에 제가 어떻게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크리스천 비전'을 줄 수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도무지 제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너무도 부끄러워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소스라쳐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크리스천 비전'을 주었다는 것이나 그에게 믿음의 씨앗을 넣어주었다는 것은, 제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단코 제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은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에 누군가가 능력을 퍼부어 그와 같은 일을 빚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헤아릴 길 없는 기묘한 방식으로 뜻 밖에 이루어진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제가 얻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를 데 없이 부족하고 우리의 힘이 실로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신령한 힘을 받아 부족한 것이 능력을 얻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깊은 신비 같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누룩과 같은 것 말입니다. 누룩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로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누룩이 기묘하게 부풀리게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반죽이 되어 점차 커지고 펼쳐집니다.

시작은 매우 미미합니다. 보잘 것이 없습니다.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이 크게 뻗어나갑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것이 별것이 되는 것,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룩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은총으로 내려주시는 권능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대학생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을 교회에서 만나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들려준 것, '크리스천 비전'을 이야기한 것, 그것이 나중에 한 청소년의 신앙 생활에 씨앗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은 나의 능력과 품성 때문이 아닙니다. 결로 나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작은 것에,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에 놀라운 힘을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을 높이 드시는 하나님의 권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감격, 그러한 경험은 저와 같은 한 개인의 삶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한 방을 쓴 그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는 나로부터, 그 작은 신촌교회로부터 신앙의 중요 계기를 얻게 되었지만 그 또한 누룩이 되어, 다른 사람의 신앙에 영향을 끼쳤다고 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조금은 겸연쩍어하며 말했습니다. 누구누구가 자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수줍어하며 들려주었습니다.

그와 저는 이 점에서 생각이 같았습니다. 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을 쓰시어 열매를 맺게 하시는지, 그 오묘함에 우리는 모두 겸손해했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III. 우리 모두 누룩으로

중국에서 저와 한방을 썼던 그 분은 시민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는 운동가입니다. 유수한 미국 대학에서 자연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가르치다 여러 가지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마침내 그는 시민운동의 마당으로 뛰어들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원 봉사에 인색하다는 것을 갈파하고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자원봉사를 생활화하도록 돕는 일에 온 삶을 바쳐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일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간직하고 있는 삶의 뜻이 누룩처럼 부풀어지기를 바라 그러한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뜻은 누룩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합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를 외국으로도 내보냅니다. 자원봉사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에 대하여 관심을 쏟도록 대기업체를 계몽하고 또 압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자원봉사를 위한 법을 만드는 일에도 열심입니다.

그라고 해서 삶에서, 일에서 실망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때로 그도 외로울 것입니다. 생각처럼 그렇게 자원봉사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생각처럼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돈도 내놓지 않고 시간도 내놓지 않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속 좁은 의식 세계에 깊은 좌절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누룩이 어디 한꺼번에 갑작스럽게 부풀어집니까? 누룩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번져나갑니다. 마치 하나님 나라가 그렇듯이 처음에는 보잘 것 없고, 극히 작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보잘 것 없는 것 같은 것이, 지극히 작게만 보이던 것이 때가 차면 번지고 펼쳐지고, 때가 이르면 부풀어 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다가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좌절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왜 이렇게 세상의 뜻에 짓눌리고만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왜 그 위력을 곧장 발휘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서, 탄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나라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순식간에 결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누룩과 같습니다. 시간을 두고 그 뜻을 이루어갑니다. 그 누룩의 시간에 따라, 보잘 것 없는 것 같은 것이 귀한 것으로 변하고, 볼품없는 것 같은 것이 값있는 것으로 변하고, 작은 것이 굉장한 것으로 변합니다. 누룩은 누룩처럼 누룩의 시간에 따라 누룩으로 생성합니다.

IV. 누룩으로

우리 모두 누룩이 됩시다. 누룩으로 살아갑시다. 우리가 뜻하는 바가 저 강력한 세상의 힘에 짓밟힐지라도 누룩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들어선 어둠의 터널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하더러도, 밝은 빛이 우리의 시야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누룩으로 살아 그 터널을 묵묵히 지나가야 합니다. 시편을 쓴 시인이 일러주듯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시는 한 작은, 보잘 것 없는, 실로 볼품 없는 누룩 덩어리가 언제나 작고 언제나 보잘 것 없고 언제나 볼품 없는 덩어리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누룩은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익어갑니다. 부풀어 커질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익어 커지고 펼쳐집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뤄내는 일이 아닙니다. 단독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누룩은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박사와 제가 누룩의 고리에 들어 한 띠를 이루고 있었던 것도 그 신령한 힘 때문이었습니다.

▲ 예람교회 박영신 목사.
우리가 뽐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룩의 신령한 힘을 믿고 누룩의 신비로움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누룩의 신령한 뜻을 익혀 누룩으로 살아가는 인내를 실행하고 누룩이 가르쳐 주는 누룩의 시간을 익히며 살아갈 뿐입니다. 누룩이 누룩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 때문입니다. 그의 신령한 힘 때문에 우리가 가진 작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이 볼품 없는 누룩이 상상할 수 없는 데로 부풀어 번져나갑니다.

오늘 우리 모두 누룩의 힘을 깨닫고 누룩의 신비로움에 잠겨들 수 있기 빕니다. 누룩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은총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누룩의 고리에 든 한 띠를 이루어 함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의 지체로 살아가기 기도합니다.

하나님,
누룩이 누룩이 되는 신비로움,
그 안에 머물면서
누룩의 여유로운 시간 익혀
조급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처럼
누룩 됨의 은총 누리며
누룩으로 살아갈 수 있기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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