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적표의 추억.
아이가 받아온 성적표를 보면서 제 어릴 적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성적표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면 으레 나오는 단골 테마가 부모님 도장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부모님의 도장을 받아온 성적표를 거둬간 선생님이 섬뜩한 말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도대체 아무개씨의 도장이 누구 부모님 거냐? 니들 거의 다 아무개씨의 자식들이냐?"

반 학생들 가운데 스무 명쯤이 모두 같은 친구의 아버지 도장을 찍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데도 도장 받아오는 걸 어렵지 않게 생각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살던 이 친구는 할머니가 글을 읽을 줄 모르므로 손녀의 이야기만 듣고 찍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친구, 나중에야 깨달았답니다. 할머니의 도장보다 무서운 게 어디서나 "우리 손녀 공부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해" 하시며 믿고 사신 일입니다. 그런 할머니의 믿음과 기대가 이 친구에게는 훨씬 무겁고 두려운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요즘도 성적표에는 부모님이 아이의 장래희망을 적는 란이 있지요?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시골에서는 글을 모르는 부모님들이 많았고,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도 많아서 '가정에서'라는 란을 아예 비워오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살다가 공무원이 된 한 친구는 그때 성적표에 누나가 '공무원'이라고 써주었는데, 그 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란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적표에 적힌 그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았고, 어엿하게 누나와 어머니의 기대를 만족시켰습니다.

이런 친구도 있었지요. 장래희망에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라고 적어왔습니다. 알고 봤더니 아버지가 목사님인데 아들에게 그랬대요. "뭘 하면 어때? 정직하게만 해. 판검사라도 도적보다 못한 놈들이 많으니까."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맞는 듯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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