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박철

하늘도 땅도 싱그러운 물빛에 젖어 있는 아침, 찬연한 햇살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물 위에 헌거로운 음악이 되어 흐르는 눈부신 고요함. 불운한 시대를 살다 간 한 시인은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이라며 이 지상에서 '삶의 비밀'을 노래했다.

그 어느 곳에도 매인 곳 없이,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충만한 기운과, 가득 찬 생명으로 일체의 것을 내맡기며 흐르는 무위(無爲)의 흐름은 '무심(無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안다. 신비에 갇힌 존재의 문을 여는 불교 선사들의 무심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첫째 조건으로 예수가 선포한 어린이의 마음(마 10,15 참조)과 동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의 문 앞에서 나는 아직도 혼미한 미망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神)을 알아듣기는 쉬운 일이지만 그 품에 안기기는 어렵다. '깨닫는 것과 안기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라고 한 파스칼(Pascal 1623∼1662)의 말은 무심(無心)을 넘어서 예수의 말씀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는지를 분명히 한다.  

마가복음 10장 1절에서 16절에는 두 가지 짧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혼 논쟁'과 '어린이에 대한 예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가 10:2) 하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묻는다.

바리새인의 이 질문은 사악하고 계획적이다. 예수 시대, 유대교에서 가능했던 이혼을 예수가 인정한다면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위배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유대 율법에 예수는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모세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명했습니까?" 하는 질문으로 대치한다. 그들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가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마가 10,5)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그' 규정은 인간이 만든 일시적 규정이고, 창조 때부터 하느님이 세우신 법은 결코 아내를 버릴 수 없으며, 남녀는 혼인으로써 영원히 갈라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룬다고 말씀하신다(창세기 1,27:2,24 참조). 이로써 일부일처제와 결혼의 당위성을 예수는 천명하신다. 아울러 남성 위주의 유대인의 사고방식, 연약한 여성을 지배하고 어린이들을 부모들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당시 유대 사회의 결정적 모순을 질타하시며 어린이들을 축복하신다(마가 10,13~16 참조).

▲ 지상에서 삶을 마감하신 예수야말로 어린이 마음으로 사신 분이다. ⓒ박철

예수에게 악의에 찬 질문을 하여 예수를 올가미에 가두려고 획책한 사람들, 이른바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로 성서에 묘사되는 이들 율법 전문가와 교사, 바리새인은, 독선적인 열정과 광신적이고 맹목적인 오만으로 무식한 사람들과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이들은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아서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다(마태 18,1~5 참조).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하나같이 먼저 깨닫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들'로 묘사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온갖 멸시를 받는 암 하아레츠(속세의 가난뱅이들)다. 그 까닭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아는 것', 즉 '앎'과 '깨달음'의 차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한 말이다. 지상에서 최후의 삶을 마감하신 예수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린이 마음으로 사신 분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로, 고난과 투쟁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놓으신 예수의 삶에서 보듯이, 어린이의 마음은 무념과 무상이다.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탁도 아니며 기력과 얼이 빠져 나간 맹목적 순종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청정한 원의로 충만한 에너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불타는 사랑의 고백으로 꽃다운 24세에 숨을 거둔 현대의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Teresa of Avila 1873∼1897)'. 그녀의 큰 깨달음으로 제시된 '작은 자의 길'은 하느님 앞에 어린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극명하게 제시한다. 

▲ 어린이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보아도 실망하지 않는 것. ⓒ박철  

"하느님 앞에 어린이로 있다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자기의 허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어린이가 그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듯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를 위해 그 어떤 것이든 재물을 모으지 않는 것입니다…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마침내 나는 사랑과 희생의 꽃을 꺾어 바쳐 드리는 것밖에 아무 것도 못하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그렇습니다. 어린이로 있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보아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자주 넘어지기는 하나, 너무 작아서 그다지 큰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라고 성녀는 말했다.

모든 가치 체계가 물질화되어 가고 전략적 가치로 전락되어 가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공부는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서구의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과 깡마른 지식으로만 복음의 메시지를 수용하거나,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여 하느님의 뜻을 판독하려는 두 극단에 오늘 교회는 자신의 고유한 매력을 상실해가고 있지는 않은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교회로 몰려왔던 많은 이들이 지금 교회를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을 통계자료로 알 수 있다. 하느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삶이 예수의 제자된 길임을 다시 확인하자. 

우리 자신이 예수 안에서 마음의 눈이 열릴 때,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이웃의 마음은 무심(無心)을 넘어서 '하느님의 사랑'과 그 나라를 진실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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