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知人)의 집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조조는, 주인집 사람들이 칼을 갈면서 하는 이야기를 자기를 암살하려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 집 사람들을 모두 죽인 후에 돼지가 묶여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제야 주인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행을 대접하려고 돼지를 잡으려는 것임을 깨닫지만 이미 엎지른 물, 그는 자신의 과오를 감추려고 그의 가족까지 모두 죽입니다.

양견님께서 예화로 든 ‘여불위와 진시황’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조 이야기가 생각나 적어봤습니다. 늘 적의 위협 속에서 살던 조조인지라 상황 판단이 빨라야 했겠지만, 잘못된 판단이 은혜를 원수로 갚고 말았습니다. 주인집 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었고 누군가를 죽이려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대상이 자기를 위해 식탁에 오를 돼지인 것을 오해하여 애매한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메시아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이 여염집 요조숙녀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시아버지의 아이를 밴 며느리, 거짓말로 동족을 배반한 기생, 나이 많은 부자와 재혼하는 이방 여인, 왕과 불륜을 저지른 여인 등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여인들이기에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기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그들을 등장시킨 이유를 깊이 고민해보지도 않고 나름대로의 성급한 판단으로 ‘스캔들의 족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관점의 차이로 덮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마치 조조의 잘못된 판단이 무고한 생명을 죽이고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처럼 성경의 존귀한 여인들을 모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높으신 뜻을 폄하하고, 곡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견님은 ‘메시아의 족보에 스캔들이 있는 여인들을 등장시킨 이유’를
(1) 유대인들의 교만을 꺾으며,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넘은 세계적인 복음이라는 것을 계시함이고,
(2)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성경이 인간적 수준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統制)에 의해 쓰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고, 그래서 정경이며,
(3) 이런 죄인들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즉 구원의 '평등성'(平等性)을 위해 그런 스캔들의 연인들의 후예가 되셨다,
고 하셨습니다,

양견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이 여인들을 등장시킨 목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님이 말씀하시려는 스캔들이라면 롯의 두 딸이 아비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야기나 르우벤이 서모와 간통한 이야기,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동침한 이야기 등을 들어야지, 여기 족보의 여인들은 밧세바 외에는 전혀 그런 스캔들과는 무관한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은 용기 있는 탁월한 선택으로 천국을 침노한 지혜로운 여인들인 것입니다.

이 여인들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1. 다말

다말이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이를 가진 이야기는 말씀하신 것처럼 계대혼인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대혼인이 부도덕해 보이기는 하지만 불륜으로 다룰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창세기의 계대혼인은 형제의 대를 잇게 해주기 위한 사랑과 섬김의 풍속으로, 후에 율법에서 규례로 받아들인 것을 보더라도 부끄러워 할 스캔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신25:5-10). 계대혼인은 형제의 대가 끊기지 않게 하고, 또 과부가 된 여인도 자녀를 낳아 위로를 받고 노년에 부양자가 있게 하는 제도로, 비록 남편은 아니지만, 남편의 이름으로 잉태하여 배 아파 낳은 자기 자식이기에, 우리의 양자 제도보다는 월등히 나은 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정서로는 용납이 쉽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 정서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요.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았고, 그 장남 엘이 다말과 혼인하지만 그의 악함을 보신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하여 형의 대를 잇게 하라고 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밖에 사정하는 악함 때문에 그도 죽임을 당합니다.

유다는 큰 아들과 둘째가 죽자 다말이 남편 잡아먹는 여인으로 보여, 셋째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서 친정으로 돌려보내고는 셋째가 장성하였는데도 괘념치 않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속내를 알지만 ‘이제 시동생이 장성했으니 나와 동침하게 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어서 애들 태우다가, 자기 마을에 나타난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아이를 갖습니다.

다말이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유다가 화형에 처하라고 하는 것은 과부인 며느리도 유다 집안 여인이기 때문에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해줄 의무 또한 시아버지인 유다에게 있음도 확실합니다. 끌려가는 다말이 담보로 받아 감춰두었던 자신의 물건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유다는 “그녀가 나보다 옳다”는 말로 자신의 잘못과 다말의 정당함을 시인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중요한 인물인데,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셋을 낳습니다. 비록 이방인과 혼인을 제한하는 율법을 받기 이전이지만, 가나안 일곱 족속의 죄악과 멸망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혼인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실 정도로 두 아들이 악한 이유를 그 어머니가 가나안 여인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들 셀라가 살아있기 때문에 당연히 유다의 계보를 이어가야 하지만, 성경은 가나안 여인이 낳은 셀라를 빼고, 며느리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족보에 등재시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다말이 스캔들 여인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더럽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의 더러운 피로부터 족보를 깨끗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쓰임 받고 있음을 보아야 하며, 남편의 족보가 끊기지 않게 하려고 수욕(受辱)을 감수하고 목숨을 건 모험을 마다하지 않은 여인의 담대함과 집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룻기에서도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룻을 아내로 맞는 보아스에게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룻)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 레아 같게 하시고,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면서 야곱의 두 아내와 다말을 같은 반열에 세우는 것을 보더라도 비난의 대상이 아닌 칭찬의 대상임이 분명합니다(룻4:11-12).

2. 라합

라합은 이방 여인이요, 기생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 여인은 혼인 기피 대상이고, 기생은 제거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기피 대상이고 제거 대상인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이유는 ‘이런 죄인들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분임엔 틀림없지만, 기생 라합을 등장시킨 이유는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등장시키는 사람들은 나인성의 외아들을 잃은 과부나,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입니다. 그들은 그냥 불쌍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받은 것으로 지나가는 인물입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병이 나은 혈루증 여인처럼, 12년 동안의 질병으로 재산도 잃고 병도 더 깊어진 불쌍한 여인이면서도, 도리어 믿음의 모델로 칭찬의 대상으로 높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들은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는 높임의 모델임을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합은 ‘기피 대상’과 ‘제거 대상’임은 물론, 어린아이와 짐승까지도 죽이라고 하신 여리고 성의 백성인 ‘진멸의 대상’입니다. 그런 여인이 구원을 얻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것은 불쌍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고 동족을 배반한 대가로 구원을 얻은 ‘비난의 대상’입니다. 자기나라를 정탐하러 온 적의 첩자를 숨겨주고 그들과 협상하였으며, 동족을 속이고 배반하였습니다.

백제의 삼천궁녀는 나라가 망할 때 구차히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꽃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져 낙화암이란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름을 남깁니다. 의기(義妓) 논개는 적장을 껴안고 물어 빠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은 자기 조국을 팔아 목숨을 건집니다. 삼천궁녀와 논개가 그 절개를 높이 인정받아 마땅한 대상이라면, 라합은 당연히 비난과 경계의 대상이어야 하거늘 어떻게 칭찬의 반열에 놓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그녀는 분명 혐오의 대상이고 비난의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이런 문제 여인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비난이 아닌 칭찬하기 위함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백제의 삼천궁녀와 조선의 논개는 나당 연합군과 왜병에 항거하여 목숨을 버렸지만, 여리고의 라합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삼천궁녀와 논개가 상대에게 무릎을 꿇었다면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지만, 라합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선택인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 물을 마르게 하셨고,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전멸시키셨고,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라합이 항복한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주님께서도 일만의 군사로 적 이만을 대적할 수 있는지 헤아려보고, 못 이길 것 같으면 화친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눅14:31-32).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이 효성이 지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과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은 선택 영역이 아닙니다. 라합은 우리에게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룻

그녀는 과부요 롯의 부끄러운 후손인 모압 여인입니다. 모압 족속은 유대교로 개종을 하더라도 영원히 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족속입니다(신23:3). 그런 모압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특혜를 누리는 것 또한 칭찬하기 위함입니다.

그녀는 유대 땅에서 내려온 젊은이와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는 동안에 사랑하는 남편이 죽고 재산도 다 없어지고 늙은 시어머니만 남습니다. 시어머니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겠다면서 아직 젊디젊은 두 며느리에게 다시 시집가라고 권합니다.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지만, 아무 소망도 없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팔자를 고치라면서, 나는 너희들을 볼 때마다 더 마음이 아프다고 만류합니다. 이에 오르바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고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녀의 효성을 칭찬하고 그 효성 때문에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녀의 효성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그녀의 자세’를 인정해주고 높여주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룻기는 효도를 가르치는 책이라기보다는 선택에 대해 교훈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룻은 아무 소망도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 그녀의 땅과 족속, 하나님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기대도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룻이 원래 선택한 것은 아무 소망도 없는 시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듬직하고 잘 생긴 신랑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시집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랑과 재산을 잃고 부양의 책임만 있는 늙은 시어머니가 남았고, 다른 선택의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끝까지 지키려고 시어머니를 붙좇았고, 그 시어머니의 나라와 민족과 하나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룻의 아름다운 모습을 높여주시려고 남편과 자녀를 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명예를 함께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비록 이방인이고 과부였지만, 효심이 깊고 정숙한 여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만 아니라 그 일군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 여인이 이렇게 칭찬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스캔들과는 전혀 무관하였기 때문이며, 시모의 명을 따라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을 때에도 그녀가 정숙한 여인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보아스가 그녀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었던 것입니다.

4. 우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책망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여인이 밧세바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랑할 때마다 내세우는 인물입니다. 잘하면 다윗같이 잘했다 칭찬하고, 못하면 다윗 같지 않다고 책망하는 기준이 되는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런 다윗이 부하 장수의 아내를 범하고 난처하게도 아이가 생깁니다. 다윗은 간음한 사실을 숨기려고 일을 꾸미지만 일이 뜻대로 안 되니까 음모를 꾸며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들여앉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이런 다윗을 책망하시고, 즉시 회개하는 그를 용서하시지만 그 아들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그 아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지만, 아이가 죽자 하나님의 결정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의 태도를 기뻐하여 밧세바와의 사이에 솔로몬을 허락하시고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는 뜻의 ‘여디디야’란 이름을 하사(下賜)하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잘못에 대한 처벌도 하셨고, 용서도 하셨고,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어 자녀도 주시고 이름까지 지어주셨으니, 당연히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해야 할 것 같은데, 왜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시는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를 그의 위대함에서 찾으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의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인 다윗의 상징성을 인정하신 것이지, 다윗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님을 나타내시려고 밧세바를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윗이 그들의 왕인 것처럼, 마음의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려고 등장시킨 인물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밧세바를 비난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윗을 경외의 대상으로 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맺으며

예수님의 족보에 이상한 여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여인들의 스캔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인들의 믿음과 위대한 선택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자를 숫자로도 치지 않는 철저히 남성 위주의 배경 속에서 쓰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당찬 여인들이 등장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빛내고 있으며 오히려 남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인들의 신분이나 도덕적 평가는 외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들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그 외모에 가려져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태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것이 그처럼 얼룩진 족보라는 것을 폭로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 받아쓰기를 한 것이지 개인적 소견을 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로마서를 대필한 더디오가 인사말을 슬쩍 집어넣은 것처럼 그 저자의 냄새가 날 수 있는 것이지 자기 생각을 마음대로 써놓은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롬16:22).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야고보의 서신에서는 율법 냄새가 나지만, 야고보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모든 성경은 사람의 소견이 섞이지 않은 순전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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