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7:11~19)

오늘의 말씀에서는 예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예수 앞에서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명령을 따라 제사장에게 자기들 몸을 보이러 가는 동안에 고침을 받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를 드렸다. 왜 똑같은 은혜를 입었는데 이 한 사람만 예수를 찾아온 것인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16절에 보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감사를 드린 것은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그런 은혜를 입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은혜를 입게 되자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된 것이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주인은 나중에 품삯을 줄 때 아침 일찍 온 사람이나 점심 때 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은 감사할 것이 없지만, 늦게 온 사람은 온전한 일당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주니까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모범적인 큰아들이 아니라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아들이었다. 작은아들은 자기는 이제 자식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환대해 주시니까 거기서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따랐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또 슬퍼하고 애통하는 자들, 병들고 귀신들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계상황에 처해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막장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도움의 손길이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누가 작은 도움만 주어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을 주객(Subject-Object,主客) 구도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예수는 항상 주기만 하고 그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받기만 한다고 보는 것이 주객구도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와 궁핍이 있기에 거기에 호응하여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는 사람들에게 추상적인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다. 예수는 오히려 지금 굶주리는 사람, 목마른 사람,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복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신다(마태 5장, 오늘 교독문).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에게, 예수는 그가 눈이 먼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 나타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눈먼 사람이 눈을 뜨게 하면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한다(요 9장).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하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낮에 우물가에 나온 사람이다. 그 여인에게 그런 목마름이 있었기에 예수는 그 여인에게 영생의 샘물을 주겠다고 한다(요 4장). 이렇게 예수는 목마른 사람들에게서 생수의 의미를, 굶주리는 사람에게서 생명의 떡의 의미를, 지금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세상의 빛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 그리하여 배고픔, 목마름, 슬퍼함, 앞을 보지 못함은 저주받은 표가 아니라 복 받을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와서 감사를 드린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상태에 있었기에, 예수께 와서 엎드려 감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감사의 비결이요 구원의 비결이다. 이미 배가 부른 사람들에게는 감사함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미 배가 부른 사람들

요즘 서양에는 교회가 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아마도 중요한 것 하나는 그들이 제3세계와는 달리 매우 경제적으로 윤택하기 때문이다. 잘 살고 병들거나 하면 복지제도가 있어서 관리해 주기 때문에 종교의 힘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에게서도 이런 현상은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 교회가 급성장하던 시절은 우리가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이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꿈을 키우고 잘 살아보려고 하였다.

잘 살아보려고 농촌을 떠나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공장에서 공돌이 공순이로 천대받으면서 갈 곳도 없고 인정도 느끼고 싶었을 때, 교회는 그들에게 가족이 되어주었고 품이 되어주었고 고향이 되어주었다. 그들에 의해서 급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살 만큼 살게 되었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가면 되고, 노후는 연금에 의해 보장 받고 그러는 것이지 교회에 가서 꼭 무엇을 구한다는 생각은 멀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영적인 요구, 더 많은 부나 명성을 구하고 보증해 주는 쪽으로 나가게 되었다. 시골의 교회들은 노인들만 남아서 갈수록 어려워져서 목사 월급도 주지 못하고 있고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예배드리러 가고 싶어도 주차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몰려들고 있다. 전에 선교사들이 처음 와서 조선의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 의료선교를 하고 교육선교를 하던 것, 일제하에서 민족이 신음할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방되기를 희망한 것, 6·25 전후해서 다들 가난할 때 교회가 사람들에게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고 유학도 하고 잘 살아보자는 희망을 준 것, 이런 것이 교회의 원동력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팽개치고 있다.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복음과 미국이 제시하는 비전을 혼동하고 있다. 미국이 제시하는 화려한 삶은 그들의 풍부한 물자와 제3세계의 희생을 볼모로 하는 것이기에 기독교적 가치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런데 대한 비판도 없이 그저 잘 산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예수 믿으면 미국처럼 강해지고 복 받고 잘 살게 된다고 하면서, 누구든 예수 믿고 기도하더니 미국에 가서 성공했다는 식으로 환상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에 목요강좌를 하면서 예수님이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영접하신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작은 사람들의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님은 잃은 자식을 찾듯이 끝까지 찾으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세태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를 싫어하여 주변의 임대 아닌 아파트들이 임대아파트로 가는 통로를 막아버린 이기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했다. 그러자 모임에 참석한 한 분이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교회가 있는 곳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야학을 하면서 그들이 많이 오게 되자 기존의 교인들이 자신들의 자녀들이 나쁜 물이 들까봐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만 이렇게 변한 게 아니라 이젠 교회도 변해고 있는 것이다. 전에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면서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곳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교회는 무엇인가?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성공을 축하하면서 성공한 집안끼리 자녀들 사귀게 하고 사돈도 맺으면서 우리는 예수 잘 믿어서 복을 받아서 끼리끼리 잘 먹고 잘 산다 이렇게 말하려는 것인가?

굳세어라 금순아

요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연속극을 가끔 본다.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키우며 사는 금순이가 미장원에 취직하여, 거기서 인정을 받아서 처음으로 샴푸를 하게 된 것을 감격스러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 요즘 사람들 미장원 원장이 되라고 해도 좋아하지 않을 텐데 겨우 미용사 보조가 되어 샴푸하는 것인데 그렇게 감격스럽게 느껴진다. 그리고 역시 며느리에게 눈치봐가면서 얹혀사는 금순이 할머니는 손녀 금순이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금순이가 일할 수 있도록 손자를 봐주기도 하고 눈물 나도록 금순이를 위해준다. 이런 모습은 아마 요즘은 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고생하는 할머니도, 미용실 보조 자리에 기뻐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니까 삶에서는 그런 감동스런 일들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는 그것을 잘 그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프로가 인기가 좋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직 우리 마음에는 그런 감동을 그리워하고 그런 정을 그리워하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가끔 주말에 <영상실록>이라는 것을 보는데 해방 이후부터 가장 가난하고 힘들던 시대의 <대한뉴스> 같은 흑백 필름들을 보여준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그 시절에 너무나 가난했고 배고팠고 서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이제는 다들 그때보다는 잘 사는 처지이지만, 그다지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다가 그것을 보면서 오늘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느껴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난한 가운데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살아보려고 안간 힘을 쓰는 그 사람들이 왠지 정겹고 사랑스럽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이 애착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고생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고생 속에서 인간적인 것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고 주님을 향한 기도가 있기 때문에, 유복함이 줄 수 없는 행복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영화를 아무리 봐도 눈물 한 줄기 안 나오는 사람들이 <집으로>라는 영화 보면서 별 줄거리도 없는데 펑펑 울고,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방송사나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이 감각이 있어서 대중을 울릴 줄 아는데 놀랍게도 교회가 이런 것을 놓치고 있다. 본래 교회가 그런 것을 잘 알고 느끼는 곳이다. 교회는 그런 어려운 사람, 슬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기도하면서 어떻게든 서로 도와가면서 취업 못한 사람은 어디 보조 자리라도 취직시켜 주려 하고, 가정이 어려워 공부 못하는 학생은 야학을 시켜서 검정고시 보게 하는 곳이었다. 오늘날도 그런 일을 하는 교회가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너무 배가 불렀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없는 교회, 목마름도 굶주림도 없고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도 없는 교회는 아무런 비전이 없다. 거기에 기도가 있을 리가 없고 감사가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을 기억함

우리가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감격이 있는 삶을 살려면 언제나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좀 잘 살게 되었어도 이전에 가난하던 시절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 많은 복을 받았어도 처음 믿기 시작하던 때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내 생명, 내 건강, 내 집과 재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있기까지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늘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종살이에서 해방을 받고 구원함을 받았다. 그들은 그 길로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고 하나님의 계약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이 고생한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일을 적어서 문지방에 써두고 문설주에 써두라고 한다. 이마에 써 붙이고 손목에 차고 다니라고 한다. 그걸 잊으면 사람이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들은 고백한다. 우리 조상은 떠돌던 아람 사람입니다. 우리 조상은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야 하고 그들을 억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난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었을 때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영접해 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것을 잊지 말고 늘 고백하면서―사도신경도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의 나 됨은 나 자신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잊고, 가난한 시절을 잊고 지금 가난한 사람을 무시한다면 교회는 교회이기를 그치는 것이다. 신자들은 늘 가난과 관계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가난할 때는 그 가난 때문에 더욱 주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부유할 때는 가난한 시절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지금 나의 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데서 또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스무 살 청년 시절에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군에 갔다. 가난에 대한 불만도 세상에 대한 불만도 많은 때였다. 그런데 간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작업 도중에 폭탄이 터져서 내 귓가로 파편이 스쳐 날아가고 내 눈 앞에서 동료 세 명이 죽는 등 수십 명이 부상을 당해  후송을 가는 참사를 겪었다. 그때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 놀란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때 처음으로 절실한 기도를 드렸다. 그저 살려주시기를, 살려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주님의 일을 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신학을 하게 되었고 오늘까지 은혜 가운데 살아오게 되었다.

그 후로 내가 받은 은혜는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신학 공부도 하고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도 얻게 되었다. 은혜 가운데 별 부족한 것이 없게 살게 되었다. 그런데도 살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 투덜거릴 때가 많고, 조금만 힘들면 누군가를 원망하고 부정적인 말을 할 때도 많다. 그렇게 속이 상할 때는 가끔 나를 가라앉히고 스무살 시절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과 그 이후로 내게 주어진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임을 생각하면 불평불만은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다들 광야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외로울 때 과연 누가 곁에 있어 주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위기에서 구해주시고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기억하면서 감사하게 삶을 살아야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감사한 것을 일기장에 적어 액자에 걸어놓고 손바닥에 적어서라도 잊지 말아야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유월절에는 쓴 나물을 먹고 무교병을 먹는 것처럼, 우리도 꽁보리밥을 먹고 주먹밥을 먹고 쓴 나물을 먹어가면서라도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말고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

감사는 구원의 확증이다

끝으로 잊지 말 것은, 다른 아홉보다 예수를 찾아온 그 한 사람이 실제로 더 수지맞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다른 아홉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그 한 사람은 예수께 와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들은 것이다. 감사는 구원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다. 똑같은 구원도 감사로 확증을 받을 때 확실한 자기 것이 된다.

옛날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을 칭찬하면 "웬걸요, 천만에요, 아닙니다" 하고 겸손의 말을 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칭찬을 받으면 "고맙습니다"라고 한다. 어떤 점에서 요즘 젊은이들이 현명한 셈이다. 칭찬을 듣고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에 그 칭찬은 기정  사실로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칭찬을 확증하는 것이다. 감사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다. "고맙습니다" 하고 입으로 말하고, 고백하는 순간에 추상적이던 진리가 구체화되고 머릿속에서 맴돌던 것이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꽃을 한 다발 전해준다고 하자.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여도 그건 값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받는 사람이 기뻐하면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할 때, 그 한 마디에 주는 사람은 흐뭇하고 기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감사하는데 익숙하지 않다. 감사는 마음속으로 하면 된다고 하고 입으로는 "뭐 그런 걸 가져왔어…"하고 만다. 외국 사람이 들으면 꼭 싫다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주위에서 보면 주는 사람은 매우 힘들여서 도와주는데 받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말 한 마디를 안해서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을 많이 본다. 아무리 부모 자식간, 형제자매간이라도 선물을 받았으면 마음으로 고맙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그때 사랑과 기쁨이 확증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한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우물우물 말하지 말고, 분명한 언어로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때 주님의 구원과 은혜가 우리 것으로 확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은혜를 내 것으로 붙잡아 두는 비결이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들고 외로울 때 가난하고 슬플 때 나를 불러주시고 안아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큰 소리로 감사하시기 바란다. 은혜만 받고 제 갈 길을 가버린 아홉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께 감사하면서 구원을 확증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감사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기쁨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주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은혜를 확증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주님,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보다 잘나고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기 마련인데
주님은 우리가 가난하고 주리고 목말랐을 때에
외롭고 슬프고 애통하였을 때에
품에 안아주시고 자녀 삼아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길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이 생명과 몸, 우리가 가진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내가 번 것인 양
내 수고의 대가인 양 착각하며 삽니다.
주님께 부르짖으며 눈물로 제단을 쌓던 것은
60년대의 추억인 양 여겨 버리고
아무런 부족함도 마음의 가난함도 없는
세련된 신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영적 교만을 일깨우소서.
주님만을 의지하여 애통하며 부르짖던
가난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회복하게 하소서.
날마다 감사하는 그 행복한 자리를 찾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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