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38~44)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부흥회 기간에 첫날 말씀듣기에 앞서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청년 한 명이 쓰러졌습니다. 병명을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당연히 신도들이 술렁거렸습니다.

그때 제가 앞으로 나가서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처럼 '은과 금은 네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베드로의 말 중에서 앞의 말(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은 완벽하게 저에게 맞는 말인데 그 다음 말이 조금 그래서 제가 그냥 뒤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청년들이 그 청년을 뒤로 옮겼습니다. 그 청년을 옮긴 다음에 제가 물론 가서 기도도 하고 위로도 하고 했지요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그래도 담당 전도사인데 그냥 뒤에서 물끄러미 아이가 쓰러지는 것, 들려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너무 너무 불쌍해 보였습니다. 이제 20대의 문턱에 들어서는데. 이럴 때 내가 능력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에게 안수하고 기도하면 아이가 벌떡 일어나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든 생각이 '아, 목회를 하면서 그런 경우가 많이 있겠구나. 갑자기 심방 중에 아이라도 아프면 아이를 병원에 옮겨가는 기사 노릇만 한다면 이거 참 체면이 아닌데…'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는가를 연구를 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열심히 읽었는데 그런 눈을 가지고 성경을 봐서 그런지 그런 기사가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신 후에 바로 병자를 고치신 기록이 나옵니다.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다음 절에 이어서 병 고치는 것을 강조해서 다시 한번 기록하기를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예수님의 사역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볼 때 '아하, 예수님의 사역이 그러한데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모든 부분을 감당하여야 하는데 나는 그 중 한 부분만을 감당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계속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비로소 개별적인 기적 한 가지를 기록합니다. 문둥병 걸린 자를 어떻게 고쳤는가 하면,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그리고 이어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며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니 그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기적을 읽으면서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분석한 결과 병 치유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구나, 그것이 설사 주목적은 아닐지라도 분명 예수님 사역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구나, 하는 결론입니다.

그 다음 요한복음에 들어섰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일입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이 구절을 '물이 제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사르밧에 있는 과부의 집에 머물렀을 때 그 집에서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던 기적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왕상 17:14) 그냥 포도주가 병에서 계속 나오게 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하인들로 하여금 항아리에 물을 가져다 붓게 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마가복음 8장 5절에는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어"라고 기록하여 누가 그 떡을 가져왔는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아직 그게 느껴지지 않으신다면 9장으로 가 보십시다. 소경을 고치신 기록이 요한복음 9장 7절에 나오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는데…이르시되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가서 씻고…" 마태복음 9장 27절에는(두 소경을 고친 기록)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기록과 요한복음의 차이가 뭐냐면 요한복음의 표적에는 기적을 완성하기 위해 사람의 동의, 또는 협조, 그리고 사람이 무언가를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차이를 사람을 살리신 기록에서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의 기사에 반드시 사람의 행동이 개입하도록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시면서 우리에게도 그 기적을 일으키는데 한몫을 하고 동참하라고 하시는구나. 최소한 그 기적을 위해 우리의 그 무엇을 요구하신다는 생각입니다. 그 기적을 일으키도록 환경을 조성한다거나 혹은 그 후에 사람이 할 일을 적어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표적–사람 살리는 일-을 나타나심에 있어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 일방적인 나타나심이 아니라 믿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교훈은 우리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일정 부분의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39절에 보시면 나사로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예수님은 둘러선 사람들에게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을 옮기라 명하십니다. 분명 다른 복음서에서 하신 것처럼 그냥 "나사로야 이리 나와라"고 하실 수 있음에도 그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일정 부분의 일을 해 놓도록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온 뒤에도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십니다.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사역에 인간이 담당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준비해 놓고 그 일을 펼치시기 전에 사람에게 그 일정 부분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사로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즉 직접적인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환경을 조성하고 계십니다.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일을 맡기신 것, 놀랍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우리들도 동참케 하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습니까? 저는 확신하기는 지금도 그리고 또 앞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믿습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기적을 베풀려고 하는데 그 앞에 있는 돌문을 좀 치워줄 수 있겠니? 물론 내가 나 혼자 다 할 수 있지만 너랑 함께 그 일을 하면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같이 누리고 싶구나. 먼저 네가 돌문을 열어놓으면 내가 그 영혼을 살려 놓을 것이니 그 다음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얼굴과 몸에 싸여있는 수의를 벗겨주어라."

그처럼 우리가 할 일을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을 살려내자, 그 영혼을 살려내야 하지 않니, 하시면서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이 역사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환경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러한 작업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두 번째 교훈,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에 동참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직접적인 명령의 대상자는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무덤 앞에 마리아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19절에 보니까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그렇게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했던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통의 현장에까지 다시 따라 갔던 사람들입니다. 31절에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는 것을 보고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또한 33절에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그 사람들은 마리아의 슬픔에 진심으로 동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입에 발린 말로 위로하는 게 아니라 남의 슬픔을 자기 가슴으로 느끼고 눈으로 눈물 흘릴 줄 아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남의 슬픔을 자기들의 슬픔으로 구체화할 수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하던 사람입니다. 35절과 36절, 이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 이렇게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만이 그 사역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전혀 이의를 달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아니 이미 다 썩어버린 사람이 묻혀 있는 무덤문을 왜 여나며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정리하자면 가까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남의 슬픔을 이해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을 지금도 주님께서는 찾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신다고 믿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교훈, 그런데 혹 여러분 중에 '그처럼 큰 돌문을 어떻게 우리가' 하면서 걱정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우리 능력보다 벅찰 때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같은 무덤의 돌문을 여는 데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의 본문에 의하면 둘러선 무리더러 돌문을 옮겨 놓으라 하시지만 요한복음 20장 1절의 기록은 약간 다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자, 보십시오, 무덤에서 돌이 옮겨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돌문은 어떻게 옮겨졌을까요? 여인들이 무덤에 갈 적에 그 돌문을 어떻게 옮기나 걱정하면서 갔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에 이르른즉 이미 돌문이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 공연히 걱정만 한 셈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돌문이 어떻게 옮겨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마 28:1~4).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일을 행할 때 그 일이 우리 힘에 벅차다 생각 되면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니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그 여인들이 무덤에 갈 때 했던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합니다.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그게 우리가 믿는 기적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그 쓰러진 청년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그래서 제가 이 성경에서 말씀을 깨달은 후에 그 병으로 고생하는 그 청년을 제 앞에 놓여있는 나사로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그 청년을 병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나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청년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청년부 전도사 직을 맡기 전에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에는 솔직히 그저 그런 청년이 있구나 하고 넘겨버렸습니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보니 나에 대한 책망으로 들렸습니다. 너에게 맡겨준 양 한 마리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도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에게 맡겨 주었으면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니? 그런 하나님의 음성이 마구 나를 휩싸고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아직까지는 병 고치는 은사가 없습니다. 아니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하신 일 세 가지를 교육하면서 약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그 사역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외쳤는데도 저에게는 아직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롭고 아픕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그 병이 마침 현대 의학이 많이 발전하여 고치는 사례도 있다 하니 본인과 그 부모들은 병원에도 부지런히 다니도록 하고, 약도 거르지 않고 먹도록 하고 우리는 이제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한 끼를 금식하면서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하나님께 맡기되 우리는 우리 일을 하도록 합시다. 우리 공동체에 있는 한 형제가 그렇게 안타까운 지경에 처해 있으니 우리도 그러한 고통에 동참하는 의미로서 한 끼나마 굶으면서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러니 모든 청년들이 큰소리로 '아멘!' 하고 동참의 표시를 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청년들의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약 2년 동안을 공동기도든 개인기도든 모든 청년부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또 저대로 목요일마다 기도하면서 그 청년은 물론이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위해서도 더욱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예컨대 우리 학교에 다리가 조금 불편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어느날 그 여학생을 만났는데 문득 그 다리에 내 시선이 머물렀는데 마치 하나님이 저에게 질문을 하시는 것처럼 음성이 들렸습니다. '저 모습이 너에게는 어떻게 보이니 너 같으면 무엇을 하고 싶으니?' 그래서 그 음성에 제가 "예, 저는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그 여학생은 여전히 그렇게 걸어다니고 있고, 그 청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청년이 어느날 '전도사님 이제는 저 멀쩡합니다. 다 나았습니다'라고 한 일은 아직까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몇 달 후에 그 청년을 만났는데 "전도사님, 지난번에 병원에 갔더니"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다행히도 병원에서 무언가 치료해 볼 수 있는 단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치료하고 싶어도 아무런 단서가 없어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볼링공의 겉 표면처럼 무언가 잡을만한 실마리가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는 진찰해 보니 무언가 자그마한 부분이 마치 야구공의 실밥이 조금 풀려나온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방학 중에 입원하고, 종합 진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추후 치료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에게 왜 다른 사람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또한 아울러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의 행동을 토대로 해서 기적을 베푸시겠다는 음성입니다. 따라서 그 청년은 언젠가는 그 병에서 나와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예수님이 나사로가 있는 곳에 가자고 하실 때에 도마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16절에서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도마가 생각하기에는 나사로가 있는 곳, 묻혀있는 곳이 예수님이 가기에는 그렇게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나사로를 살리러 가신 것입니다. 그러한 곳에 우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곳, 그러나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러 가시는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 어려운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들을 향해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저 돌문을 옮겨라 내가 그를 살리겠다'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있으면,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의 슬픔을 이해하면,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하면, 또한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신다고 믿습니다. '자, 이제 기적을 한번 만들어 보자, 나는 이일을 할 테니 너는 그 일을 해라 알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면 우리 형제의 고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아하! 무언가 기적이 이제부터 일어나는구나'라고 생각하시고 무거운 돌문이 보이면, '아하! 이제부터 저 돌문이 열리고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무언가를 하시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자리에 그러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세용 / 에반스빌 제자 침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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