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하나님에게 솔직히

"우리가 신(God)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에 대해서도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남김없이 속속들이 조명하는 방식으로 신을 말해야 한다. 성숙한 세계는 성숙하지 못한 세계보다 훨씬 무신적(無神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깝다."(디트리히 본회퍼)

로빈슨은 1936년에 <신에게 솔직히>(대한기독교출판사) 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기독교 진영에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복음을 세속화해서 그 복음이 무신론자들마저도 설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누구나 한 번쯤은 신의 존재 유무나 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봤을 것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신학 사상뿐 아니라 철학사상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얘기할 때 너무나 편안하게만 얘기해 온 것은 아닌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자. 예컨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세계 안에는 신의 부재 현장이 우리 곁에 많다. 이를테면 엄마의 눈물어린 기도에도 아랑곳없이 어린 딸은 백혈병으로 죽고 말잖은가. 가족들이 하나님 믿으려고 처음 교회에 나가려다 교통사고로 죽기도 하는 현실이잖은가.

▲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솔직하게 들여다 볼 경우 세계 안에는 신 부재의 현장 또한 우리 곁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해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거나 곧잘 두려워한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사람이 알 수 없다고 어물쩍어물쩍 넘어가거나 덮어두는 게 고작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런 경우가 세계사에서도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유태인으로 태어난 게 죄가 되어야만 했던 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 현장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그저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계신 하나님이셨다. 5월의 광주,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편안한 예배당에서 찬송만 받을 줄 알았지, 대검에 찔린 임산부와 뱃속의 아이는 살리질 못했다.

끼니가 없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 아이들의 생명들은 충분히 하나님을 욕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이 땅에 태어나 죄 없이―솔직히 갓 태어난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겠는값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영혼들은 신에게 침을 뱉을 권리가 있지 않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은 그 현장!

그러한 무신론적 현장에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초월자이시며, 절대자이신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은 일말의 꽁무니조차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혹시 당신은 초자연적 기적을 바라는가? 이에 대해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이 태클을 걸 수 있다고 본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가상대화

무신론자 : "역사 전체를 살펴볼 때, 전혀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고 안심해도 될 만큼 건전한 상식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서 입증된 기적은 단 한 건도 발견된 예가 없다."(데이비드 흄)

유신론자 : 신은 결코 무신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평상시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 : 만일 신의 능력이 우주 전체를 통제하고 절대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기적이 필요하겠는가? 사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제하기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그 손해를 메우려고 재치 없이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하고 싶을 정도다.

유신론자 : 단지 기적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한 힘을 증거할 뿐이다.

무신론자 :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불확실한가? 왜 하나님은 차라리 확실하게 하늘에다 분명한 선언문을 쓰거나 달을 삼각형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전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을 행사하지 않는가? 결국 유신론자의 주장은 언제나 신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얘기할 뿐이잖은가. 단지 이성의 틀을 깨는 그 전제만 가지면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잖은가?

유신론자 :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의 문제인 것 같다.

무신론자 : 그런데 그 말도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봐도 모순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역시 결국 신이 주신 거라고 말하잖은가.

유신론자 : 그렇다고 해도 신의 뜻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다.

무신론자 : 그런 말은 당신 자신도 역시 모르겠다는 말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유신론자 : 그렇기에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말했잖은가.
( ※ 폴 데이비스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중에서 자유롭게 발췌 인용)

그렇다고 세상만사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어찌 미천한 인간이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겠냐며 마냥 문제를 덮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신앙을 빙자한 신앙의 비겁자일 뿐이다.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 좀더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깊은 회의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녕 신이 설 자리는 없단 말인가? 정말로 신이 없다면 그나마 유용한 학문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같은 유물론적 성향의 학문들일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일반인으로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유물론이라는 사상에 오랫동안 경도되었을 확률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기독인의 삶의 위치에서 신을 제거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뿌리에까지 닿아있는 자신의 실존적 신앙의 전부를 와해시키는 것이기에 결코 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혹시 마음속에? 물론 틀린 얘긴 아니더라도 두루뭉술한 궁색한 답변들은 이제 그만. 우리는 신에게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신정론, '하나님의 전능성'과 '악의 발생'은 양립가능한가?

사실상 유신론이 위협받는 배경에는 앞서 말한 세계 안의 온갖 부조리한 현상들과도 관련된다. 현대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로서 첨예하게 다뤄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학의 가장 어려운 난제들 중 하나로 여겨져 있다. 신정론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한 사랑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 첨예한 문제는 하나님에게 전능성과 완전한 선함을 동시에 귀속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유신론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신정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거나"이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심각한 난점을 초래할 수 있는데, 만일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 안의 많은 부조리한 사건들의 발생과 악의 현존의 그 궁극적 배후는 결국 하나님 탓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순진한 기독교 신앙인들은 이에 대해 말하길, 인간이 죄를 지어서 악이 발생한 것이지 하나님이 전능하지 못해서는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고통스런 악이 발생하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흔히들 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묻고 싶다. 그토록 자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예 인간이 죄나 고통 같은 것에도 안 빠지게끔 어떻게 쌈빡하게 만들고서도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할 수도 있잖은가, 라고 말이다. 즉, 사랑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이기에, 전지전능하다면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라. 에덴동산에 그토록 위험하다는 선악과는 왜 하필 갖다 놓았나? 도대체 아이가 먹으면 위험해질 물건을 방 안에 갖다놓는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낸 것도 한 편의 우주적 자작극인가? 아니면 그때까지도 전지전능하지 못해서인가?

이에 대한 답변들은 대체로 악의 존재에 대하여는 이론적인 대답이 있을 수 없고, 현존하는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심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늘 순종하고 신뢰하여야 할 것으로 끝맺음할 때가 많았었다. 즉, 답변하기 힘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식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일쑤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하지만 칼 융(Carl. G. Jung)도 지적하고 있듯이, 선의 결핍 그 자체가 악이라면 그러한 선 역시 불완전한 것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악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는 선과 악을 이원화한 마니교적 답변을 취할 수도 없잖은가.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유출설(流出說)도 나름대로 악의 발생을 해명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신의 자비한 전능성에 반한다. 전지전능하고 자비하신 신이 엄연히 계시는데 왜 신에게서 그토록 멀리 떨어지도록 내어둔단 말인가?

초월적 유신론 → 이신론 → 범신론 → 무신론 → 반기독교의 흐름

그럼에도 기존의 전통 주류 기독교의 신학적 신관은 '초월적 유신론'(transcendent theism)을 나름대로 악착같이 붙잡고 있어 왔다. 이러한 신관이 사실상 본격적으로 도전받았던 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자연과학과 지리상의 발견 그리고 근대 세계관은 기존의 초월적 유신론으로서 하나님 이해에서 벗어나 매우 심각하고도 도전적인 문제와 과제들을 가져다주었다.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이신론이 등장하였다. '이신론'(Deism)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이법(理法)마저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는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어떤 면에서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무신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에 '범신론'(pantheism)이 등장하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사상과도 연관을 가지는 신관이다. 범신론(汎神論)이란 신 즉 세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신의 현상이며, 신은 만물 안에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 범신론적 사상은 이신론과는 다르면서도 종교의 비합리성을 배제하여 근대 자연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의도로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범신론적 사상가로 알려진 스피노자는 관념론자였던 헤겔에게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았지만 재밌게도 유물론자였던 포이에르 바흐에게서도 "유물론자들의 모세"라 불릴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던 사상가였다. 다시 말해서 유물론인 무신론(atheism)의 입장에서 본다면, 범신론은 유신론-이신론-범신론으로 척척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주의적 유물론을 주창한 포이에르 바흐는 신(God)이란 존재는 인간의 이상들을 집적시킨 투사된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에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인간은 완전한 이상들을 꿈꾸게 함으로써 ‘사랑’이니 ‘평화’니 하는 문명의 창조적 결속 원리들을 다져나간다는 것이다. 포이에르 바흐의 이같은 무신론 사상들은 당시 기독교 진영에 많은 충격과 혼란을 가져다줬었다.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는 이에 힘입어 유물론적 사상에 기반한 종교비판과 사회변혁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의 아버지격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예 신을 죽여 버린다. 신은 이제 필요도 없을뿐더러 해롭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힘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다. 따라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란 투쟁이며, 힘이며, 지배이기에! 니체에게 있어 초인의 덕은 기독교의 덕을 반대하는 데 있다.

하지만 사실상 니체는 기존 기독교로 인해 황폐화된 인간의 무기력한 수동성과 노예적 정신에 반대한 것이었으며, 무신론을 주장했다기보다 반그리스도교를 주장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그는 디오니소스신(神)에 대해선 열렬히 찬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신은 노예의 도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 같은 그의 입장은 그 자신의 <반그리스도>(The Antichrist)에서 선명하게 수행되고 있다.

정직하게 신을 찾기

▲ 세계 안의 온갖 비극과 악의 발생 때에 하나님은 정작 어디에 계신 것일까?

신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세계에는 손 떼고 단지 법칙적 질서에 맡겼을 뿐인가? 아니면 신은 세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신은 인간이 투사시킨 존재인가? 아니면 신은 죽어 마땅한 해로운 존재인가? 도대체 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말한다. 이 모든 각각의 입장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권하며, 가능하다면 논박을 하더라도 그들과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들 각각의 논증에 대해 합리적으로 접근하여 극복하길 권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우리가 신이 있다는 전제를 미리 깔고서 그들에게 무작정 접근하고 대화한다면 그 대화는 여전히 평행선적 대화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대방이 믿고 있는 그 신념에서 똑같이 출발하여 결국에는 상대방 자신이 자기의 허점들을 인지하게끔 귀결하도록 만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의 기독교 신학은 그 어떤 사상에도 얼마든지 더욱 튼튼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인간의 이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길 바란다.

따라서 "신이 있다고만 믿으면 그 뿐"이라는 얘기들은 참으로 나이브한 것밖에 안된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표현대로, 확실히 근대는 중세의 마법에서 깨어나게 했다. 인류의 지성사에 저러한 사상들이 단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여전히 진지하게 검토하고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내 이웃이 무신론자라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하게 설득할 수 있는 길을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차단한다면 이는 매우 우매한 짓밖에 안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하게 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나(Self)를 찾는 것이라는 점도 곁들여 인지하길 바란다.

신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닌 우리와 더불어 있는 자

앞에서 보았듯이 적어도 초월적 유신론은 분명한 답변을 못해주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여러 가지 신론만 낳게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서도 여전히 믿음의 문제라면서 초월적 유신론에만 목매달고 있다면 그 같은 기독교는 게토화 되고 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신 이해를 새롭게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신정론의 문제와 새로운 하나님 이해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간단하게 성경 한 구절만 짚고 가보자.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흔히들 독해한다. 즉 이것은 야훼가 ‘자기원인적 존재’로서 영원한 자존자(自存者)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그렇게 성서를 가르친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굳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詩)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독해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잘 생각해보라.

만약 기존 기독교인들의 말대로 신이 '홀로 있음'으로 존재한다고 쳐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진정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그 이름을 불러준단 말인가? 홀로 있는 그 존재는 정녕 '존재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존재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홀로 있음'이란 불완전한 것이며, 존재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 '타자로서의 존재'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약 야훼가 홀로 있는 존재라면 야훼는 결국 누구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인가? 분명하게 말하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인간도 없겠지만, 다른 존재들이 없다면 하나님 역시 무의미성에 빠질 따름이다. 따라서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with) 있는 자'로 보아야 더욱 정확한 맥락이라고 하겠다. 실로 관계성이란 존재론적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참고로 구약학자인 김이곤 교수는 그 히브리 성경 구절을 "야훼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는 자"라고 사역형 동사로서 읽어야 본래의 히브리어 의미로도 타당하다고 주장한다(<출애굽기의 신학> 52~56을 보라). 나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있는 존재'이며,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는 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앞으로 21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설정될 신과 세계의 관계는 언제나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 자신의 목적에 대한 물리적 성취를 위해 언제나 세계를 필요로 하며, 세계는 그 본성상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염려되어서 하는 얘기지만, 이 동반자적 관계란 신과 세계가 똑같이 모든 가치들이 동등하다는 그런 소박한 개념의 표현이 아니다. 형식상의 관계에서 동등하다는 것이지 내용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과 세계의 관계 유형(type)을 탐색하고 있다. 이 같은 동반자적 관계의 허락함이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다.

어떻든 앞으로 신과 세계가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계속 살펴보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초월신론-이신론-범신론-무신론-포스트모던 사상까지도 넘어서는 매우 새로운 신 유형에 해당한다. 만약에 무신론이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들을 제공한다면 나는 정직하게 무신론을 따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 자신이 이같은 유신론적 입장을 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슨 의무적 믿음이 전제된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신에 대한 여러 사상들보다도 현실 세계와 관련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 이해의 패러다임 전환과 극복은 앞서의 다양한 신 이해들을 무작정 배제함으로써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마저 포섭하면서 넘어서는 차원이다. 마치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을 대체하면서 넘어서듯이 말이다. 우리네 삶에 대해 가장 정직한 자세와 신 앞에 정직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현재 우리 모두에게는 더욱 깊은 신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詩]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엄마의 눈물어린 기도에도 아랑곳 않는
어린 소녀의 백혈병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배당에서 쫓겨나 문 앞에서 울고 있는
한 흑인 어린아이의 울음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왕따'라고 따돌림 받으며 집단폭력으로 죽어가는
우리 푸른 꿈나무들의 비애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온갖 수해로 한 해 동안 땀 흘린 보람마저 없어진
우리 농부들의 탄식소리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명절이 와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기지촌
양공주의 서러운 술주정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꽃다운 나이에 전쟁군병들에게 무참히 끌려갔던
조선 여인네들의 한 맺힌 절규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우슈비치 수용소 벽을 피손톱으로 긁어대던
유대인들의 마지막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잦은 조출잔업과 특근철야로 인해 프레스에 잘린 손은
노동의 쓰라린 통곡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민주화의 피로 얼룩진 5월, 무등산 고개에 널린
싸늘한 주검 앞의 오열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주아 불도저로 밀어버린 민둥산과 공장 폐수로 오염된
병든 나무야 병든 물고기들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폭우와 재난으로 인해 작은방 한 칸마저 휩쓸려간
빈민촌 이웃들의 탄식소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북녘 땅 아이들의 야윈 뱃가죽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땅에 오셔서 진정, 십자가에
못박히고도 또 못박히시는
진열장 속의 슬픈 마네킨 예수여,
그 처절한 기도소리 들으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셨나이까!

(참고로 이 詩에 대한 몇 가지 설명들은 freeview.org/theology 게시판 29번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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