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의 출범은 이 나라 역사에 중대한 획을 근 사건이었다. 오랜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일반 서민 대중들의 선택으로 이어져, 냉전수구세력의 집권을 막았고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자주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진력할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정도를 걷겠다는 자세

노무현 정권의 등장에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했던 것은 아무런 기존의 특권적 기반이 없는 후보가 역사의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세상사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오던 한국사회에 원칙과 진실이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른바 '대세론'이라는 망령에 실려 있는 현실적 기회주의의 물결을 퇴장시키고, 당장의 현실에서 아무리 불리하게 보인다 해도 역사의 정도를 걸으려는 자세가 이 나라의 기본 질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존재 자체가 이 나라 개혁 정치의 실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억압과 민주화의 지체가 단계적으로 보자면,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 김대중 정권의 국민의 정부, 그리고 이제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는 서민 대중의 정부 내지는 '국민이 대통령이다'로까지 발전할 정도로, 주권재민(主權在民)의 현실이 이제 비로소 그 이론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간 우리 정치사를 보면, 말로는 국민이 주권의 주체라고 해왔지만 실제로는 권력자의 정부, 특권층의 권력, 기존 질서의 논리가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였다. 국민 또는 일반 서민 대중들은 이들 권력자들 또는 권력을 쥔 세력이 명분을 내걸기 위해 일회용으로 써먹다시피 하는 동원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경우, 그 성립 과정 자체가 일반 서민 대중들의 과감한 정치적 선택과 그 선택을 정치적 승리로 이어나가는 열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도, 권력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역사적·현실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특권과 대세론에 편승하는 이기주의, 기회주의와 결별

이제 이 나라 국민들은 대세론을 쥐락펴락했던 힘있는 권력자들이나 언론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웬만한 것은 감출 수 없게 되었고, 시간이 지났다고 둘러대면서 거짓말한다고 속아넘어가지 않게 되었으며, 속 다르고 겉 다른 것이 용납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거 때만 대충 때우면 몇 년은 그대로 버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진실이 현실의 힘이 되는 그런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권을 타파하고 지역주의의 분열을 극복하며, 이 나라의 평화를 추구하는 정권의 등장을 염원해온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아닐 수 없으며, 그로써 역사가 진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불어넣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현실이 아닐 수 없다. 특권과 대세론에 편승하는 이기주의나 기회주의와 결별하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역사의 정도를 걷겠다는 자세가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통용이 될 때, 그 나라 정부와 권력은 그 나라 모두에게 교사로서의 위치까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권력이 그 사회의 삶에 윤리적 기준까지 되는 상황이며, 그로써 선악과 진리, 거짓을 판별하는 데서 책임을 지는 도덕적 권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마저 내다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타협과 원칙의 굴절, 그리고 대중들의 그때그때의 요구에 기울어 애초의 출발과는 다른 상황에 처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때로 대중들의 변덕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으나, 권력 자체가 자신의 기반인 서민 대중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또는 이들의 삶과 거리가 하나하나 멀어지면서 이르게 되는 현실일 수 있다.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나라 교육의 수장인 교육부총리 임명 과정에서 보여준 노무현 정부의 '오만함'은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권력의 속성에 빠져들지 말자 

서민 대중들의 삶과 멀어져서 권력이 오만해지고 역사의 정도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일이 이렇게 진행되면 권력의 속성상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게 마련이어서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체의 논리와 자세를 적대시하기 쉽고 그러면서 구중궁궐의 권력으로 타락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정권 출범 초기, 어떤 논자는 노무현 정권이야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식의 논리를 폈지만, 권력의 속성에 무지하거나 또는 '노비어천가' 식의 권력 옹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대목이었다. 대중들과 함께 섞여서 선거를 하던 때와는 달리, 특수한 지위에 필요한 온갖 장치와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자칫 권력은 오만해지게 되며 폐쇄적 사고에 젖기 쉽고 자기 독선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어딜 가나 최고의 대접과 최상의 자리에 앉게 될 권력자가 초심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겸손하고 역사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야말로 좋겠지만, 사람이란 무릇 보통의 자기 절제와 원칙에 충실하지 않으면 권력자가 되기 전과 되고 난 이후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개혁하려 했던 특권 세력과 닮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으며, 그로써 역사의 원칙을 하나하나 배신하는 과정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노무현 정부의 어지러운 행로를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인의 장막이란 권력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있게 마련이고, 또 이러한 인의 장막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권력자의 주변으로 형성될 수 있으며, 이런저런 비판에 시달릴 수 있는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도리어 이를 방패막 내지는 보호막으로 여겨 더욱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권력 앞에서 제대로 입을 열고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인의 장막에 갇히지 않고자 해도 그 부정적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실로 상당한 자기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해진다.

또한 여기에다가, 권력자는 최고의 정확한 정보를 자신이 받고 소화하고 있다고 여기게 되어 다른 소리는 우습게 들을 수 있다. 지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격노하고 있음에도, 뭘 모르는 이들의 아우성쯤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서민대중, 민중들의 소리를 귀하게 받들어 그 안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세가 없는 경우 결국 도달하게 되는 현실이다.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 그리고 그 주변의 인물들이 수없이 타락과 부패, 독선에 흐르게 되는 이유는, 그래서 예외적인 일이라기보다는 거의 불가피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고 있다.

최고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곳, 그래서 자신들의 의중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세욕이 지배하는 곳, 그래서 웬만한 이야기는 다 그리 큰 가치를 두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곳, 진심으로 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곳, 그런 곳에서 권력은 죄를 짓게 되며 그 죄가 쌓이고 쌓이면 역사의 정도를 스스로 배반하고 권력 자신의 목적을 위한 권력이 되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 귀담아 들어야

성서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연적인 죄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으며, 아무리 괜찮은 시작을 했다 해도 하늘의 소리를 듣는 일을 게을리하는 순간, 그 권력은 세상과 하늘의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일깨우고 있다. 해서,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권력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해 하늘의 응징을 받고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던 사울의 경우를 보면, 그가 애초에는 미미한 출신의 이름 없는 청년이었던 때와 이후 권력자가 되고 난 다음의 상황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그대로 보게 된다.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새로운 지도자가 나서야 한다고들 요구하자, 사무엘이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가 중심이 되어 있지 않음을 보면서 고뇌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시고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도록 사무엘에게 이르신다.

그 당시 사울은 겸손하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이여서 그 큰 키를 감추느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숨겼고, 뭐 별 볼일 있는 자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있어도 아무런 불쾌한 기색도 없이 이를 잘 받아들여 나라의 안위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드러내놓고 '나다' 하지 않고, 정작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처하자 그때 비로소 백성들의 심장을 뒤흔들어 집결시키고 난 이후, 그는 용장의 모습으로 위기를 극복한다. 평범하고 아무런 특권적 배경도 없던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의 곤경을 이겨내고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며 왕권의 위엄을 하나하나 세워나갔다.

그러나 정작 그가 왕이 된 이후 그는 권력의 화신이 되어갔으며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으며 급기야는 전제군주로 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는 이가 아니라, 백성들을 핍박하고 그들을 더욱 힘들고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음으로써 그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고 그로써 새로운 지도자 다윗을 중심으로 한 저항을 자초했던 것이다.

신수가 훤하고 총명했던 청년 사울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이후 적이 되지 않을 사람조차 적으로 만들었고, 결국 이스라엘의 패배를 극복했던 젊은 장수 다윗을 정적으로 삼아 피투성이의 권력투쟁에 몰입하다가 신망을 잃고 권력기반이 붕괴해가던 차에 전쟁의 현장에서 비참하게 죽는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권력과 욕망의 유혹에 넘어간 다윗

다윗은 이러한 사울의 전철을 밟지 않을 줄로 알았는데, 그 또한 처음에는 괜찮게 출발했다가 나중에 권력자의 오만이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어갔는지, 생각이 딴데로 향해 욕망을 추구하고 배신과 정략에 혈안이 되는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사울과의 투쟁에서 이스라엘의 어려운 이들을 구하고 그들을 대변하던 장수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여자를 탐하고, 그 여자를 얻기 위해 전쟁의 동지를 배반하여 그를 죽음의 자리에까지 몰아가는 냉혹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였던 것이다.

다윗 왕조는 이스라엘의 분열과 위기를 새롭게 극복하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통합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사명을 지녔는데, 정작 권력자 다윗은 막상 그런 꿈을 일구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손에 잡히자 권력의 맛에 취해 부패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믿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충성을 감안하셔서 징벌의 수준을 낮추셨지만, 한때 모든 이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던 다윗이 권력과 욕망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 것은 두고두고 후대의 교훈이 되는 성서의 증언이다.

다윗은 사울의 전제군주체제에 도전하여 이스라엘 서민 대중들의 한을 풀어주고 그야말로 괜찮은 왕정을 건립해 나갈 줄 알았지만, 권좌에 오른 후 권력의 영광을 과시할 대대적인 작업을 도모했고 ‘다윗어천갗라고 할 만한 권력 칭송의 분위기를 만들어갔으며 그로써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인간 다윗의 영광을 더욱 크게 만드는 우도 범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하게 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의 훈련이 되어 있는 자도 권력의 힘 속에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자기 패망과 역사의 진전을 스스로 가로막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 이후 다윗 왕조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분열하여 강대국의 노예가 되어가는 과정도 모두 집권자인 왕이 본래 하나님이 자신을 세워주신 뜻을 망각하고 백성들의 삶과 단절된 채 성채 안에 갇혀 권력의 논리에 매몰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한 결과이고 그로써 솔로몬이 죽어 백성들이 이제는 고역의 짐을 덜어달라고 하지만, 그의 뒤를 잇는 권세자들이 한결같이 백성들의 피를 빠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만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보게 된다.

변방 인생의 당당함을 기억한다 

정권의 성립은 이 나라 역사를 위해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한 정통성과 역사적 의의를 권력의 영광으로 삼으려는 순간, 우리는 성서의 세계에서도 반복되었던 사태가 현실에서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 예언자들의 전통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두고 일어났던 운동이며, 그로써 하나님 나라의 뜻을 감당할 수 있는 권력이 되도록 일깨웠던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로써 진정 이 나라에 서민 대중들의 삶을 지켜내고 일체의 특권을 사라지게 하는 민주화의 완성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또한 이러한 내부의 결집력을 기반으로 해서 나라의 통일과 한반도의 평화를 일구어내는 성과를 보게 되기를 진정으로 기원한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 자랑이 되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계 전체에 우리 민족이 무언가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밑바닥 서민 대중들의 생각과 삶과 단절되는 순간, 그 권력은 자신의 욕망과 영광을 추구하면서 타락해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늘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쓴, 예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살생부 식의 사고방식으로 자신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적대하고 경멸하다가 진짜 소수정권이 되어 버림받아 역사적 소임을 저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 하늘의 뜻을 두려워하는 권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애환을 풀어주고 보듬어 나가면서 섬기는 권력이 되라는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는 순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는 실망과 배신으로 바뀌어 버려지는 과정을 밟게 될 수 있다.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은 '주류'가 권력인 한국 사회에서 비주류였다. 정계·재계·관계 등에서 이른바 TK·PK·MK 등으로 상징되는 많은 파벌과 인맥, 혈연을 중심으로 한 족벌과 혼맥, 동문 등으로 맺어진 학맥. 정칟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잡다한 인맥과 파벌이 할거하는 우리 시대에 이단아(?)다. 그는 한마디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선 것이다.

사실, 성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 당대 사회의 주변인들, 이른바 소수자 또는 마이너리티들이다. 성서의 메시지는 바로 마이너리그의 등장인물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는 것에 있다. 바로 여기에 현실에서 밀려난 이들의 소망과 꿈이 있다.

성서는 그러한 의미에서 언제나 현실의 주변에서 맴돌거나 또는 기득권을 쥐고 있는 주류에게 밀려나고 있는 이들의 삶을 주목한다. 그리고 이들의 아우성과 이들의 고난과 이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들의 삶에 다가가셔서 이들을 북돋우시고 기운을 불어넣으시며 힘있게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로 인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원대한 구상과 계획 그리고 실현 과정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관건은 기존의 메이저 방식을 바꾸어 마이너의 설움을 겪는 이들의 삶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 일류 학교에 들어가도록 비는 것이 아니라, 일류 학교를 나오면 사회적 특권의 범주에 속하게 하는 현실을 바꾸도록 하는 것이 '변방 인생의 당당함'을 보여준 노무현 정권의 역할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정, 노무현 정권이 역사의 대의에 끝까지 충실하고 역사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를 경청하고 하늘의 뜻을 겸손하게 떠받드는 권력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리고 이 나라의 진실한 발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자세임을 거듭 강조하며 이 나라 역사의 정도를 옳게 세운 정부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한종호 / <기독교사상> 편집장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