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귀중한 격언을 금언(金言)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빛나는 황금 같은 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중에서 불멸의 금언이 많습니다.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등이 이런 금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금언은 세월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의 진리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내용 또한 이와 같은 금언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를 잃었을 때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됩니다. 많은 민주적 헌법은 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조항을 담고 있습니다.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주거선택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이 그 예입니다.

창세기에 그려진 창조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자유와 따르지 않을 자유도 함께 주셨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녔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자유를 빼앗거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가부장제 또는 독재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성교제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값진 선물은 신뢰와 자유다'는 말을 해주곤 합니다. 이어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당신이 나를 믿어주어서 고맙고 나는 당신을 만나 진정으로 자유했노라'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대학생활 이후부터 시작된 삶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결혼 이후 지금까지 이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저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을 크게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아내가 저를 통해서 신뢰를 느껴가고 그 신뢰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 누려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가 목사의 아내로 집안에 갇혀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투명인간으로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사회생활을 하도록 적극 권했고 교회활동도 자유롭게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래서 제 아내는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공동체 지체들에게 주고 싶은 것도 신뢰와 자유입니다. 사역을 마칠 때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당신이 나를 믿어주어서 고맙고 나는 당신을 만나 진정으로 자유했노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보다 풍성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갔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이 자유가 주는 기쁨, 자유가 주는 행복, 자유가 주는 힘을 체험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는 자발성입니다.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섬김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나이로도 직책으로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누구든 언제든지 우리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떠난다고 해도 누구하나 붙들지 않습니다. 최근 한 자매는 이 사실을 알고 깊이 감동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지금까지 강요에 의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자발적 동기를 인정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 교회에서 강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그녀를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즐겁게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닌 이상,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거나 파괴시키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한 예로 무조건 술은 마실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사람은 마셔서는 안 되겠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적절하게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이와 비슷한 적용을 하는 예들은 많습니다. 이런 적용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유에 있습니다. 맹목적인 규범에 대한 적용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저는 자유를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온 삶의 배경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님의 통제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학 시절 경험한 독재정치 때문일 수 있습니다. 독재정치는 한 독립적인 인간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저에게 무시무시한 공포를 안겼습니다. 그들은 저의 생각까지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들이 정하는 생각만 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정한 생각 밖으로 지경을 넓히는 것은 체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인식되게 하였습니다.

한 예로 평등이라는 말을 해도, 환경 혹은 공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통일이라는 화두를 꺼내도 불경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면서 저는 제 스스로 제 생각을 감시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하다가 헛말이라도 나오면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조금 옆길로 새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이 연상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 제 생각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자유로운 생각 그 자체가 사치라고 생각을 하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독재정치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것이 무시무시한 폭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무시무시한 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독재정치가 시작되기 전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이미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부모 교사 목회자들과 같은 권위자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자녀 학생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배 하에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면 이단자가 됩니다. 무조건적인 순종을 가르쳤습니다. 어느새 한국 사회에서 순종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어있었습니다.

저는 독재를 싫어합니다. 독재자들이 강조하는 순종이라는 가치도 싫어합니다. 저는 제 생각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분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부장제 문화를 아주 싫어합니다. 저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고 또 저 또한 자유가 주는 행복은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막연하게 자유를 사랑했다고 하면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더 구체적으로 더 깊이 자유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유가 좋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을 사랑했고 또 자유인으로 살다가 간 사람으로 불리워졌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를 제시하셨습니다. 그 자유로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자유는 진리를 통한 자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신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자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몇 몇 진리를 언급하면서 그 진리들이 어떻게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원수 사랑이 우리는 자유하게 합니다. 용서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섬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무소유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들은 많습니다. 평화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잃습니다. 비폭력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폭력은 사람들의 자유를 짓밟습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서로 무시하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남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상호 비난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의 삶이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우선순위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이제부터 자유인이 되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에도 매여 살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을 좇아서 살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자유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우리를 자유로 인도합니다.

제가 양육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진리를 알게 되면서 사람들이 정말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자유가 배어져 나옵니다. 진리 자체가 주는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가치 있고 옳은 길을 걷고 있다는 자부심에서 오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 자유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발견하는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풍경들이 있습니다. 그 한 예를 든다면 교회 다닌 연수가 많아질수록 최전선에서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고참이란 말이 없습니다. 고참의 행패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고참 같으신 분들은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신 분들입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은 자매들이 참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하든 놀이를 하든 토론을 하든 열심입니다. 여자라고 해서 뒤로 마냥 물러서 있지 않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자기표현에 있어서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진리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가 무엇인지, 그런 체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비진리가 무엇인지를 발견해갑니다. 그래서 그 비진리들과 싸워갑니다. 에리히 프롬이 억압하는 정권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자유로부터 도피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유를 얻기까지 투쟁해야 얻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 가지 더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라는 개념입니다.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방종, 혹은 내 욕구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얽매이게 하는 비진리,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 감정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삶은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의미 있게 살 수 없게 하는 모든 것,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지 못하는 것들과 투쟁입니다. 어느 때는 독재정권과 투쟁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와 투쟁할 수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행위와 투쟁할 수 있습니다. 소유나 지배와 성공과 같은 비 진리들과 투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인간적 욕망과 투쟁할 수 있습니다. 내 내면의 상처들과 투쟁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지도 곧 성격화된 심리적 문제들과 투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투쟁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값진 자유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셔서 그 자유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오셨습니다. 그 자유가 우리 삶과 우리 내면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박민수 / 은혜공동체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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