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13)

저자 요한은 복음서 서론에서 '말씀'이라는 특별한 개념을 사용합니다. 요한이 사용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1세기 헬라문화권에서 철학적인 맥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헬라인은 우주와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한 법 또는 신적 정신, 또는 원리가 있는데 이것을 로고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우주 만물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로고스에 의해 세계는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 로고스를 통하여 인간 우주의 신적 원리 또는 정신과 교감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로고스는 자연 발생된 우주 만물에 범신론적으로 깃든 우주의 법, 원리, 이성 등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로고스 개념은 범신론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초월자 신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저자 요한이 왜 로고스 개념을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헬라문화권에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로고스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로고스 개념과 예수님의 정체성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아 가면 자연스럽게 극복되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께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은 이 태초부터 있었던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며, 또 이 로고스가 하나님이시며, 모든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헬라철학의 로고스 개념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헬라철학에서 사용된 로고스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로고스는 창조주도 아니었습니다. 자연발생된 우주 만물에 깃든 우주의 법과 원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로고스가 초월자 신이며, 창조주라고 선언합니다.

요한은 헬라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사용하였지만, 헬라 철학적 맥락에서 로고스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한은 헬라문화권에서 사용되고 있는 로고스 개념을 사용하지만, 그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정하면서 그 당시 헬라사회에 편만하게 퍼져있던 범신론적인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로고스 개념에 이어 생명과 빛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으로 표현한 것은 요한복음서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에도 '저희는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와 같이 영생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예수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말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생명으로 표현하면서,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이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생명을 이해하기 전에 빛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을 때 빛의 개념은 낮의 햇빛이나 한 밤의 가로등과 같이 사람들이 가야할 길과 해야 할 것을 비추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망막합니다.

빛이 있어야 바르게 갈 수 있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의미에서 빛의 개념이 이러하다면 정신적인 개념에서 빛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진리입니다. 진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진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로고스, 곧 예수님에게 생명이 있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을 때 생명은 어떤 의미일까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을 때 생명은 진리입니다. 위 말씀을 이런 관점에서 풀어서 설명한다면, '예수님에게 진리가 있었고, 그 진리는 사람들에게 빛이었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은 진리이고, 진리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생명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빛이기도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 진리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렵습니다.

저는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나에게 분여되고, 그 생명이 지금은 씨앗처럼 나에게 존재하고, 앞으로 죽으면 그 생명이 잉태해서 나를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나에게 생명이 있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죽으면 나에게 생명이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들과 다른 사람에게도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있음을 말씀을 의지해서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진리를 알고 나서 이 개념이 정확해졌습니다. 저는 이제 예수님에게 절대진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곧 생명입니다. 진리 안에 생명의 속성인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저와 여러분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며, 동시에 생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지금 영원한 천국에 거하지 않아도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아갑니다. 곧 영생의 삶을 살아갑니다. 자유과 기쁨, 만족과 행복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이 천국의 삶이며, 생명을 소유하고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길, 진리, 생명은 동일한 표현입니다. 진리라는 개념을 길로, 또한 생명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절대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따르는 자만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빛의 개념이 사람들의 시야를 밝히는 것, 곧 인생의 참다운 목적과 가치를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두움의 개념은 사람들의 시야를 어둡게 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이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게 하는 비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는 표현은 비진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비진리를 적극적으로 추구해가는 사람들은 진리가 왔음에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6~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게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은 4~5절의 더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나중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요한이 와서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또 빛이신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이 진리가 올 것을 증거하고,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적극적으로 비진리를 좇던 사람들은 진리를 거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부유한 자들이든 가난한 자들이든, 의롭다고 여기지는 자들이든 죄인으로 찍힌 자들이든, 건강한 자들이든 장애인들이든 간에 동일한 존엄성을 가진 존재들로 대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면적이고,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셨고, 스스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수구 보수주의자들은 따르거나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는커녕 사회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반동분자로 취급하고 적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빛, 곧 진리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표준새번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라고 번역합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다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은 교회를 오래 다시신 분들이라면 한번쯤은 외우셨던 말씀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외우면서 스스로 나는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맥락으로 제 양들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장 전체의 맥락에서 12,13절을 해석하면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해석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참 빛 곧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의미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영접하는 사람이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표현된 진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좇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의미가 모호한 면이 있는데,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에 내포된 그의 인격과 삶을 신뢰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자신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좇아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상 하나님의 아들, 곧 신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절대권력을 가졌던 제국의 황제들이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황제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황제가 아닌 어떤 사람이 이런 표현을 썼다가는 반역 죄인으로 몰릴 수도 있는 말이었습니다.

더구나 종교적인 사회였던 유대사회에서는 이런 말을 함부로 사용하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죄목이 되었던 것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아들, 딸이 된다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엄청난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좇아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곧 신의 아들, 딸이 되는 권세, 곧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른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예수님을 진리를 따르고 있다면 모두 신의 아들, 딸인 것입니다. 과연 이보다 더 큰 특권이 있을까요?

저자는 13절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를 더 말합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더는 사람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의 아들, 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두 번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개념을 거듭남으로 표현합니다. 이 말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정체성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 신의 정체성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극단적으로 적용하면 이단시비가 붙을 만큼 위험한 말이기도 하지만, 최소한 예수님의 진리를 좇는 사람들은 존재방식 자체가 신은 아니더라도, 신의 성품, 신의 삶, 신의 경지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볼품없는 사람,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그 진리를 좇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무가치하거나,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위대한 제국의 황제와도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 세상을 지배했을 뿐 그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변화시켜 갈 것이며, 지금도 변화시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살리지 못하였지만 여러분은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수천, 수만의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족을 진정한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나서 얼마 후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막 3:33,34).

예수님에게 있어서 혈통으로 맺어진 가족은 진정한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진정한 가족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 혹은 모판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진정한 가족은 진리를 좇는 사람들이 함께 한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진정한 형제들이며, 가족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들은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지나 진리로 이루어진 가족에 속해야 합니다. 이 가족에 속하였을 때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는 것이며, 이 가족에서 진정한 행복과 만족,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을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가족을 유형의 교회 속에 있는 무형의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세계 각처에 흩어진 진리를 따르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진리로 세워진 공동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신학자들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때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 곧 무형의 교회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우리 모두가 반드시 이 교회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진 진정한 가족, 진리로 세워진 공동체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진리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고, 진리를 좇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놓고 있기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며, 우리가 회복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이 사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교제를 경험해가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지체들이 이 사회와 또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상처받고, 힘들고 괴롭게 살다가 이 공동체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참 행복을 누려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저 또한 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저자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는 이보다 더 큰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하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저는 아마도 하나님은 이 기쁨과 감격, 이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특권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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