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8:9~14)

오늘 성경말씀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하신 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제자들 중에도 좀 더 경건하고 매우 도덕적이고 지적인 인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매우 자부심 강하고 남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회의 지도급 인사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람일수록 '남을 멸시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치기준에서 남을 멸시하며 경시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라는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것은 구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 하다보면 결국 남을 멸시하는 마음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려는 마음은 사라지고 남을 경멸하는 교조적이고 도덕적 기득권자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분들이 우리 사회의 정치 지도층이요 종교지도층이며 목사, 장로, 판사, 국회의원, 고위 공무원들일 것입니다. 그 시대의 엘리트입니다. 유능하고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입니다. 바울도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남의 인정을 받는 지위를 획득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우리 인생은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마음 구석에는 자부심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남을 경멸하는 마음'도 동시에 자라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남과의 구별을 통해 자신을 높이는 경쟁 가운데 높아졌기 때문에 자부심과 동시에 낙오자에 대해 경멸하고 비판함이 스며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서서히 자신감은 오만과 자신의 지위 지킴의 보수적 안정감에 머물려 합니다. 이미 자신은 양반이 되었고 양반의 행세를 하며 서툴고 모난 행동을 경멸하며 자신의 지위와 기득권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 갑니다. 결국 변화에 적응 못하는 보수주의자로 변신하며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기보다 비판과 경멸로 일관하는 기득권자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실 매우 비굴한 사람들이란 평을 받을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사회에 적응을 잘하는 부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마음 구석에는 신분상의 약점 때문에 실력이 있어도 존경받는 위치를 가지지 못한 설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관을 섬기면서도 마음속에는 비판과 경멸의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변호사 밑에 법무사, 하급 공무원들, 자신의 발언권이 약한 하층 지위에 있는 분들입니다. 비리도 눈감아주고 잘못된 것도 과감하게 지적하는 소신도 자유롭게 나타낼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마 세리와 같은 처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진리를 자신의 중심과제로 삼기보다 조금한 이익에 사로잡혀 남의 등을 쳐 먹는 일에 빠져 소심하고 몰인정한 ‘세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세리는 엘리트 아닌 엘리트의식을 가슴속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지탱하고 유지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공무원들이 노조를 만들고 단체행동권을 주장하며 파업을 하는 이유는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과 비굴함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려는 평등의 주장이요, 자신들도 의로움을 내세우려는 의지입니다. 며칠 전 인천 동구 지부의 파면되고 해임된 공무원들과 위로와 격려의 식사 자리가 있었습니다. 이전보다는 상관들에 대한 경멸과 미움, 그리고 분노가 가슴에 서려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진정 자유의 날개를 달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끝이라 생각하지 말고 수많은 공무원들이 여러분의 후원자요 지지자가 되게 하고, 지금까지 자유롭게 비판하지 못한 여러 공직사회의 문제점을 발굴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건강하고 정의로운 공직의 업무가 무엇인지 연구하십시오. 그런 기준에서 공직 사회의 비리와 잘못된 관행을 고쳐가는 선택된 사명자가 된 것을 오히려 기뻐하여야 합니다. 지난날에 전교조도 이런 과정을 거처 성숙하고 교육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공직사회를 만드는 사명에 매진하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며 이 고난의 시기를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로 만드십시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성경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성전에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세리의 기도에는 자신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잘못된 행동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겸손과 하나님의 자비심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자비심이란 상대를 멸시하고 차별하는 마음에서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고 해를 입히며 폭력적으로 대하는 부정적 마음을 떨쳐버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모든 사람을 사랑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유연함입니다. 남을 경멸함으로 자신의 의를 세울 수 있는 경직된 마음이 아니라 남을 연민과 애정으로 대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겸손한 자세로 일하는 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세리의 기도에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깨닫고 그 길로 나아가겠다는 새로운 믿음의 기도일 것입니다.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란 기도 안에는 형식적 죄책고백을 넘어 세리의 기도는 새로운 믿음의 단계로 옮겨갔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내세우는 "내탓이오, 죄인이다"는 구호라기보다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 그와 함께 세상의 고난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의지의 표현인 믿음의 기도로 보았던 것입니다.

마음의 전환입니다. 이것은 꼭 세리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파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단의 기도 속에 스스로 하나님께 다가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의 말씀에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다'는 바울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하나됨에서 온전히 '남을 경멸하여 얻는 의로움'을 벗어던지고 오직 진리가운데 어린양처럼 십자가의 사랑의 짐을 지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겠다는 결심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인정받는 순간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그 세리의 기도에 깃들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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