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부터 빠릿빠릿하지 못했다. 행동이 하도 굼뜨고 꾸물거려서 아버지는 나를 '미련곰탱이라'고 부르셨다. 거기에다 손재주가 젬병이어서 무얼 시키면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 없었다.

▲ 올 여름 조화순 목사님과 함께. 지석교회에서. ⓒ사진제공 박철

어느 날, 벽에 못을 박다가 망치로 내 이마를 짓찧어 다친 적이 있었는데 지금도 어머니는 손자들 앞에서 그 얘길 하신다. 아들의 실수담을 손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어머니는 즐거우신 모양이다.

유년시절 강원도 화천 논미리라는 동네에서 살 때, 나는 논미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마 정식 국민학교가 아니고 분교형태의 학교였던 것 같다.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개울이나 숲속에서 노는 것이 더 재밌었다. 어머니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와서는 학교엔 가지 않고 개울이나 숲속에 들어가서 놀았다. 그것도 혼자서.

지금 생각하면 무슨 재미가 있었을까 생각이 되지만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두어 달 학교에 다닌 것 외엔 여름방학이 끝나고 들통이 날 때까지 그렇게 땡땡이를 쳤던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아버지한테 흠씬 얻어맞고 논미국민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말았다. 국민학교 1학년 중퇴도 이력에 들어가는가? 그 이듬해 다시 화천국민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을 했다. 그런데 여전히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내가 살던 논미리 집에서 화천국민학교까지 거리가 왕복 30리 쯤 되었을까? 나는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배운 것보다 왕복 30리 길을 통학하면서 길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별로 생각나지 않지만, 30리 길을 오고 가면서 터득한(?)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학교를 통학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빠릿빠릿하지 못했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비교적 제 시간에 도착하는 편이지만,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는 언제나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 져야 집에 도착하곤 했다. 한 2백m 정도 걸어오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흙장난을 하거나, 돌멩이 쌓기 놀이를 하거나 그것도 심심하면 낮잠을 잤다. 겨울에는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빠른 편이었지만, 겨울에도 어머니는 등잔불을 들고 마당에 나오셔서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셨다.

나는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혼자였다. 더군다나 동네에 있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읍내에 있는 큰 학교에 간다고 동네아이들은 나를 따돌렸고, 읍내 아이들은 촌놈이 읍에 있는 학교에 나온다고 나를 괄시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라는 것이 익숙하고 편했다.

그 시절에는 점심시간이 끝나면 전교생이 학교운동장에 나와 포크 댄스를 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제일 고역이었다. 춤 동작을 따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데 여자애들이 노골적으로 내 손을 잡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를 성가신 물건처럼 취급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가난한 시절이었는데 왜 매일 운동장에 나와 춤을 추게 했는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하다.

요 며칠 전, 나를 닮아 매사에 굼뜨고 어리버리한 우리집 둘째 넝쿨이가 내게 묻는다.

"아빠, 지각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뭐예요?"
"응,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굼뜨고 상황판단이 느린 사람을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냐? 누가 너보고 지각능력이 떨어진다고 그러더냐?"
"예, 선생님이요."

▲ 박철 목사. ⓒ사진제공 박철

나는 빠릿빠릿하지 못함으로 나만이 터득한 노하우(?)가 있다. 나만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나는 가급적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 가지 않는 편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요청에 의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더러 가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10년 넘게 서울에서 살았지만 나는 여전이 길에 대해선 초보자요, 촌놈이다. 가끔 자동차를 운전하고 서울을 가지만 내가 아는 길로만 간다. 그것이 두번째 내 노하우이다. 새로운 길로 가게 되는 경우는 미리 교통지도책을 보고 숙지를 한다. 다른 길을 쳐다볼 여유가 없음으로 쪽지에 그려놓은 약도를 보고 길을 찾는다. 그리고 신호등에 걸려 차가 서게 되면 차 문을 열고 수도 없이 길을 묻는다.

내가 아는 길로만 가게 되다보니 흔적이 남는 것처럼, 자연히 단골이 생기게 되었다. 특별히 나를 잘 대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20년 농촌목회를 하면서 그동안 교회를 3번 옮겼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은 자동으로 나의 단골이 된다. 그리고 한번 단골로 삼은 집은 그 집에서 다시 오지 말라고 욕을 하면 모를까 거의 떠나지 않는다.

이발소, 중국집, 냉면집, 슈퍼마켓, 카센터, 문방구, 책방, 신발가게…. 한번 이발소에 내 머리를 맡겼으면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던가, 아니면 이발소가 문을 닫든가 둘 중 하나이다. 한번은 내가 단골로 다니는 이발소 주인아저씨가 약주를 좋아해서 한 열흘 동안 이발소 문을 닫은 적이 있었는데 일곱 번인가 여덟 번째 찾아가서 기어코 머리를 깎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단골로 출입을 하다보니 주인과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 미주알고주알 그 집 속사정으로 다 꿰고 있다. 서로 짓궂은 농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것이 심하면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한다.

내가 가는 음식점은 내가 가기만 하면 음식을 무조건 곱빼기로 준다. 냉면이든 자장면이든 곰탕이든…. 어쩌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가는 기회가 있어도 나한테만 곱빼기로 음식을 내놓아 민망할 적도 있다. 내가 첫 발을 들여놓은 곳이 내 길이고, 어리버리한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내 몸이 저절로 감지하는 모양이다. 내가 민첩하지 못한 탓으로 나는 어느 것이든지 익숙한 것이 좋다. 물건도 새 것보다 오래된 것이 좋다.

자동차 운전을 한 10년 쯤 하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애를 먹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경우 바짝 긴장을 하게 된다. 차문을 열고 물어물어 길을 찾다보면 길이라는 게 다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은 다 통한다"는 최근 내가 발견한 삶의 또 하나의 표지이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생소하기만 하다.

빠릿빠릿하지 못한 내가 나의 일상을 인터넷 온라인에 공개했더니 내가 말로만 느릿느릿이지, 기회주의적인 속성을 지닌 약삭빠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이다. 생각은 자유이니 아무렇게나 생각하라고 해라. 그렇다고 내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부산 성광교회 청년들과 함께. 주일 성서연구 모임을 마치고. ⓒ사진제공 박철
나의 아버지는 왜 나를 보고 '미련곰탱이'이라고 부르셨을까. 내가 하도 느리고 굼떠서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그렇게 부르셨을까마는, 그러나 나는 '미련곰탱이'에 조금도 불만이 없다. 나는 내가 모르는 길은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안다고 하는 길도 조목조목 따지면 잘 모르고 서툴기 짝이 없다. 아내는 내가 순수해서 나와 결혼을 했다고 말한다. 아마 느리고 굼뜨고 서툴기 짝이 없는 내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아내 눈에는 순수하게 보였던 것인가.

나는 '미련곰탱이'의 삶을 계속 살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것이 내가 이 살풍경한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방법일지 모르겠다. 누가 나의 걸음을 경원(敬遠)하든 함께 걷기를 원하든 나는 내 식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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