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길자연)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위원장 오성환)가 한기총 가맹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복음) 총회장 장재형(55) 목사의 통일교 전력을 조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 목사를 둘러싼 논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장재형 목사는 교계에서 다방면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 목회자. 그는 2003년 말 합동복음 교단 총회장직에 올랐고, 현재 <크리스천투데이> 상임이사이며 학생선교단체 '예수청년회'와 '한국학원복음화선교회(CEF)' 설립자이다. 음악선교회 '주빌리미션'과 문화선교단 '브리드코리아' 역시 장재형 목사가 세운 단체다.

<뉴스앤조이>는 장재형 목사와 관련된 각종 논란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3회에 걸쳐 이를 집중 보도한다. 장재형 목사의 반론은 지면관계상 따로 게재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장재형 목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편집자 주).

공식적으로 드러나는 장재형 목사의 통일교 전력은 1975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1975년 2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합동결혼식에 참가한, 소위 '1800가정' 출신이다. 이 때 주례는 통일교 교주 문선명이 맡았다.

▲ 장재형 목사가 단장으로 활동한 대학순회전도단의 활약을 담은 <통일세계> 1977년 7월호. 기사 아래편에 '장재형 단장'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통일교가 발행하는 월간지<통일세계> 1977년 7월호에 따르면, 장재형 목사는 건국대 행정학과 재학 시절 원리연구회 활동을 시작했으며 졸업 후 경북 달성에 나가 개척전도를 했다. 이후 원리연구회에 돌아와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신촌학사장을 지냈다. 1977년 1월에는 대학순회전도단장으로 '발령' 받았다. 이후 장재형 목사는 1977년 3월부터 1979년 8월까지 대학순회전도단 단장을 역임했다.

<통일세계>는, 대학순회전도단 단원 전원이 대학 졸업생으로 이뤄졌으며, 오전에는 학사에서 자체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대학을 중심으로 전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각 대학에서 원리운동전시회와 세미나를 주관하고 100여 명의 학생을 주말수련에 초대해 이들이 (통일교에) 입회했다고 전하고 있다.

<통일세계>는, 장재형 목사가 대학순회전도단의 사명에 대해 "대학순전단은 민족에 앞서 대학원리화(학원원리화)에 주역을 담당해 나가야 한다" "졸업생 제대자 등을 교육하여 일괄적으로 일선에 진출시키는 것이 중요한 사명이다" "대학인을 상대로 원리 전파를 하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민족원리화의 종자요 핵이다"고 답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장재형 목사와 함께 대학순회전도단 활동을 했다는 한 단원은 "통일교회에 들어온 후 변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원리를 통해 생의 목표와 가치를 얻었다" "메시아관이 확립됐다"고 답한다. 장재형 목사는 꿈을 묻는 질문에 "청년과 더불어 민족원리화에 젊음을 바치는 것이다. 섭리에 따라 민족을 넘어 세계인의 원리화가 가능함을 기필코 보여줄 것이다"고 답한다.

"민족원리화에 젊음 바치겠다"

▲ <통일세계>에 나온 대학순회전도단의 모습. 장재형 목사는 1977년 3월부터 1979년 8월까지 대학순회전도단 단장을 역임했다.

장재형 목사가 단장으로 활동했던 대학순회전도단의 성격은 과연 무엇일까. 통일교에서 탈퇴한 후 꾸준히 반통일교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준철 목사(한국기독교통일교대책협의회 사무총장)는 대학순회전도단의 성격을 '통일교 목사 양성기관'이라고 규정한다. 6개월 동안 교리공부와 전도를 병행하며 통일교 교역자를 집중 양성하는 코스라는 것이다. 통일교에서 나온 자료들도 박준철 목사의 주장과 유사하다.

통일교가 1990년 펴낸 「문선명선생고희기념문집 11」은 대학순회전도단에 대해 "통일가의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인재양성기관으로서, 원리연구회의 정회원인 졸업생들이 입단하여 합숙과 헌신 생활을 통한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인원관리와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에 의해 뜻에 필요한 지도자를 양성하여 대학 및 학사별 활동에 기동력 있고 적절한 지원 및 전도활동을 하며, 원리운동에 필요한 섭외 및 문화활동과 교과 및 화보 간행물 발간을 통하여 대학가 원리운동을 지원하는 데 그 결단의 취지가 있다"고 말한다.

통일교가 1984년에 펴낸 「오늘의 섭리역사」는 대학순회전도단에 대해 "회원 확보와 식구 전도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학생식구들이 졸업하며 대학순회전도단에 입단하여 6개월 간 교육과 선교활동을 마친 후 학사장으로 출발하기도 하며 현재 공직자 대부분은 순전단 출신이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장재형 목사 이후에 대학순회전도단 단장을 역임한 사광기 씨는 현재<세계일보> 사장이며, 역시 단장을 역임한 진성배 씨는 통일교가 운영하는 선문대학교 부총장으로 재직중이다.

대학순회전도단은 교역자 집중양성코스?

▲ 통일교가 펴낸 화보집에 담긴 전국대학원리연구회와 국제기독학생연합회의 활동 모습.

또한 「오늘의 섭리역사」는 장재형 목사를 '원리연구회를 이끌어온 초기 주역들' 가운에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원리연구회'는 현재 문선명 교주의 4남 문현진 씨가 회장으로 있는 '월드카프(World CARP)'의 전신이다. 「오늘의 섭리역사」에 따르면, 초창기 원리연구회는 통일교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청파동 본부교회 옆에 단칸방을 마련해 사용했다고 한다.

원리연구회의 성격은 단체의 목적을 '본회는 통일원리를 기본이념으로 한다'고 밝히는 부분에 잘 나타나 있다. 문선명 교주의 영향력 또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섭리역사」는 원리연구회의 마크를 "선생님께서 직접 도안하신 것이다"고 말하고, "1966년 1월 10일 상오 10시 협회본부 강당에서는 전국 각 대학원리연구회 회원들이 모여 선생님을 모신 가운데 전국대학원리연구회 및 산하 각 지구회를 결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당시 원리연구회는 대학가를 돌며 각종 강연회를 열었는데, 현재 통일교가 정력적으로 펼치고 있는 '순결운동'의 본부격인 '한국청소년순결운동본부'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태 씨와 <세계일보> 사장을 거쳐 현재 통일교 산하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직에 있는 박보희 씨가 강연회의 주요 연사였다.

강연회에 문선명 교주가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의 섭리역사」는 1971년 11월에 열린 전국대학생총회에 문선명 교주가 참석했고 참가자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1978년을 시작으로 원리연구회는 해마다 연합선교대회를 개최했는데, 강연의 주된 내용은 '문선명과 통일교회' '인류의 장래와 문선명의 사상' '인류의 정신혁명과 통일원리' 등이었다.

원리연구회가 통일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대학가의 기독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원리연구회의 활동을 견제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는 동아리 등록을 불허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며, 원리연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기독인들의 목소리는 날로 거세졌다.

대학가 주변에 통일교 회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학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0년이다. <통일세계>에 따르면, 장재형 목사는 1972년부터 1977년 1월까지 신촌학사장을 지냈는데, 「오늘의 섭리역사」는 "1976년 2월 15일부로 학사가 협회행정체제에 맞춰 학사교역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학사장은 그 지위가 교역장으로 인정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교역장은 통일교의 목회자를 지칭하는 용어다.

'원리연구회 이끈 초기 주역'

▲ 국제기독학생연합회가 펼친 각종 활동들.

원리연구회와 대학순회전도단에서 활동하던 장재형 목사는 1982년 국제기독학생연합회로 무대를 옮긴다. 이 때의 상황에 대해 「오늘의 섭리역사」는 "1982년 10월 선생님의 귀국과 동시에 수택리 영빈관에서 전국의 학사장들이 모인 가운데서 독립단체로서의 분리를 명하심으로써 당시 원리연구회 학사장으로 시무하던 장재형, 이재홍, 위성재 제씨가 국제기독학생연합회로 '전보되어' 활동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문선명선생고희기념문집 11」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80년 겨울방학에 기독학생초청 원리수련회를 개최하고 81년 여름까지 2차에 걸쳐 일본 방문을 마친 기독학생들과 원리연구회의 장재형, 이재홍, 위성재 3명의 학사장이 국제기독학생연합회 창립멤버가 되어 발기 및 창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제크리스챤 교수협의회와의 연계기구로 한국에서 국제성을 띠는 국제기독학생연합회(ICSA)를 결성하기로 하고 뜻을 같이 하는 기독학생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1981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국제기독학생연합회가 내건 창립 목적은 '교회일치운동' '예언자운동' '기독교토착화' '평화를 구현하는 사랑의 공동체' 등이었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문선명 교주의 영향력이 곳곳에 묻어난다.

'이데올로기의 혼미 속에서 방황하는 대학생들에게 거시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개설했다는 '이념교실' 주요 프로그램 중에 '문선명 선생과 통일사상'이라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이를 잘 웅변한다. 이들이 개최한 수련회 강사진에 선문대 총장을 지낸 윤세원 교수 등이 포진해 있다는 점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문선명선생고희기념문집 11」은 국제기독학생연합회가 1986년 주최한 수련회에 "본회 창시자인 문선명 선생의 말씀을 듣는 귀한 시간도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고, 같은 해 여름에 열린 수련회에서 '청평 성지순례'를 다녀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국제기독학생연합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며 이곳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또한 이 단체가 주축이 되어 펴낸 잡지 <주류(主流)>의 편집인으로도 활동한다. 이 잡지는 '교회의 일치와 혁신'을 모토로 내세웠지만 일반 기독 잡지에 비해 통일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장재형 목사가 편집인으로 일하던 당시 발행된 2호(1982년 10월)에는 1950년대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통일교로 넘어간 김영운 박사가 기고한 글이 눈에 띈다. 당시 미국에 있는 통일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하던 김 박사는 '근본주의 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에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통일교회는 참된 기독교를 부흥시키기 위하여 만백성을 위한 신령과 진리를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그 까닭에 저는 처음에 통일교회에 가담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김 교수는 "통일원리는 기독교교리의 합리적 해석과 이치에 맞는 성서해석을 제공합니다" "이 시대를 위한 신의 특별한 섭리가 무엇임을 안다고 자부하고 있고 그 섭리를 성취해 드리기 위해 헌신을 다짐하고 나가는 교단입니다"고 주장한다.

▲ 장재형 목사의 활동상을 언급하고 있는 통일교측 자료들.
▲ 장재형 목사의 활동상을 언급하고 있는 통일교측 자료들.

국제기독학생연합회 창립멤버

'합동결혼식 참여' '원리연구회 창립 주역' '신촌학사장' '대학순회전도단장' '국제기독학생연합회 사무국장'. 이상의 직함은 통일교 자료에 나타난 장재형 목사의 젊은 시절 이력이다. 장 목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통일교 주요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요지로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박준철 목사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장 목사가 지나온 과정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를 기르는 '엘리트 코스'라는 것이다. 1972년 건국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장재형 목사는 1979년 한신대학교 신학과에 편입한다. 이력만 놓고 보자면 1979년을 기점으로 '정통기독교'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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