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을 앞두고, 기드온은 양털뭉치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어긴 기드온의 행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32,000명 중에서 300명을 선발한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 여하에 따라 기드온의 평가와 하나님의 의도를 받아들이는 각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3. 미디안과의 전쟁(삿 6:3 이하)
기드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면서 하나님을 ‘평강을 주시는 분’ 즉 ‘여호와 샬롬’으로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 집에 있는 바알 신상을 훼파하면서 여룹바알이란 이름을 얻으며 하나님 앞에서 큰 용사로 자라갈 즈음에 적의 대군이 밀려옵니다. 미디안의 지배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는데, 아말렉 사람과 이스마엘 사람 등 동방 연합군이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평야에 진을 치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이때에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그가 나팔을 불어 먼저 자기 집안 아비에셀 족속을 모읍니다. 기드온은 사람을 자기 지파 므낫세에게 보내고 아셀과 납달리 지파에게도 보냈더니 그들도 기드온에게 모여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방법으로 지도자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1) 양털뭉치 시험(삿 6:35-40)
기드온이 보니 적이 마치 떼 지어 나는 메뚜기 떼 같고 바다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성경에서의 메뚜기는 우리가 논에서 잡는 수준의 메뚜기가 아니라, 수백만 수천만 마리가 하늘을 시커멓게 덮으며 날아와서는 곡식은 물론 모든 푸른 풀과 나뭇잎과 연한 순까지 깡그리 먹어치우는 무서운 재앙을 몰고 오는 그런 메뚜기를 말합니다(7:12). 적병은 135,000명이나 되는데(8:10) 기드온과 함께 있는 백성들은 32,000명뿐입니다. 수많은 적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백성들을 바라보는 기드온의 마음이 떨립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실 계획이시라면 내가 믿을 수 있는 표징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내놓겠으니, 이슬이 양털뭉치에만 내리고 주위의 땅은 뽀송뽀송하게 마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임을 내가 알겠습니다.”

그는 양털뭉치를 마당에 내놓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도한대로 땅은 바싹 말랐고 양털뭉치는 흥건히 젖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습니다. 이만하면 만족하여야 하는데, 다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진노하지 마시고 이번만 더 기도하겠으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양털뭉치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시험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다시 타작마당에 양털뭉치를 내놓겠으니 땅은 폭 젖되 양털뭉치는 마르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시고 그의 시험에 응하셔서 양털은 마르고 마당은 젖게 해주십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3-14).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시지도 시험을 받지도 않으신다면서, 기드온의 시험은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시험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시험하다, 유혹하다, 훈련하다, 인내하다, 증명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 야고보서는 유혹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창 22:1 이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셨다고 하시며(신 8:2),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도 하십니다(말 3:10). 성경 전체에서 시험이란 말이 광범위하게 쓰여 한 두 마디 말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시험이 유혹이나 원망, 도전의 부정적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와 시련, 테스트 등의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무게를 달아보시기 위한 테스트의 개념과 성숙을 위한 연단, 시련의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시험을 받아주시는 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에 대한 시험, 즉 테스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유약하고 부족한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 확신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꺼이 시험에 응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떼를 쓸 때에 나타나셔서 믿음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 왕 아하스에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였을 때에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사야는 칭찬은커녕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다고 왕을 책망합니다. 단어에 매이지 말고 전체 문맥에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사 7:10-13).

제가 초신자일 때에 목사님께서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듣고, 좋겠다 싶어 자녀를 위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주연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건강 주시고, 좋은 성품 주시고, 공부 잘하고, 좋은 친구 사귀고, 선생님께 사랑 받고, 동생과 싸우지 않고….” 그런데 제 아이가 이를 심하게 갈아서 속상했거든요. 그래서 “이 갈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아버지로서의 몫을 하고 있다는 뿌듯한 기쁨과 만족감이 느껴져 성실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 자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는데, 잘 자던 녀석이 이를 심하게 갈면서 잠꼬대까지 하며 제 손을 뿌리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었고, 또 자식을 향한 바람을 나열한 것이지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생각은 없었다는 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더구나 이 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아예 하지도 않았지만, 자식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것만 빼놓고 하기도 그래서 그냥 했던 것인데, 막무가내로 뿌리치는 아들 녀석 때문에 기가 꺾여 빼고 할까 싶었지만 빼는 것도 그래서 그냥 기도했습니다.

8개월 즈음에 습관을 따라(?) 의례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의식(儀式)(?)을 계속하였는데 놀랍게도 그게 이를 갈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내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어했던 부분이었고 간절한 바람이었으면서도 ‘안 갈 수도 있지’ ‘우연이겠지’ 그래 버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다른 몇 가지가 응답된 것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기도의 세계가 눈앞에 활짝 열리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는 기도가 어떻게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응답받았다는 사실이 신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이해가 안 됐는데, 나중에야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지만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믿음의 영역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는 유능한 사람이라야 택함을 받고 쓰임도 받는다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택함을 받고 쓰임을 받게 될 때에 ‘내가 괜히 우쭐해서 나선 것 아냐?’ 하면서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어서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유가 바로 ‘과연 나를 쓰시겠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에 회의를 갖거나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나를 쓰신다는데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과연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쓰시겠는가?’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함이었고, 하나님의 뜻 또한 그런 나약한 기드온을 쓰시려는 것이기에 기꺼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응답 받아 물이 흥건한 양털뭉치를 손에 든 기드온은 하나님을 찬미하면서도 한 번 더 시험을 하여 아직도 흔들리는 자신을 견고히 세워주시기를 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흔쾌히 시험을 받아주셔서 확신을 갖고 이 전쟁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얻은 기드온은 아침 일찍이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적진을 마주 대하여 진을 칩니다. 이제 기드온은 제 아무리 많은 적일지라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전쟁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은 설렘과 감격으로 이 성전(聖戰)을 수행하려 일어섭니다.

(2) 300명 용사(삿 7:1-8)
이 때에 하나님께서 제동을 걸고 나오십니다. 어렵사리 큰 확신으로 용기백배하여 전쟁을 수행하려는데 하나님께서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 많은 적 때문에 위축된 마음을 양털뭉치 시험을 통해 겨우 일으켜 세웠는데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아군이 많다는 말씀이십니다. 어이가 없어 항변하려는 기드온에게 다음 말씀이 떨어집니다. “내가 이 전쟁에서 미디안을 이기지 못하게 하겠다. 왜냐하면 이 백성들이 나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하지 않고 스스로 긍지를 높여 ‘우리 힘으로 미디안의 많은 적을 물리쳤다’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은 자들이어서 전쟁에 이긴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많은 적들을 무찔렀는가 하며 무용담을 늘어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다음 말씀을 기다립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러면서 기드온은 자신을 설득합니다. ‘그래, 두려워서 떠는 자라면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무용지물일 거야.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것보다 돌아가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갑니다. 자그마치 22,000명이나 짐을 꾸려 떠나갔습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고작 10,000명, 과연 이 인원으로 저 무수히 많은 미디안 연합군을 이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저들은 전쟁에 익숙한 군인들이 아닌가? 마음에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하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많다.” 기드온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도 많다니, 적의 연합군이 아니라 우리 남아있는 10,000명이 많다니….’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데리고 하롯 샘물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그들을 시험하겠다. 그리고 내가 ‘이들이 너와 함께 갈 것이다’ 하면 이들이 가고 ‘이들은 너와 함께 가지 말라’ 하면 그들은 돌려보내도록 하라.” 물가로 내려온 백성들은 목이 말랐던 터라 저마다 달려들어 물을 마십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갈증이 심하였던 차에 물을 보자 엎드려 머리를 처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십니다. 개중 몇몇은 많은 무리 때문에 흐려진 물을 차마 그대로 마시지 못하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엎드려 물을 마신 사람을 따로 세우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사람도 따로 세워라.” 대부분 엎드려 물을 마셨고,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신 자들은 30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가 물을 떠서 마신 300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들을 네 손에 붙여 줄 것이니 나머지는 돌려보내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드온은 300명을 제외한 9,700명을 돌려보냅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왜 300명이 뽑혔을까요? 그들이 적전(敵前)이라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며 적이 오나 안 오나 살펴보았기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갖고 있는 성경책에는 대부분 주석이 밑에 쓰여져 있을 것이니 살펴보십시오. 주석이 있는 경우 거의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봅시다. 적의 앞이라서 경계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보초병을 세웠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135,000명이나 되는 대군도 초병을 세워 경계를 하고 있는 판인데 말입니다(삿 7:19). 물을 마시면서 각자 적을 경계하여야 했다는 이야기는 이 상황과 아무리 붙여 보려고 해도 자석에 납을 붙이기보다 더 어려워 보입니다. 군대에서 일개 분대가 행진하거나 휴식을 취할 때도 초병을 앞서 보내거나 보초를 세웠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만,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앞질러 판단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분의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시는 말씀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7:2, 4) 많기 때문에 숫자를 줄이는 것이고, 숫자를 줄이는 이유가 전쟁에 이긴 후에 ‘우리 힘으로 적을 물리쳤다’라고 자긍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7:2). 실제로 오늘날 우리들도 이 전쟁의 승리의 원인을 기드온의 300명에게서 찾기 때문에 그들의 빼어난 점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보았고 그 근거로 ‘경계심’을 찾아낸 것이 아닙니까?

‘기드온 300명 용사’ 하면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아니면 ‘300명’의 위대함을 떠올립니까? 300명 용사를 떠올리면서 그들의 위대함 앞에 감격하며 그들을 닮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자세로 달려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300명에게 ‘용사’라는 칭호를 붙여 줌으로 우리의 초점이 ‘300명의 위대함’에 맞춰져 있음을 들키고 있는 것입니다. 300명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목적이, 승리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라는 사실을 백성들이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반석 위에 놓인 예물에 지팡이를 대지만 불은 반석에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드온이라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만, 또 300명을 동원하지만 모든 능력과 승리는 내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300명은 군인으로는 오히려 부적합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군인은 흙탕물이라도 머리를 처박고 먹는 사람들입니다. 300명처럼 물을 떠서 호호 불어가면서 마시는 사람은 용사답지가 않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손도 안 씻고 간식을 집어먹는 저를 불결하다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불결한 저보다는 깔끔을 떠는 아내나 딸이 감기도 잘 걸리고 배탈도 잘 납니다. 그러니까 손을 씻지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300명을 용사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들이 용사가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용사이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3) 만화 같은 전쟁(삿 7:9-23)
32,000명의 백성이 다 돌아가고 남은 300명과 함께 있는 기드온은 밤을 맞이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더 주십니다. “기드온아 두려우냐? 네게 두려운 마음이 있다면 네 부하를 데리고 적진으로 내려가 정찰을 하여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아라. 그러면 네가 기운을 차려서 능히 적을 칠 수 있을 것이다.”

기드온이 부하를 데리고 즉시 적진으로 내려갑니다. 왜 내려갑니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32,000명도 적어서 떨었는데, 이제 300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떨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숫자도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드온도 숫자에 초연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드온에게 믿음 없음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마음의 두려움을 인정하시고 그를 격려하기 위한 일을 꾸미십니다.

기드온은 적진에 내려가서 두 병사가 주고받는 꿈 이야기를 듣습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우리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더라”. 곁의 병사가 해몽을 합니다. “그 보리떡 덩어리는 기드온의 칼날이야. 하나님이 우리들을 그의 손에 붙이신 거야.” 어린아이가 들어도 하나님이 저들을 통하여 기드온을 격려하심을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은 즉시 하나님께 경배하고 300명에게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하필이면 왜 보리떡일까요? 보리떡으로 무너지는 텐트는 없을 겁니다. 보리떡 같이 하찮은 기드온의 손으로 적을 무너뜨린다는 말씀은 여전히 기드온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기드온과 300명이 보리떡에 불과하다는 말씀이시고, 이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의 몫이라는 말씀이지요.

300명에게 돌아온 기드온은 단호한 어조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 군대를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 기드온은 300명을 100명씩 세 부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게 하고 그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따라 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또 우리 100명이 나팔을 불면 너희도 같이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라고 외치라고 일러줍니다.

기드온의 일행이 이경 초(밤 10시~새벽 2시인데 초니까 10시경) 마침 보초병이 교대할 때에 적진 가에 다가가서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다른 두 무리도 바로 항아리를 깨뜨리고 횃불을 높이 들면서 나팔을 불었고 또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적들은 큰 혼란이 일어나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저희들끼리 적으로 오인하여 칼을 휘두릅니다.

여기서 잠시 전장(戰場)의 상황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적 135,000명이 텐트를 치고 낙타 등의 짐승과 함께 누워있으려면 엄청난 넓이의 땅이 필요합니다. 기드온의 300명이 둘러쌌다고 하지만 저들에게 어떤 위협을 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 적진은 깜깜한데 횃불을 들고 서 있는 기드온 일행이 적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니 적이 활을 쏘거나 칼을 들고 달려들어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한 손에 횃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 나팔을 들고 불면서 칼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당연히 이들에게 칼은 필요 없었을 것이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을 때에 적들이 자기들의 칼로 서로 죽이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너무도 명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칼은 미디안의 칼이지만, 그 칼이 ‘여호와와 기드온을 위하여’ 일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전쟁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적의 숫자와 아군의 숫자를 헤아리고 무기를 헤아리지만, 하나님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너무 우습게 끝나서 마치 엉터리 만화영화를 보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만화 같은 전쟁’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을 배제시키면 그야말로 ‘엉터리 만화’가 되는 것입니다. 300명에게 경계심이나 능력 따위가 문제가 아님을 알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모습에 감격하고 고무되어 이제는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담력과 용기를 얻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기드온과 300명은 용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혼비백산한 미디안 연합군의 패잔병들은 요단강을 건너 자기 땅으로 도망합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몰려와서 미디안의 패잔병을 쫓습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연락하여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그쪽으로 간 적의 동태를 알리면서 길목과 나루터를 지켜 도망하는 적의 잔당을 다 진멸하라고 당부합니다. 연락을 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정보대로 나루턱을 지키다가 적장 오렙과 스엡을 잡아 죽이고 기드온에게 나아옵니다.

전쟁은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미디안은 주력 12만을 잃고 패잔병 15,000명이 도망하고 있을 뿐입니다. 백성들이 적을 쫓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을 추격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적의 소탕보다 전리품 획득이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 전쟁에서는 노획물이 큰 비중을 차지할 때였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약속하신 대로 적들을 그와 300명에게 붙이셨습니다. 아울러 300명에게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적진을 유린한다든지 하는 실제적인 전투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이 입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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