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하고 담대하라> / 대양주영하기념사업회 편 / 홍성사 펴냄 / 294쪽 / 2만 원
교육과 한글 사랑에 헌신한 대양(大洋) 주영하 박사의 삶과 신앙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과 경제 성장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1세기를 살다 간 대양(大洋) 주영하 박사. 세종대학교 설립자인 그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교육과 한글 사랑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많은 활동을 했고 업적을 남겼다. 주영하 박사의 소천(召天) 1주기를 맞아 대양주영하기념사헙회에서 펴낸 이 책 <강하고 담대하라>에는 그의 삶과 헌신의 발자취가 오롯이 담겨 있다.

1~6부까지의 본문은 출생에서 학창 시절을 거쳐 교육자로서 걸어온 길(1~5부)과 소천 후의 이야기(6부)로 되어 있으며, 부록에는 한글 사랑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사회 활동에 대한 내용과 대양의 글 및 대양을 위한 글들이 실려 있다. 본문 앞부분에 실린 50여 컷의 사진들은 학창 시절에서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모습과 행적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 준다.

'조용하고 낮게 살면서도 높은 이상을'

1부 '출생과 학업'에서는 어린 시절과 성장기, 학창 시절의 모습 등을 통해 그의 신앙과 애국 애족하는 마음, 교육자로서 헌신하게 된 계기 등이 소개된다. 대양은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이웃에 사는 김병수 장로를 통해 신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조국애가 싹트기 시작했다. 16세 때, 그때의 소회를 담아 9년 뒤인 1928년 4월 <조선일보>에 소개된 시 '실제(失題)'와 '버들피리'도 소개된다.

함흥 영생고등학교 시절, 그는 17명의 학우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퇴학당해 서울의 경신학교에 편입학했다(6쪽의 사진 9는 이때 출옥한 학우들과 찍은 것이다). 경신학교 시절엔 친구들과 브나로드 운동에 가담했으며, 이때 대양은 '한글'과 '교육' 두 가지를 위해 보국(輔國)할 것을 결심한다. 대양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원한경 교장과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등 훌륭한 스승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조용하고 낮게 살면서 높은 이상을 바라보는 인생의 길을 걸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데, 이 말씀은 교육계에 진출하는 꿈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부 '결혼과 가족'에서는 평생의 반려자인 최옥자 목사(1919~ )를 만나 결혼하게 된 과정과, 자녀들(2남 2녀)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의학을 전공한 최옥자는 대양과 함께 수도여자사범대학교를 설립하고, 이후 성장과 변천 과정을 거쳐 학교법인 대양학원과 세종대학교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생을 헌신해 왔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기 전에 자녀를 가르치는 스승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는 곧고 바르며 덕스러워야 함을 늘 강조했다.

'쉽고 넓은 길보다 멀고 좁은 길을'

3부 '교육자의 길'에서는 학창 시절에 세운 교육을 위한 그의 뜻이 이루어져 가는 긴 여정을 통해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돌아본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중등 교육기관인 경성인문중등학원에서 시작하여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전신인 서울여자대학관,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를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과 세종대학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대양과 최옥자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헌신한 발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다.

대양은 일찍이 양성평등의 시각이 있었다,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직업을 통해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남녀평등의 길로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으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하기를 열망했다. 그 열망이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된 사범대학인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결실을 맺었고, 이후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중등 교원 양성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 시절, 대양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서 학교의 재건을 위해 힘쓰기도 했다. 그는 피난길에 하마터면 북으로 끌려가 버릴 뻔하기도 했으며, 부산에서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사의 위기를 넘나들기도 했다. 대양은 학생들을 기도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치게 했으며, '쉽고 넓은 길보다 멀고 좁은 길(마 7:13)'로 들어서는 것이 교육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교양 과정에서 인문학에 비중을 두었으며, 학문과 전문 기술도 중요하지만 인격을 높이는 데 힘써 사회인으로서 훌륭한 봉사자로서 빛과 소금처럼 세상을 위하는 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다.

1978년, 수도여자사범대학은 '세종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남녀 공학으로 변신하는데, 세종대왕의 이름에서 따온 '세종대학'이란 명칭은 훈민정신을 계승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대양은 평생 세종대왕을 흠모했으며, 교육 사업과 더불어 한글 사랑, 국어 사랑을 위해서도 헌신했다.

4부 '국가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교육을 위한 열정'에서는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지내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학교를 선진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담겨 있다. 학교법인을 위한 재단 수익 사업으로 강원여객자동차주식회사, 춘천세종호텔과 서울세종호텔을 설립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소개된다. 관광 사업의 기반이 열악했음은 물론 그 개념과 인식조차 흐릿했던 1960년대, 대양 부부는 우리나라 관광 사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춘천과 서울에 세종호텔을 지었으며, "우리는 세계인을 형제애로 대접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호텔을 경영해 왔다(당시 수도여자사범대학 관광경영학과와 호텔경영학과 학생들의 실습 현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학교와 호텔, 언뜻 보기에 이질적인 두 분야를 이끌어 오면서 대양은 둘의 공통점을 실감했다. "세상 어느 분야에서나 진실은 통한다는 믿음으로 투명하게 이끌어 가면 결코 어긋나지 않으며, 그만큼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투명성과 정직함을 잃지 않고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매진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게 된다는 믿음은 오늘의 세종호텔이 있기까지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대양은 우리 문화재에도 각별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한 민속품과 서화, 도자기, 목공예, 의상, 장신구 등을 수집하여 1973년, 교내에 박물관을 세웠다.

5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대양학원'은 1988년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이후 세종대학교가 성장과 아픔을 겪으면서 교육자이자 부모로서 대양의 남다른 소회와 간곡한 심정이 담겨 있다. 대양이 후임자로 생각했던 장남 주명건(현재 대양학원 명예이사장)이 세종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고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기대와 달리 대학의 구성원들과 불협화음을 이루고 바람직하지 않은 운영으로 말미암아 파행의 길을 걸어왔다. 대양은 학교가 정상화되기를 위해 힘썼으며, 설립 당시의 창학 정신과 건학 이념이 올바르게 실현되어 가기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까지도 간구했다.

'우리 문화를 살리는 길'

대양은 크리스천으로서, 교육자로서 올곧은 삶을 걸어오며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한국도덕재무장운동, 한국대학생선교회, 세종선교회, 서울라이온스클럽, 한글문화협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어순화추진회 등에서 그는 설립 멤버나 임원으로서 헌신했다. 부록 1에서는 이들 단체의 설립 경위와 변천 과정 및 대양의 등이 소개된다. 부록 2와 3은 각각 대양이 쓴 글과 대양을 위한 글이다. 청년 시절부터 시작(詩作)과 평문(評文)을 쓰기 시작한 대양은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이 책에는 세종대왕, 안창호, 최현배, 백낙준 등 그의 스승님께 드리는 시를 비롯하여 일상의 단상들을 담담히 들려주는 10여 편의 글들과 후학들을 위한 글이 실려 있다. 부록 3은 2007년 95회 생일을 맞은 대양을 축하하며 지인들이 쓴 글들을 모았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