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말해 주는가

루터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반으로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며, "성경은 그 뜻이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성경을 읽을 수만 있다면, 성경이 자신을 해석해 준다 (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때 인문주의 진영에서 교회 개혁의 기치를 함께 나누었던 루터의 친구, 에라스뮈스는 성경이 아무에게나 그렇게 쉽게 해석될 수 없고 무엇보다 지도해 줄 수 있는 교회 (혹은 해석자)의 도움이 없이는 바르게 해석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며 결국, 신랄한 비난서를 서로 주고받으며 결별한다.

성경의 자명한 구원의 진리를 모든 신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종교를 개혁'한 것은 분명히 루터의 공적이다. 그러나 바르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전문가적 해석자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말년의 루터가 농민전쟁을 경험하고 통제되지 않는 평민들의 성경 해석을 보면서, 오해 가득한 '만인 대제사장설'을 지각 있는 귀족 지도자들에게만 한정하고 또한, 루터 교회 안에 성경 해석 전문 교역자 양성을 역설하던 데서 확인된다.

역사는 각설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은 쉽게 다가오면서도 절대 쉽지 않은 책이다. 성경은 마치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진 밭과 같다. 말 그대로 보화는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저 감추인 밭을 찾아, 어느 고고학자가 미로를 헤매듯, 궁구해 본 후에야 찬연히 빛나는 보화에 이르곤 하는 것 같다.

창세기 1장의 명료한 교훈

창세기 1장 1절로 31절까지 성경은 태초에 계신 하나님을 땅과 하늘들을 창조하신 능력의 창조주(엘로힘) 이시라고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창조하신 세계의 순서와 체계를 살펴보면, 특별한 질서와 계획이 있음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첫 삼일과 둘째 삼일로 양분되며, 그 완성은 칠 일째의 안식으로 마무리된다. 첫 삼일은 창조의 공간을 설정하시고 후 삼일에는 각각의 공간에 상응하는 창조물을 채워 넣으신다. 즉, 첫 사흘 동안 빛, 궁창, 뭍을 만드신 후, 후 삼 일 동안 빛을 주관하는 해, 달, 별, 궁창을 나는 새와 물고기 그리고 땅에서 사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이러한 창조의 계획과 질서는 "각기 종류대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보시기 좋았더라" 등등의 반복되는 구절들과 함께 일정하게 배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창조는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의 순으로, 무생물에서 유생물의 순으로 이루어졌으며, 땅과 바다에서 나는 식물에서부터 기는 것 그리고 땅에서 사는 동물과 인간의 순으로,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신다. 물고기는 물에서, 새는 하늘에서, 동물들은 뭍에서 사는 질서 속에서 생명이 유지된다. 무엇보다 최후로 창조된 인간은 아래로는 동식물들을 다스리고 돌보며,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지위를 부여받아 만물의 왕과 왕비로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 성경은 모든 것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창조주께서는 각 날의 창조가 마칠 때면, 여섯 차례에 걸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며 질서와 조화의 창조 세계를 치하하신다(4, 10, 12, 18, 21, 25절).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다'. 창세기 1장의 이 선포는 천지와 만물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이 본질에서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거스틴은 <신의도성>이라는 책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선하다(Every being is good)"라는 말로써 모든 만물의 존재론적 선함을 주장한다. 보이는 물질은 악한 것이라는 플라톤 철학과 마니교적 사상에 대한 반론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창세기 1장의 해석에 기반을 둔 신학적 주장이었다.

그러나 존재의 선함이라는 철학적 개념만으로는, 창세기에서 말씀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창조의 선함을 이해하기에는 막연하다. 모든 존재하는 것,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선함이란 분명 구체적이고 성경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어떤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창세기 1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창조의 선함, 즉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의 배열에 한두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1장 6~8절에, 궁창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의 창조 기사에는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다. 그런데 9~13절 셋째 날의 창조 기사에는 10절에 뭍과 바다를 가르시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고 12절에 땅에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두 번이나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왜 하나님은 궁창을 보시고 '좋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그리고 셋째 날의 바다와 뭍, 그리고 그 안의 과목들을 창조하셨을 때는 두 번이나 '좋았다'고 말씀하셨을까?

유대교 랍비들의 해석과 어떤 이단적 종파에서는 둘째 날, 창조하신 궁창에 대해 하나님이 '좋았다'고 하지 않으신 이유는 천사의 타락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에베소서에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자(2:2)"라는 말씀이 있는데 공중 (궁창)은 마귀의 처소이며 활동 공간이기에 악하다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살피지 않음이다. 하나님이 굳이 마귀의 처소를 창조해 주실 이유도 없거니와, 시편 19:1절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찬양한다. 성경은 궁창이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당신의 능력의 손길을 드러낸다고 말씀한다. 궁창은 마귀의 소굴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

반면, 이런 본문상의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 다양한 자료(source)를 가지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편집 (기록) 문제일 뿐이라고 쉽게 설명해 버리는 성경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이 성경 본문이 일점일획까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비평학 뒤에 숨어 나태하게 학자연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우리는 본문 비평학적으로 이 본문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이 본문 속에서, 왜 하나님은 둘째 날 궁창의 창조에는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으시고, 셋째 날 뭍과 바다의 창조에서는 '좋았더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는가를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서

초대교회의 해석자들은 창세기를 대할 때,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 경이나 제롬의 라틴어 역본을 보았다. 문제는 70인 경에는 6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을 삽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거스틴은 1장 6절의 주석에서, 궁창의 창조와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이 선포된다고 태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기에는 본문에 대한 좀 더 의미 있는 해석들이 나타난다. 중세의 대표적 학자인 아퀴나스는 6절에서 왜 궁창의 창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없는지 설명하면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라 하신 명령이 셋째 날이 되어서 완성되기 때문에, 둘째 날에는 좋았다는 말이 아직 없고 그것이 완성된 셋째 날에는 두 번이나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감각에 미치지 못하는 궁창의 일보다는 감각 세계의 창조인 셋째 날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둘이라는 숫자는 미완성의 숫자요, 삼이라는 숫자가 완성의 숫자이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빠지고 더해졌다는 영해를 가하며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해석이라고 덧붙인다.

루터는 창세기 강론에서 이러한 영해나 다양한 해석들을 헛된 호기심으로 치부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둘째 날에는 궁창이, 셋째 날에는 뭍과 바다와 그 가운데 식물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창조된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라는 것이다. 칼뱅은 궁창과 그 위아래의 물의 창조 사역에서는 '유익한 점 (ADVANTAGE)'이 없고 그 다음 날 행하신 뭍과 물의 나뉨을 통해서 과목이 자라게 된 때에야 '유익'하게 되었기에, 하나님이 두 번 '좋았다' 하셨다고 해석한다. 루터보다는 호기심에 차서 이 부분을 주해하지만, 짧으면서도 그 해석 안에 통찰력이 서려 있다.

모세오경 전체의 통일된 신학적-문체적 해석의 지평을 가지고 창세기를 주석하는 존 세일해머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로, 각 날의 창조에 대한 신 중심적 시각(THEOCENTRIC)이 아닌, 인간을 위한 시각에서 (ANTHROPOCENTRIC)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즉 궁창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 인간에게는 닿을 수 없는 저 먼 하늘이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셋째 날의 뭍과 바다는 모두 인간들에게 필요한 환경이며 특히, 과수목들은 인간에게 유익하고 좋은 것이기에 두 번에 걸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좋았다'는 평가는, 인간 창조까지 끝나는 31절에 이르러 "하나님이 그 창조된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창조의 모든 것은 인간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 베풀어 놓으신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감추인 보화: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의 진정한 뜻

둘째 날 창조된 궁창은 인간을 감싸 안는 하늘 공간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멀고 뜬구름 같은 장소이다. 그러나 셋째 날 창조된 뭍은 인간이 직접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이며, 그곳의 열매 맺는 과목은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음식이 되는 것이니 참으로 '유익'하며 '선한 것'이다. 인간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며 유익을 주는 것에 하나님은 아낌없이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의미인가? 당신의 창조 최고 걸작인 인간을 위해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놀랍도록 배어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존재의 선함을 넘어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기뻐하시고 '좋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에게 가장 실제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안겨 주며, 도리어 기뻐 미소 짓는 아버지가 되심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유익과 행복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기시는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그래서 인간 앞에 모든 것이 제공된 창세기 1장 31절에서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토브 메오드)"고 외치신 것이다. 사람을 위해 최상으로 갖추어진 세상, 빛과 공기, 땅, 바다, 식물, 어류, 조류, 짐승, 사시사철의 변화, 우주의 질서와 조화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해서 사람의 유익을 위해,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감추인 보화와 같은 성경의 메시지는 자명해진다. 사람을 위해, 우리를 위해, 가장 유익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이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섬길 때, 우리의 삶은 창세기 2장의 참된 행복의 낙원, 에덴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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