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나오는 과부 두 렙돈에 대한 말씀(막 12:38~13:2, 눅 21:1~6)은 '성전 건축 채무'에 시달리는 한국교회에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한국교회에서 주로 재정적인 헌신의 본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한 고드란트의 전 재산)을 예루살렘 성전 앞에 있는 연보궤에 넣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한국교회는 또 이 본문을 돈이 많지만, 전부를 드리지는 않았던 부자들의 헌신보다도 더 나은 것, 즉 그녀의 온전한 헌신이나 사랑의 행위에 대한 예수의 칭찬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녀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외식하는 자들의 범죄(38~40절)

예수는 "긴 외투를 걸치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라서, 그들에게 임할 최후의 심판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서기관이 누구입니까? 서기관은 비서가 아닙니다. 문서상으로 무언가를 받아 적거나 누구의 일이나 일정 등을 챙겨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율법학자를 의미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고 기록하는 일을 다루기 때문에 서기관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구약, 특히 모세오경을 해석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 인기와 권위와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자기 의를 따지는 사람, 즉 외식하는 사람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선행을 베풀 때, 길거리에서 나팔을 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선행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도 뭔가 꼭 티를 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독특한 옷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이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긴 외투'는 사실상 오역입니다. 그것은 부유하고 탁월한 랍비들이나 학자들이 걸치는 발끝까지 이르는 기도용 어깨걸이(shawls)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걸친 발목까지 이르는 기도용 숄은 이 경건하고 영적인 사람들을 몰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이들은 기도의 전문가입니다. 기도를 보통 몇 시간씩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기도하거나 금식할 때는 꼭 외적으로 티를 냅니다. 아마 세수도 하지 않고 겉옷도 빨아 입지 않고 향수도 바르지 않고 뭐 그랬나 봅니다.

그런데 이들은 시장 통, 즉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바쁜 자리에서 인사받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일단 인사가 시작되면 해가 갈 줄 모를 정도로 과장되고 장황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배와 종교적 일의 중심지인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이 높은 자리는 권위와 학식의 상징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학문과 종교의식, 그리고 심지어 잔치 자리에서도 상석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잔치의 상석은 명예와 큰 혜택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물론 맛있고 진귀한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멋진 선물도 받을 가능성이 더 높겠죠. 이처럼 이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특별한 자리에서 높은 대우를 받기를 바랐습니다.

혹시 '그 정도쯤이야'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서 더 심각해집니다. "이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들이 받는 심판이 더욱 엄중하리라." 이들은 작은 것에,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탐욕을 행합니다. 사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저명한 사람들이 이러한 사소하고 비양심적인 일에도 몰두한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죠.

사실 구약에서 레위인을 포함해서 고아와 과부와 객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보호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호의와 후원의 대상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약자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이 그 의무와 책임을 저버렸을 때 더 큰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사야서 10장 1~4절을 봅시다.

2 재앙이로다.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여

과부의 가산을 탕진하지만, 외식하여 기도를 길게 하는 서기관들의 모순이 드러납니다. 말 그대로 서기관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킨다. 문자 그대로 그들의 탐욕을 의미합니다.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과부를 망하게 하고 빈곤하게 하는 것만큼 나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과부의 재산을 부정직하게 다룬 것이거나, 과부의 호의를 속여 빼앗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자깨나 쓰고 아는 것 많다는 자들(서기관들)이 과부를 속여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걸하며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 재산을 바쳤더니 더 부자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탐욕이 가득하고 악을 행하며 이중 인격적인 자들,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십니다.

부자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41~44절)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넣었구나! 44 그들 모두는 그들의 풍족함 가운데서 일부를 넣었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가난함 가운데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도다."

이제 부자의 예물과 가난한 자의 예물이 극도로 대조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전 당국자들이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수단을 발견합니다. 앞서는 서기관들이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만, 이번에는 성전의 헌금함이 (역설적으로)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연보궤'는 예루살렘 성전 앞 즉 여성의 뜰 앞 주랑(colonnade) 아래에 넓은 바닥에 좁은 윗입구를 가진 나팔(쇼파르)모양의 13개의 기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 헌금함에는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 일 인당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헌금함에는 각각의 다양한 자원 제물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헌금함의 이름

용도

새 세겔

 

옛 세겔

남자 전용

새 제물

산비둘기 구입용

온전한 제물용 어린 새

집비둘기 구입용

나무

제단화목(火木)

 

구입용

몰약

몰약(沒藥) 구입용

속죄판을 위한 금

속죄판용 금의 구입용

6개의 헌금함

자원 제물용

과부가 바친 헌금은 아마도 일 데나리우스의 1/96을 의미합니다(쿼드란스는 앗사리온의 1/4, 앗사리온은 1/16 데나리오스).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 품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고 백 렙돈이 넘었습니다. 두 렙돈으로는 한 줌의 곡식 가루를 살 수 있었고 한 끼 식사를 때울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말은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말입니다. 과부가 낸 헌금은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혹은 제사장들이 가죽을 얻게 되는 번제물을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을 겁니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과부의 헌금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고아와 과부와 객은 헌금해야 하는 주체가 아니라 헌금이 사용되어야 할 객체들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예수의 말씀을 한국 기독교인들은 '과부의 진정한 경건'과 '부자들의 외식된 의'를 대조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이 칭찬이었을까요, 탄식이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가난하지만 분에 넘치는 헌금을 한 과부의 헌신을 칭찬하고 계신 걸까요? 아니면 가난한 과부의 분에 넘치는 헌신에 대해서 탄식하고 계시는 걸까요? 사실 값어치로 친다면, 부자들이 낸 일회성 헌금이 과부의 전 재산보다 더 많았을 것이며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이 말하듯이, 부자들은 '그들의 풍족한 중에서(out of their abundance)' 헌금을 하였지만,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가난한 중에서(out of her poverty)' 재산 전부를 헌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조됩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관습상(즉 제사장이 예물을 드리는 자의 예물의 종류와 목적을 확인한 후에 특정한 목적에 합당한 예물의 양-금액을 큰 소리로 불러 주기 때문에) 제사장의 소리를 듣거나 가난한 과부가 넣은 동전이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헌금의 액수를 알았을 것입니다. 물론 부자는 (아마도 큰 헌금을 낼 때 나팔도 불었을 것입니다) 큰돈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헌금했을 것입니다. 그는 헌금한 후에도 여전히 부자였겠지만, 가난한 과부는 전 재산을 헌금했기 때문에 이제 완전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관찰은 가난한 과부가 대단히 적은 돈을 헌금하고 부자들은 많은 것들 가운데 일부를 헌금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부자들의 인색함을 비판하거나 가난한 과부의 과도한 헌신을 칭찬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13:1~2)을 살펴봅시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말했다. "선생님! 보십시오. 성전을 이루는 이 돌들이 놀랍지 않습니까! 성전을 이루는 이 건물들이 화려하지 않습니까!" 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면서 예수님의 제자는 여전히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매료되었습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이 예배를 마치고 교회당을 떠나면서 여전히 그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수백억 수천억짜리 교회당을 떠나면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성전을 이루는 대리석들, '성전'이라고 불리는 초호화 현대식 건물들! 이 아름다운 웅장한 그리고 값비싼 성전은 아름다운 돌들과 많은 사람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5~6절을 보십시오.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6 "너희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임할 것이다."

장차 무너질 성전은 심지어 가난한 과부의 헌금(전 재산)으로도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서기관들의 거짓말에 속아 헌금을 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그에게 말합니다. 이 성전은 어느 날 돌덩이의 무더기로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은 성전 건축 혹은 유지 보수를 위한 헌금과 임박한 성전 파괴의 재난을 대조합니다. 성전에 임하는 재앙은 이미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미가 3장 9~12절을 보십시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구약의 예언은 돌무더기 즉 쓸모없는 돌무더기가 되겠다는 말인데, 이제는 돌이 돌 위에 놓이지도 않는다는 말은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의 건축의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유적지에 가 보시면, 돌 위에 돌이 하나라도 놓여 있다면, 그것이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 줄 가정할 수라도 있겠지만, 돌 위에 돌 하나도 놓여 있지 않다면 그 원래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성소(전) 건축과 파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 번 이상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사사 시대의 끝인 사무엘의 시대에 엘리가 실로에서 대제사장으로 있던 시대였습니다. 엘리 대제사장 일가와 실로 성소는 파괴되고 심지어 여호와의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히기까지 합니다. 제사장 제도의 타락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블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삼는 담보물로 삼으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성소를 파괴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해야 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예루살렘으로 성막을 옮기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세운 통일 왕국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결국 유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후 꿈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다음과 같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왕상 9:6~8).

8 "이 성전이 한때 아무리 존귀하게 여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랄 것이고 '어찌하여 주님께서 이 땅과 이 성전을 이렇게 되게 하셨을까?' 하고 탄식할 것이다."

이번의 경우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경우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경우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을 단순히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축복의 담보물로 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지상에서의 임재의 상징물을 주저 없이 버리시고 자기 백성을 심판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말씀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과 관련된 핵심적인 징조로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얼마나 많고 훌륭한 예물과 건축물을 유지하였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과 유대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축복 상징이 아니라, 저주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지상에 하나님의 성전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론

과부의 두 렙돈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야기는 구약에 나오는 성전 파괴의 역사와 성전 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와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하심은 성전이 크고 화려하고 얼마나 많은 액수로 건축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성전 건축(혹은 유지)'과 '헌금'에 과도한 집착을 보입니다. 장차 허물어진 건축물이나 구름떼처럼 많이 모였다가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릴 예배 참석자들의 수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구약과 신약에서 잘 설명되어 있으므로 반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살펴본 바대로 과부의 '고귀한' 헌신과 예루살렘 성전의 허망한 파괴는 우리에게 슬픈 교훈을 주며, 그것이 오늘날 더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기독교 역사와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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